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모여드는 관심 (1)
카이로의 수도.
카이로스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곳은 어디일까?
타국의 사람들은 그 질문에 당연히 왕궁(王宮)을 말하겠지만,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들의 말은 달랐다.
“베네딕트 후작의 대저택이야말로 카이로스 제일의 명소다.”
베네딕트.
중앙 정부의 실세이자 살아 있는 권력으로 불리는 그는, 왕궁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대저택을 건설했다.
왕궁으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곳.
입궁을 위해서는 베네딕트 후작의 눈에 띄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권력의 핵심이었다.
그런 그에게.
변방에서 하나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게 사실인가?”
툭.
사인하던 펜을 내려놓았다.
백발을 멋들어지게 뒤로 넘긴 중년의 사내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가문의 책사(策士)를 바라보았다.
“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발할라 신전의 윌라스가 직접 드미트리로 내려가 3성의 오라 검사임을 확인했고, 대전사 전투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취합해 본 결과 로만 드미트리가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것이 맞습니다. 다만, 호메로스가 방심한 나머지 4성의 오라는 발휘하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올해 몇 살이지?”
“스물다섯입니다.”
“겨우 스물다섯의 나이에 3성의 경지라. 변방에서 대단한 인재가 나타났군.”
20대에 3성.
이례적인 성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성장을 보였던 검사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5성의 벽을 뚫고 대륙에서 명성을 떨쳤다.
베네딕트 후작으로서는 당연히 탐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왕실의 로열 나이트(Royal knight)가 카이로 제일의 검으로 굳건히 버티고 있는 만큼, 실력 있는 검사에 대한 그의 욕망은 대단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소문대로의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입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세력들의 동태는?”
“모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특히, 양 제국의 움직임이 가장 적극적입니다.”
“빌어먹을 제국 녀석들. 카이로에서 인재가 나타났는데, 뻔뻔하게 우리보다 먼저 접촉하려 하다니.”
현재.
카이로 왕국은 네 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다.
국왕을 따르는 왕실파, 국왕의 삼촌인 베네딕트 후작을 중심으로 뭉친 귀족파, 그리고 카이로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외세(外勢)에 붙은 친 크로노스 제국파와 친 발할라 제국파가 존재했다.
약소국의 현실이었다.
대놓고 제국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는데도, 카이로 왕국으로서는 특별하게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미래에 5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검사다. 다른 세력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빠르게 사람을 보내 로만 드미트리를 영입하거라.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지원해 주겠다. 특히 왕실. 그들에게만큼은, 로만 드미트리를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책사가 고개를 숙였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변방에 나타난 인재.
로만을 영입하기 위해서, 카이로 왕국의 실세들이 드미트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 무렵.
드미트리는 매일 축제 분위기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카이로 왕국의 랭커가 되었다!”
아직 비공식 랭커라 할지라도.
동북쪽 일대 최초의 랭커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드미트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로메로 남작은 기꺼이 주머니를 풀었다.
산해진미(山海珍味)로 가득한 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받아들였고, 아침부터 밤까지 웃음소리가 끊기지 않을 정도로 축제를 즐겼다.
그런 분위기에.
유일하게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 있었다.
“후우.”
로렌스 자작.
그는 남들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웬만해서는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드미트리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웃는 얼굴로 드미트리를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다.
단순히 로만의 업적을 축복하는 것만으로 끝내면 참으로 좋을 텐데, 잊을 만하면 다른 귀족들이 그의 속을 긁었다.
“크하하하하, 이건 동북쪽 일대의 경사입니다. 드디어 우리도 랭커를 배출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렌스 자작님은 괜찮으십니까? 만약 플로라의 혼인을 그대로 진행했다면, 로만 드미트리라는 걸출한 인재를 사위로 둘 뻔하지 않았습니까? 이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제가 만약 로렌스 자작님의 입장이었다면 드미트리의 파티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배가 아팠을 겁니다.”
조심스러운 음성과는 다르게.
대놓고 로렌스 자작을 비웃는 말이었다.
순간 집중되는 시선에, 로렌스 자작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왜 배가 아프겠습니까. 비록 인연이 아니라서 혼인이 무산되었지만, 그래도 드미트리 가문이 부흥하는 모습을 보니 진심으로 기쁩니다. 동북쪽 일대에도 중앙 정부에 발언권을 행사할 만큼의 가문이 탄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기세를 타, 드미트리가 더욱 부흥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역시 로렌스 자작님은 대인배이십니다, 하하하하.”
다들 웃고
떠들었다.
겉으로는 훈훈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로렌스 자작은, 주변의 말처럼 배가 너무나도 아팠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 사위일 수도 있었는데.’
불과 몇 개월.
파혼할 때와 지금의 위상은 극과 극이었다.
그때만 해도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며 파혼당해 마땅한 녀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면, 지금은 로만의 가치가 천정부지(天井不知)로 상승해서 감히 겸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버렸다.
드미트리 가문의 후계자. 카이로 왕국 최연소 랭커.
로만의 이름을 장식하는 수식어들을 들을 때면, 그렇지 않아도 암담한 로렌스의 현실과 겹쳐 보여 속이 쓰렸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매번 파격적인 행보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로만의 모습에, 로렌스 자작은 참담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벌컥벌컥.
와인을 물처럼 들이켰다.
이렇게라도.
로만에 대한 아쉬움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플로라를 위해서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자.’
뒤늦게 플로라를 불러들일 생각은 없었다.
로렌스 자작은 플로라의 선택을 존중했고, 수도로 떠난 딸이 진심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길 바랐다.
다만.
배가 아픈 건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파티 내내 복통에 시달린 로렌스 자작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디론가 마법 통신을 걸었다.
“실비아니?”
그랬다.
아직은, 로만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로렌스 자작이었다.
카이로 왕국.
서부 전선(西部戰線).
한바탕 벌어진 전투로 인해, 카이로가 쌓은 방책 주변으로 수많은 시신과 피가 곳곳에 보였다.
“개 같은 제국 새끼들.”
“내 언제고 크로노스 녀석들의 살점을 생으로 씹어먹는다.”
전장을 정리하며.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이 분노를 토해 냈다.
카이로 왕국은 서쪽으로는 크로노스 제국을, 남쪽으로는 헥토르 왕국과 국경이 붙어 있다.
그나마 헥토르 왕국과는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이 많지 않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은 카이로 왕국이 크로노스의 속국(屬國)이 되기를 요구하며 벌써 몇 년째 국경을 넘어와 공격을 감행했다.
크로노스 제국.
발할라와 같이 대륙의 양대산맥이자 알렉산드로 황제를 배출한 나라.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카이로를 무너트리려 했다면 진즉에 멸망의 길을 걸었겠지만, 각 나라 간의 이해관계로 인해 끝을 보지는 않았다.
시시때때로 국경을 넘어오는 크로노스의 병력들.
최전방에서는 카이로의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내부에서는 크로노스를 따르는 매국노들이 이만 크로노스에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그야말로 약소국의 초라한 현실이었고, 그 외에도 발할라와 같이 카이로를 노리는 외세의 세력들로 인해 카이로는 한 번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다.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시체를 날랐다.
나라가 약하다는 이유로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넓은 평야.
산처럼 쌓인 시체에 불을 지폈다.
제대로 장례식도 치를 수 없는 이 최전방에서는,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망자를 위한 예의였다.
“로드웰, 괜찮아?”
한편에서.
시체를 바라보는 동료에게 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장교의 표식이 있었고, 로드웰이라고 불린 사내는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이제는 익숙해. 하루 이틀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래도 최전방의 현실이 이 정도로 최악일 줄은 몰랐어. 아카데미에서 실전을 위해 훈련소에 투입될 때만 하더라도, 내 앞에는 핑크빛 미래가 기다린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따위 현실이라니. 하루에도 수십 번, 졸업장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갈까 고민이 돼.”
피식.
로드웰이 웃었다.
이해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S클래스로 승격했을 때, 자신을 비롯한 동급생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최악이었다.
실전 경험을 명목으로 최전방 훈련소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지휘관의 자격을 얻어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딱 1년만. 그곳에서 실점 경험을 쌓고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휘황찬란한 명예를 얻을 수 있건만, 그중 절반도 채우지 못한 시점에 멘탈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동료가 말했다.
“그 소식은 들었어? 네 형. 로만 드미트리가 랭커에 올랐다던데.”
순간.
로드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로만의 소문은 들었다.
최연소 랭커라는 타이틀은 최전방에도 알려질 만큼 엄청난 업적이었고, 그로 인해 상급자들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로만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로만은 어떤 사람이냐,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냐.
전에는 존재 자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형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로만.’
기억 속의 형.
그가 정말 3성의 경지에 올랐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기연을 얻었다 할지라도, 자신이 기억하는 로만 드미트리는 회생 불가의 쓰레기였다.
“헛소문이야. 가문에서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만은 랭커에 오르기는커녕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녀석이야. 아직 비공식 랭커라며?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이 밝혀지겠지.”
휑하고 몸을 돌려 버렸다.
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소문의 주인공.
로만은 자신으로 인해 떠들썩한 주변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무덤덤한 얼굴로 훈련에 매진했다.
“후우.”
숨을 골랐다.
아침부터 시작한 훈련으로 인해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예민하게 끌어 오른 감각은 주변의 모든 것을 영역에 두었다.
환골탈태 이후 염화신공을 활용한 수련.
전생의 경지에 버금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확실한 건 착실하게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예민한 감각에.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한스는 익숙한 일이다 보니, 귀신 같은 반응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
“예. 안내할까요?”
예정된 손님은 없었다.
로만은 일단 만남은 뒤로 미루고, 샤워를 한번 끝낸 후에 접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반갑습니다. 벤트너라고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사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로만이 눈짓으로 접객실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자, 벤트너는 그제야 본인의 진짜 신분을 밝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카이로 국왕 폐하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제가 드미트리를 찾아온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 당신을 카이로 왕실의 로열 나이트로 선임하기 위함입니다.”
카이로의 네 파벌.
벤트너는 그중, 왕실파의 사람이었다.
변방의 잠룡.
로만 드미트리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