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남부 훈련소 (1)
드미트리를 떠난 지 열흘.
로만은 남부 전선의 최종 거점에 도착했다.
그곳은 영주가 존재하지 않는 땅으로서, 전장으로 향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마을을 형성한 곳이었다.
일단 남부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에 여독(旅毒)을 해소할 목적으로 여관을 하나 잡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쉬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남부 훈련소로 갈 것이다.”
“예!”
다들 표정이 밝았다.
사실 그들은 좋은 숙소를 기대하지 않았다.
보통 일반적인 귀족들은 병사들에게 허름한 숙소를 내어주고 본인만 안락하게 지내는 경우가 태반인데, 로만은 확실한 휴식을 부여하기 위해서 크고 깔끔한 여관을 통째로 빌렸다.
충성심이 절로 샘솟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안으로 짐을 옮기는 병사들은 신이 나서 빠르게 움직였다.
그사이.
로만은 먼저 들어가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한 달 전에 받았던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네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려 한다는 소식은 들었다. 내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당장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겠지만, 한사코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네 의지를 알기에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전방의 척박한 환경에서 몸이 상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 내가 손을 써서 너를 남부 전선에 배치했다. 항상 명심하거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 곁에는 바로 베네딕트 가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지난 몇 달.
로만은 베네딕트 후작의 끈질긴 구애를 받았다.
귀족파의 수장인 그는 로열 나이트에 대항하기 위한 인재를 영입하길 바랐고, 로만의 등장은 마치 운명처럼 그의 심장에 박혔다.
카이로 왕국의 최연소 랭커. 베네딕트 후작으로서는 애가 닳을 수밖에 없었고, 로만이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애정 공세로 로만의 마음을 공략했다.
그리고 현재.
베네딕트 후작의 인맥으로 로만은 남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의 말처럼.
크로노스 제국과 직접 부딪치는 서부 전선에 비하면 남부 전선은 위험할 일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지만, 그동안 알아본 정보에 따르면 진실은 달랐다.
발할라 정보부 소속의 맥킨은 남부 전선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남부 전선에 배치될지 모르고 있었던 로만이었으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루카스로 하여금 직접 알아보라고 명했다.
‘결국, 직접 부딪혀 봐야 알겠지.’
정보가 사실이라면.
자신은 한직(閑職)에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바쁘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기에, 로만은 이만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로만은 오래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우당탕!
바로 밑에서.
사내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싸우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밑으로 내려가자.
홀에서 싸움이 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쾅!
“이런 버러지 같은 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바로 앨버트 가문의 차남인 헨리 앨버트다! 카이로 왕국 명가의 후손이 이 여관을 쓰겠다는데, 어디 근본도 모를 녀석들이 버티고 지랄이야. 당장 안 꺼져?!”
상황은 뻔했다.
일방적으로 시비가 걸린 것일 터.
그래도 사실 확인을 위해, 로만은 아래로 내려가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주군!”
크리스가 반색했다.
방금까지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그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그게…….”
상황은 이랬다.
로만의 배려로 병사들은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앨버트 가문의 차남이라는 녀석이 병력을 이끌고 여관에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모두 밖으로 꺼지라며 소리를 내질렀다.
아마도 주변에서 제일 크고 깔끔한 여관이기에 본인이 사용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으나, 어떤 이유든 간에 자리를 비워 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앨버트 가문이면 명가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니지.’
이름 없는 가문은 아니다.
나름 걸출한 인재를 배출하며 한때는 명성을 떨쳤지만, 무모하게 세력을 확장하다가 주변의 견제로 한풀 꺾인 가문이었다.
과거의 환상에 빠져서 사는 족속들.
그래도 동북쪽 일대 기준에서는 충분히 대단한 세력이었지만, 상대가 명가라 했을지라도 로만의 반응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왜 나가야 합니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순간, 헨리의 사나운 시선이 로만을 향했다.
“네가 이 녀석들의 주인이야?”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상황 파악 제대로 해. 어디 변방 출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헨리 앨버트가 이 여관을 써야겠어. 어차피 피차 남부 훈련소로 가는 입장이라면, 나와 얼굴을 붉혀서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겠지. 딱 10분 준다. 이 쓰레기들을 내 눈앞에서 전부 치워.”
그는 당당했다.
드미트리 가문의 문양.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헨리 앨버트는 상대가 만만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지금과 같은 행동을 보였다.
‘이게 드미트리의 현실인가.’
우물 안의 개구리.
드미트리는 동북쪽 일대에서만 인정하는 강자였다.
당연히 다른 지역의 가문들은 드미트리를 알아볼 리가 없었고, 같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이름 모를 가문을 대우해 줄 이유는 없었다.
남부 전선으로 배치되는 가문들.
대부분 카이로 왕국에서 권력자로 분류되는 이들이기에, 웬만해서는 트러블 없이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로만은 아까부터,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헨리의 눈빛이 거슬렸다.
“난 여관을 비울 생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지.”
태도가 돌변했다.
말을 놓더니, 보란 듯이 검을 뽑았다.
“검을 뽑아라. 날 이긴다면 기꺼이 여관을 비워 주지.”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헨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감히.
하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적의를 보이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당장 검을 뽑으려는 그때.
옆에 있는 기사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헨리를 말렸다.
“주군, 당장 멈추셔야 합니다!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이번에 최연소 랭커로 올라간 그 검사란 말입니다!”
그 말에.
헨리의 몸이 굳어 버렸다.
순간.
소름이 돋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검을 뽑으려던 자세 그대로, 헨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 자식이 로만 드미트리라고?’
카이로의 최연소 랭커.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드미트리야 변방의 가문이라 문양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25살의 나이에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로만의 명성은 대단했다.
아직 비공식 랭커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발할라 신전에서 로만의 랭킹을 인정했을 정도라면, 로만은 소문만 무성한 놈은 아닐 것이다.
“검을 뽑아라.”
다시 한번.
로만이 재촉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을 뽑길 기다리는 그 모습에, 헨리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검을 뽑았다가는 죽는다.’
로만의 소문 중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
바르코와의 전쟁.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은 로만 드미트리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바르코를 직접 찾아가서 가문의 장자를 죽여 버렸다. 그때의 일은 악명(惡名)으로 남았다.
적이라면 씨를 말려 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랭커라는 소문과 더불어,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도 함께 알려졌다.
그렇기에.
헨리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자존심은 상했다.
앨버트 가문의 남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숙이고 사는 법을 모르고 살았지만, 당장 머리가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까지 자존심을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정녕 소문의 주인공이라면.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일단 눈앞에 닥친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당당했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헨리는 뒷걸음질을 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약속이 있다는 것을 깜빡했네. 이번 일은 내가 사과하는 것으로 치고, 이만 마무리하도록 하지. 운이 좋은 줄 알아. 마음 같아서는 감히 앨버트 가문을 무시한 너를…… 으악!”
탁.
로만이 한 걸음 내딛자.
헨리는 기겁하며 여관을 뛰쳐나갔다.
주인을 잃은 병사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들도 우르르 여관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로만은 싱겁다는 듯이 웃었다.
‘이게 남부 전선의 현실인 건가.’
남부 전선.
귀족 자제들의 휴양지.
그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헨리의 사건.
그건 한 번의 해프닝이 아니었다.
그날.
무려 세 번이나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들은 모두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에 황급히 물러났다.
그러한 상황에 여관 주인이 말했다.
“이곳에서는 익숙한 일입니다. 크로노스 제국의 위협을 받는 서부 전선과는 다르게, 남부 전선은 헥토르 왕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큰 위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국방의 의무를 피하지 못한 귀족의 자제들은 어떻게든 남부 전선으로 오려고 합니다. 괜히 귀족 자제들의 휴양지라고 불리겠습니까? 훈련도 널널하고 목숨을 걸 일도 없으니, 안전하게 국방의 의미를 수행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지요.”
서부와 남부.
같은 전쟁 국가인데도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서부 전선에 차출되는 병력은 정말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러 떠난다면, 남부 전선의 병력은 할 일 없는 한량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남부 훈련소로 향하는 최종 거점에서 분란이 많이 일어났다.
헨리와 마찬가지로 다들 자신의 땅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기에, 앞에서 먼저 여관을 예약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본인들이 원하면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렸다.
재밌는 상황이었다.
아직 훈련소에 입소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남부 전선의 현실이 눈에 보였다.
펄럭.
로만이 지도를 펼쳤다.
남부 전선에 관련한 정보를 기록한 것이었는데, 각 구역을 세분화해서 정보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8일 전, 헥토르 왕국의 정찰병들이 국경을 넘어왔었다. 그들은 남부 전선의 동태를 확인하고 다시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지만, 그 이후에도 무려 세 차례나 남부 전선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직 그들이 정말 전쟁이라는 명확한 의도를 가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파악한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남부 전선은 마냥 안전하기만 한 땅이 아니다.’
전쟁에는 시그널이 있다.
발할라 정보부의 경고.
국경을 살피는 헥토르 왕국의 동태.
그것이 전쟁으로 직결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면 충분한 시그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로만은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남부 전선에서 지내는 2년 동안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면 무사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최악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확률을 떠나 미리 대피할 필요가 있었다.
남부 전선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을 대비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다른 병력과는 다르게, 로만과 병사들은 지난 몇 달 동안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휴양을 보내러 온 남부 전선의 쓰레기들을 믿을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 살아남아, 앞으로의 계획을 위한 포석을 다질 것이다.
“전쟁이라.”
코끝에서.
익숙한 피 냄새가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