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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73/615)

73화 모여드는 관심 (2)

로열 나이트.

국왕을 모시는 왕실 기사단으로서, 기사에게 허락되는 최고의 명예다.

아무나 제안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만큼, 벤트너는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사실 로열 나이트를 직접 제안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보통은 왕실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통해 인성과 실력을 모두 합격해야만 로열 나이트에 입단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는 그 예외를 허락할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 수도로 올라가 국왕 폐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다면, 아무런 테스트 없이 로열 나이트에 입단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였다면.

벤트너의 제안에 감격하며 덥석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만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그게 끝입니까?”

“……설마 거절하시는 겁니까?”

당황하는 벤트너.

로만이 웃으며 말했다.

“거절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는 단 한 번도 기사로서의 명예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로서 동북쪽 일대에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데, 대체 왜 수도까지 올라가서 로열 나이트로서 희생을 감당해야만 합니까? 당신의 제안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드미트리 가문이 동북쪽 제일의 대부호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단순히 명예만을 허락하는 제안은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예상 밖의 대답.

벤트너가 말을 잃었다.

모두가 바라는 영광스러운 자리.

드미트리 가문이라면 감격하며 받아들이리라 생각했건만, 로만의 반응은 차가울 정도로 냉소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화를 내며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린 왕의 사정이 어떤지를 알기에, 벤트너는 자존심을 한풀 꺾으며 말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국왕 폐하는 로만 드미트리, 당신을 왕실의 로열 나이트로 선임하길 바랍니다. 귀족으로서의 작위? 로열 나이트로서 충성을 증명하면 드미트리 가문은 새로운 작위를 하사받게 될 것입니다. 수도에는 당신을 위한 저택이 마련될 것이고, 명예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누리게 되겠지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로열 나이트가 되겠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드미트리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발 물러났다.

로만을 영입하기 위해.

벤트너는 최선의 제안을 말했다.

그런데도.

“그게, 왕실의 최선입니까?”

로만은 여전히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벤트너의 표정이 굳었다.

첫 거절.

이해했다.

단순히 로열 나이트가 되라는 제안은,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카이로의 국왕을 곁에서 모시는 조건으로 부와 명예를 약속했건만, 마치 겨우 그뿐이냐는 듯한 눈빛은 벤트너의 심기를 건드렸다.

벤트너가 말했다.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시나 보군요. 국왕 폐하가 당신을 원하는 이유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로열 나이트, 새로운 작위, 수도의 저택 등등은 과분할 정도로 대단한 보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답이라니. 대체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한도 끝도 없이 욕심을 부린단 말입니까!”

인내심이 폭발했다.

그로서는 로만이 같잖았다.

20대의 나이에 3성이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5성 이상의 검사로 성장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에 반해 로열 나이트는 카이로 왕국 최고의 무력 집단이건만, 로만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싸늘해진 분위기.

벤트너의 분노한 눈빛에도, 로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착각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지금으로부터 5일 전. 그레고리 백작 가문의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레고리 백작 가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수도의 저택은 물론이거니와, 수천 평의 땅과 금은보화를 보상으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정략결혼을 통해 혈족(血族)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레고리.

벤트너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크로노스 제국파 녀석이 벌써 움직였단 말인가.’

그레고리는 왕실파가 아니다.

대놓고 크로노스를 따르는 행보를 보이는, 벤트너 입장에서는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녀석이었다.

로만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3일 전에는 덴버 가문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저의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검사로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전부 지원해 주는 대신, 서로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를 제안했습니다. 그뿐만인 줄 아십니까? 바로 어제저녁에는 베네딕트 가문의 사람과 만났습니다. 그들은 당신보다 더 파격적인 제안을 하더군요. 정략결혼을 통해 가문과의 연결 고리를 단단하게 맺고, 앞으로 한 달 안으로 드미트리를 자작 가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당연히 수도의 저택과 금은보화 같은 보상들은 입이 아플 정도로 기본적인 보상에 포함되었습니다.”

덴버 가문.

발할라 제국파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베네딕트 가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족파의 중심이고, 사실상 양 제국의 세력보다 가장 직접적으로 왕실을 위협하고 있는 존재였다.

‘벌써 매국노들의 마수가 닿았구나.’

참담했다.

벤트너는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었다.

사실을 확인하고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카이로의 매국노들은 이미 움직인 상태였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로만이 왜 제안을 거절했는지.

자신의 제안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만약 자신도 로만의 입장이었다면, 왕실의 제안이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다.

로만이 말했다.

“제가 왕실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제안이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 개의 세력이, 세 번의 제안을 하는 동안, 왕실은 드미트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순진하게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되물었을 뿐입니다. 정녕, 로열 나이트라는 단 하나의 명예를 위해 앞선 세 개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 말에.

벤트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끝났다.

지금에 와서 로만을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무능을 드러낸 지금, 벤트너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저희가 한발 늦었군요.”

한숨을 내뱉었다.

이미 포기한 얼굴로, 로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가 무능하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왕실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 그레고리 백작의 크로노스 제국파, 덴버 백작의 발할라 제국파. 그들은 카이로 왕국을 통째로 삼키려는 극악무도한 매국노들입니다. 그들은 카이로 왕국의 권력을 점령하고, 왕실이 국정(國政)에 제대로 관여할 수 없도록 눈과 귀를 막아 버렸습니다. 그나마 로열 나이트의 기사단장님이 카이로 제일 검이라 불리기에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억누르고있습니다만, 저희로서는 아무리 발악해도 세 세력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끝난 문제.

진실을 토로했다.

당당했던 태도는 모두 거짓이었던 모양인지,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표정을 보였다.

“카이로는 약소국입니다. 사실 당신에게 했던 제안들도, 귀족파의 반대에 부닥친다면 귀족의 작위를 언제 하사할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먼 거리를 찾아온 이유는 물리적인 힘만이 카이로 국왕 폐하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간청하겠습니다. 국왕 폐하를 위해 힘을 보태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만약 훗날 매국노들을 모두 물리치고 왕권이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된다면, 그때는 오늘의 선택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먼 미래.

확실하지 않은 약속이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이, 벤트너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나의 왕국, 네 개의 세력.’

익숙했다.

천마신교.

마교를 통치하는 거대한 집단은, 정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수많은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천마의 12번째 아들.

백중혁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형들의 제안을 받았다.

다들 매력적인 제안을 내밀며 백중혁을 영입하려는 의도를 보였고, 백중혁으로서는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왔었다.

그때.

백중혁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제일 튼튼한 동아줄을 붙잡았을까?

아니면, 반골(反骨)의 기질을 발휘해서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을까?

둘 다 아니었다.

어떤 선택이든.

그간의 경험은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만이 말했다.

“앞선 세 개의 제안, 그리고 왕실의 제안은 제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 어떤 제안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하나의 세력을 택해 충성을 맹세하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직접 경험해 보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제 충성심을 바란다면, 지키지도 못할 감언이설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시면 됩니다. 그때는, 제가 직접 왕실을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중립.

로만은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기에.

일부러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았다.

왕실을 포함한 네 세력 모두에게, 혹시 모를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예.”

벤트너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화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희소식이었다.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던 벤트너로서는, 일말의 가능성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카이로 왕실은 나라의 주권(主權)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니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국왕 폐하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두 팔 벌려 당신의 선택을 반기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벤트너.

그 말에도.

로만은 웃음을 보일 뿐, 그가 내미는 간절한 손길을 잡아 주지는 않았다.

네 번의 제안.

네 번의 거절.

상대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벤트너처럼 희망을 보이고 끝내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었고, 오히려 협박으로 압박하는 세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태도를 고수했다.

‘나는 결국 그 어떤 세력에게도 충성을 맹세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적대적으로 돌아설 사이라면, 차라리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이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내 목적이 명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애매한 관계로 시간을 벌면서 힘을 키울 필요가 있다.’

모든 세력에 여지를 남기는 것.

그것의 단점은 하나의 세력을 선택했을 때, 그동안 노력을 들인 다른 세력의 반감을 산다는 것이다.

그 문제는.

로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나중에 로만이 영입 불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할지라도, 그때는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카이로 왕국의 정세는 로만에게 유리했다.

로만이 자신의 일부를 드러냈는데도, 서로를 견제하느라고 바로 짓밟아 버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로만이 무대에 올랐다.

사람들은 로만이 타협이 되지 않는 포식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로만을 설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확실한 건.

랭킹의 파급력은 정말 대단했다.

아직 비공식 랭커인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가 멀다고 로만을 영입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드미트리가 들썩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랭커가 되기를 희망했다.

랭커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부와 명예가 보장되기에, 사람들은 악착같이 말석에라도 이름을 올리려고 발악했다.

한바탕 소란이 마무리되었다.

아직은.

크게 파격적인 제안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들 상식 안에서의 제안을 말했고, 현재의 가능성만으로 전부를 거는 도박꾼은 없었다.

며칠 뒤.

발할라의 사람이, 다시 한번 찾아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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