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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70/615)

70화 비공식 랭커 (3)

다음 날.

접객실에 먼저 도착한 윌라스는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로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만나는 건가.’

어제저녁.

윌라스는 밤잠을 설쳤다.

그만큼 로만의 병사들은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발할라의 전사들처럼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고,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은 검술은 변방의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발할라의 사제로서 수많은 강자를 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병사들의 무력이 로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로만은 소문에 부합하는 강자일지도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 기회를 얻지 못한 잠룡(潛龍)일까, 아니면 보여 주기식 영웅 만들기의 꼭두각시일까.’

확실한 건.

직접 확인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윌라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약속 시각이 되지 않았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렸고, 어느덧 시간이 되었는지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왔다.

“로만 도련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탁.

찻잔을 내려놓았다.

심장이 뛰었다.

과연.

로만 드미트리는 어떤 사람일까.

마침내 안으로 들어오는 사내를 확인하는 순간.

“……호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

자연스럽게 윌라스를 내려다보는 눈빛과 적당하게 여유로운 표정.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면서 안목을 기른 윌라스는, 그 모습만으로도 하나의 사실을 확신했다.

‘강자로서의 삶이 익숙한 사람이다.’

정말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가, 호메로스를 쓰러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끝내고.

윌라스는 곧바로 본론을 물었다.

“대전사 전투에서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대답은 담담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은 로만의 반응에, 윌라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아직 본인이 어떤 일을 해냈는지 잘 모르시나 보군요. 호메로스는 단순히 49위에 랭크되어 있는 강자가 아니라, 4성의 경지에 오르면서 30위 이상의 순위를 기대하던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을 겨우 25살의 로만 드미트리, 당신이 쓰러트린 겁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이번 일.

호메로스의 패배가 충격적인 것이 아니다.

그를 쓰러트린 상대의 나이가 25살이라는 것이, 윌라스로 하여금 드미트리로 오게 한 원동력이었다.

“25살의 나이에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강자. 겨우 20대에 3성의 경지에 오른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인데, 4성의 가능성마저 암시한다면 카이로 왕국 역대 최고의 재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기에 발할라 신전으로서는 이번 일의 사실 여부를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로만이 몸을 뒤로 젖혔다.

다리를 꼬고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제가 행한 일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빙빙 돌려서 하시는군요. 곧바로 본론을 말씀하십시오. 발할라의 사제가 드미트리에까지 행차했다면, 명확한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판이 깔렸다.

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진실을 확인할 차례였다.

윌라스가 말했다.

“일단 진실을 확인하기에 앞서 랭킹의 절차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랭킹전은 공식전과 비공식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공식전은 발할라 신전의 허가를 받고, 참관인이 보는 앞에서 상대를 쓰러트려 본인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공식전의 승패는 곧바로 랭킹에 반영되며, 랭킹 명단은 내년 초에 발표되기는 하지만 랭킹을 증명하는 신분증이 발급됩니다. 만약 로만 님이 공식전의 절차대로 호메로스를 쓰러트렸다면, 증명의 과정은 생략하고 카이로 왕국의 새로운 49위의 랭커가 탄생했음을 세상에 공표했겠지요.”

문제는.

비공식전이었다.

공식전과는 다르게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비공식전은, 사실 처음부터 그 단어가 존재했던 건 아니다.

“비공식전은 랭커들의 갑작스러운 대결로 인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만약 랭킹전이 아닌 자리에서 누군가가 랭커를 쓰러트린다면. 공석이 되어 버린 자리는 1년 뒤에 한 단계씩 앞으로 당겨집니다. 비공식전의 승리로는 절대 쓰러트린 랭커의 순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결이 끝나고서라도 본인이 그만한 자격이 있는 강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면. 랭킹이 하나씩 당겨지면서 생긴 말석의 자리를 비공식전의 승자에게 부여합니다.”

결론은 단순했다.

비공식적으로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로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증명을 통해 호메로스의 순위가 아니라 말석인 100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사실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발할라 신전은 직접 확인한 것만을 믿기에, 수많은 증인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로 비공식적인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서 저희는 오라 측정기를 사용합니다. 증명의 방식은 간단합니다. 오라 측정기를 사용했을 때 저희가 정해 둔 랭커의 기준을 통과한다면, 말석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해서 랭커로 이름을 올립니다. 이때는 공식전과는 다르게 신분증이 발급되지 않습니다. 언제 사실이 뒤바뀔지 모르는 일이고, 처음 랭커 명단이 발표되었을 때 100위의 랭커는 도전자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확률이 높아 안전기까지 시간을 두는 편입니다.”

설명이 끝났다.

이제는.

오라 측정기로 진실을 확인할 차례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윌라스의 모습에, 로만이 물었다.

“그렇게까지 랭커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글쎄요. 랭커로 이름을 올린다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제가 검사의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명의 검사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 굳이 특별한 보상이 없더라도, 명예 하나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피식.

로만이 웃었다.

무림에서도 천하십대고수와 같은 랭킹 제도가 있다.

그걸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로만은 윌라스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

좋지만은 않은 일이다.

드러난 만큼 시선이 따라붙고, 그것은 변수를 낳는다.

하지만.

“오라 측정기와 같은 방식으로 제 자격을 증명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차라리 새로운 상대를 배정해 주십시오. 호메로스와 비슷한 순위여도 좋고, 아니면 그 이상의 순위여도 상관은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발할라의 사제가 직접 보는 앞에서, 랭커를 쓰러트림으로써 제 자격을 증명하겠습니다.”

로만.

천마 백중혁은, 드러나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혹스러운 대답이었다.

윌라스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리도 당돌한 유형의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

‘대체 랭킹전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랭킹전.

애들 소꿉놀이가 아니다.

사람들은 랭킹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검사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였고, 실제로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웬만해서는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비등한 실력의 강자들이 붙게 되면 싸움이 격렬해질 수밖에 없고, 눈먼 칼은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30위의 수문장이라 불리는 페르난도를 진정한 랭커라고 말했다.

페르난도는 도전자들의 도전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항상 싸움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증명했다.

그에 반해.

랭킹에 이름을 올리고 절대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겁쟁이들도 있었다.

그런 부류들은 해가 지날 때마다 순차적으로 랭킹을 떨어트리는데, 그들은 영리하게도 끝까지 싸우지 않다가 마지막 해에 한 번 대결을 펼쳐서 순위를 지켜 냈다.

그만큼 랭킹전은 강자들이라고 해도 선호하지 않았다.

고생해서 부와 명예를 이루었는데, 괜히 도전 한번 잘못 받아들였다가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로만의 말에.

윌라스가 말했다.

“사실 당신의 말처럼 새로 랭킹전을 진행하는 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랭킹전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동의와 일정 문제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공식적인 랭킹전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카이로 왕국 동북쪽 일대에 랭킹에 이름을 올린 강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고로, 이 문제는 상대가 없기에 애초에 성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것참, 아쉽군요.”

상대가 없다면.

공식적인 랭킹전은 불가능했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윌라스가 말했다.

“오라 측정기로 테스트를 진행하겠습니다. 만약 오라 측정기의 기준치를 통과한다면, 로만 드미트리님은 카이로 왕국의 새로운 랭커로서 이름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오라 측정기.

거창한 설명과는 다르게 외형은 매우 심플했다.

주먹만 한 구체의 형태였는데, 윌라스가 그것을 보여 주며 설명했다.

“테스트 방법은 간단합니다. 오라 측정기에 마나를 불어넣으면, 오라 측정기는 마나의 위력에 따라 색깔이 달라집니다. 1성은 빨간색, 2성은 주황색, 3성은 노란색, 4성 이상부터는 초록색을 보여 줍니다. 참고로 로만 님은 4성의 오라 검사인 호메로스를 쓰러트렸기에, 랭킹의 말석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격인 3성의 노란색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것도 짙은 노란색을 말입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이해했습니다.”

특별히 이해할 것도 없었다.

그냥.

마나를 불어넣으면 끝날 일이었다.

로만은 구체를 받았다.

새로운 문물의 결정체에,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샐러맨더 대륙은 무림과는 다르게 마법이 발달한 세상이다. 무인의 무력을 간단하게 측정하는 도구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는, 마법의 힘을 결코 간과할 수 없겠지. 대체 마법사는 어떤 존재일까? 무림의 주술사(呪術師)와 같을까, 아니면 인간보다는 신의 영역에 도달한 초인들일까.’

오라 측정기를 살펴보았다.

원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만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만약 이 세상의 방식으로 오라를 분출한다면 오라 측정기는 어떻게 반응할까?’

두 세상.

오라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샐러맨더 대륙의 검사들은 과할 정도로 오라를 한 번에 분출해 버린다면, 무림인들은 잘 정제(精製)한 마나를 응축시켜서 사용한다.

그래서 로만의 오라를 확인한 사람들은 다들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1성의 오라만 사용해도 바람이 휘날리는 극적인 효과가 일어나는데, 로만은 이게 오라인지 의심이 될 정도의 힘만으로도 상대를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오라의 분출.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로만도 그 원리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지만, 비효율적인 방식이라 생각하기에 지양할 뿐이었다.

‘재밌겠네.’

한 번쯤.

새로운 세상의 상식을 따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라 측정기가 분출하는 오라에 맞춰서 제작되어 있다면, 로만도 그에 따라 오라를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면 될 일이다.

과연 이 세상의 마법 문물은 자신의 힘을 어느 정도라고 평가할지.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지만, 생각하다 보니 제법 나쁘지 않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하십시오.”

윌라스가 재촉하는 말에.

꽉.

로만은 오라 측정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오라 측정기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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