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남부 훈련소 (3)
헨리가 뺨을 부여잡았다.
얼얼한 충격.
헨리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큰 눈망울을 껌뻑이며 베일 자작을 올려다보았다.
“……외삼촌?”
헨리의 기억 속에.
베일 자작은 인자한 외삼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헨리가 자라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헨리가 부탁하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래서 한때는 부모님보다 외삼촌을 좋아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만큼 헨리에게는 중요한 존재였는데, 설마 그에게 뺨을 맞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뺨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충격보다도, 외삼촌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 헨리의 반응에도.
베일 자작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로만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것 참, 내가 미안하게 됐네. 조카의 정신 교육을 확실하게 해야 했는데, 어릴 때부터 워낙 철없이 자란 녀석이라 그만 실수를 저지른 것 같네. 내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지.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 일은 눈감아 주게나.”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다.
훗날.
얼마나 발전할지 모르는 존재.
게다가 베네딕트 후작의 총애까지 받고 있으니, 베일 자작은 빠르게 사과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매우 합리적인 결단이었다.
아무리 평소에 아끼는 조카라지만, 본인의 앞길과 맞바꿀 정도의 애정은 아니었다.
막말로 이건 헨리의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헨리의 뺨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충격을 받은 헨리와 용서를 구하는 베일 자작.
굳이 문제를 키울 필요는 없었다.
헨리가 보여 준 행동은, 로만의 세상에서 적의(敵意)라고 구분하기에는 애들 장난과도 같았다.
물론.
베일 자작의 현명한 판단이 없었다면.
상황은 이리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베일 자작님을 봐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맙네.”
애써 웃어 보이는 베일 자작.
로만이 물러나는 모습에, 그는 도끼눈을 뜨며 헨리를 보았다.
“헨리, 네가 대체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그래도 어떻게 외삼촌이 날 때릴 수 있어?”
“이런 멍청한 녀석! 로만 드미트리는 베네딕트 후작님이 눈여겨보고 있는 인재야. 로만을 영입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텐데, 그런 인재와 척을 져서 대체 어떤 이득을 보겠다는 거야?! 헨리야. 대체 언제 철들래? 앨버트 가문에서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동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이곳에서도 똑같이 행동했다간 가문에서처럼 널 지켜 줄 수가 없어.”
냉정한 현실이었다.
앨버트 가문이 정말 대단한 가문이었다면.
헨리는 애초에 남부 전선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국방의 의무 자체를 면제받았을 것이다.
그게 현실이었다.
애매한 권력.
헨리는 현실을 몰랐고, 떠오르는 실세를 알아보질 못했다.
그러다 문득.
베일 자작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의 일로 로만 드미트리가 우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헨리. 앞으로 너는 훈련부터 시작해서 예비 부대 편성 모두 로만과 붙여 줄 테니까,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와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명심해. 만약 이 외삼촌의 말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네 어머니에게 한 소리 듣는 한이 있더라도 널 서부 전선에 보내 버릴 거야. 알겠지?”
그 말에.
헨리는 직감했다.
한 번의 실수로, 안락한 군 생활은 완전히 끝나 버렸다고 말이다.
* * *
한바탕 소란이 마무리되고.
로만은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남부 훈련소에서 임의로 배정했는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특혜를 받았는지가 보였다.
‘베일 자작이 애를 썼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다른 귀족들이 다 낡아 빠진 구식 건물에서 짐을 푸는 모습을 목격했다.
남부 훈련소의 사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었으나, 로만의 숙소라고 배정된 건물은 너무나도 깔끔한 신식 건물이었다.
딱 한 팀만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단층 건물.
권력에 대한 베일 자작의 야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야망을 대놓고 드러내는 인물은 다루기가 쉽지. 남부 훈련소에서의 생활이 그리 나쁘지는 않겠어.’
베일 자작의 요구처럼.
로만이 그를 중앙 정부로 끌어올려 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지금은 충분히 활용해 먹을 필요가 있었다.
끼익.
숙소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병사들이 짐을 거의 정리한 상태였다.
로만을 발견하고 경례를 하려는 그들의 모습에, 로만은 문 끝에 매달린 방울을 가볍게 울렸다.
딸랑딸랑.
순간.
병사들의 행동이 모두 정지되었다.
방울의 의미.
지난 몇 달간의 훈련에서, 그들의 뇌리에는 하나의 명령이 각인되었다.
“비상사태다!”
“모두 전투태세를 준비해!”
잘 정돈되었던 공간이 엉망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바닥에 쏟아 냈다.
그리고는 작은 군장에 물건을 쑤셔 넣었고, 30명의 병사가 동시에 움직이는 장관이 펼쳐졌다.
로만은 밖으로 나왔다.
숙소에 핵폭탄을 떨어트려 놓고는.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문을 주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숙소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타다닥.
착착착.
나오는 순서대로 로만의 앞에 이 열로 도열했다.
재빠르고 정돈된 모습.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들은 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똑바로 섰다.
로만이 말했다.
“2분 39초. 아무리 숙소를 정리하는 도중이었다고는 하나, 전투 준비를 위해 2분 이상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은 너무 느리다. 너희들에게 누누이 말했었지. 적은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하도록 배려해 주지 않는다고. 언제, 어디서, 누가 우리를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짧은 시간에 최선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만약 다음 비상 신호에도 2분 이상의 시간이 소모된다면, 그때는 그에 합당한 벌을 각오하도록.”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병사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대답했다.
참으로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남부 훈련소에 입소한 모든 병력 중에, 로만을 따르는 병사들만큼이나 군기가 잡힌 이들은 없었다.
귀족들의 휴양지.
남부 훈련소는 군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명령을 내리는 로만도.
명령을 따르는 병사들도.
지금의 상황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 * *
그 시각.
남부 훈련소의 총괄 교관인 맥버니는, 훈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아 내질 못했다.
“내가 이따위 훈련이나 준비하고 있다니.”
한때.
그는 서부 전선에서 활약하던 베테랑 전사였다.
나라를 향한 충성심 하나로 서부 전선에 자원했고, 약 십 년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카이로 왕국을 지켜 냈다.
그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그는 백인장의 자리에 올랐다.
평민의 신분으로 시작해서 백 명을 진두지휘하는 대단한 위치에 올랐지만, 그가 나락으로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3년 전.
크로노스 제국이 작정하고 국경을 넘어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경고성의 의미로 카이로 왕국을 공격했고, 서부 전선을 지키던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맥버니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처절한 전투 끝에 서부 전선이 함락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날 맥버니는 검을 사용하는 오른팔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이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보다도. 그 순간에, 맥버니는 전사로서의 자신의 삶이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예상대로였다.
전장에는 불구(不具)를 위한 자리가 없었다.
맥버니는 백인장 자리를 박탈당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카이로 왕국은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맥버니. 자네가 그간 전장에서 보여 주었던 공을 인정하는 의미로, 자네를 남부 훈련소의 훈련 교관으로 임명할 생각이라네. 비록 전장을 떠나는 결정이나, 그곳에서나마 카이로 왕국을 위해 일해 주길 바라네.”
맥버니의 현실이 바뀌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은 카이로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남부 전선은 서부 전선과는 다르게 전쟁에 대한 인식이 바닥에 떨어졌고, 남부 훈련소에 입소하는 대부분은 정말 전쟁을 각오한 것이 아니라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목적을 보였다.
그렇다 보니 남부 훈련소의 훈련 시스템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보통 서부 훈련소에서는 귀족이라 할지라도 병사들과 똑같이 훈련을 받도록 하는데, 남부 훈련소는 귀족들은 아예 훈련에서 열외였다.
땡볕에서 훈련을 진행하는 동안.
귀족들은 그늘 밑에서 낮잠을 청했다.
남부 훈련소의 지휘관도 그 정도는 넘어가 주었기에, 훈련을 준비하는 교관의 속만 썩어 들어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참담한 얼굴로.
훈련 계획표를 내려보았다.
3주간 기초 체력 훈련부터 시작해서 훈련 시스템을 빽빽하게 계획했지만, 어차피 병사들을 지휘하는 귀족들이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큰 의미가 없었다.
전쟁이란 결국, 머리싸움이다.
지휘관들은 단순히 명령권자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병사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그들의 호흡에 맞춰 움직일 체력도 갖추어야만 한다.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
그냥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전쟁이 뚝딱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쓰레기가 대부분이었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남부 훈련소에서 벌써 3년.
의욕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겠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귀족들은 한가로이 여유를 부릴 동안, 맥버니는 병사들이라도 제대로 가르쳐 볼 생각이었다.
치열한 전장에서.
그는 ‘만약’이라는 단어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 * *
예상대로였다.
다음 날.
훈련장에 도착한 귀족들은, 훈련이 시작되기도 전에 삼삼오오 거목이 만들어 준 그늘에 모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나중에 우리 영지에 한번 놀러 오면, 향락(享樂)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지.”
“약속하셨습니다. 형님만 믿고 꼭 찾아가겠습니다!”
“아우의 방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이미 그들은 통성명을 끝냈다.
같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동지라는 하나의 연결 고리로, 그들은 오랜 친우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그에 반해.
병사들은 땡볕에서 훈련을 기다렸다.
그들은 로만이 데려온 사병들과는 다르게, 가문에서 국방의 의무를 위해 붙여 준 병력이었다.
애초에 정예병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각 귀족 가문들은 2년간 의미 없이 남부 전선에 묶여 있을 병력의 수준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고, 그러한 이유로 사실상 제대로 군사 훈련을 받아 보지도 못한 징집병들로 머릿수를 채웠다.
대열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병사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장을 헐겁게 벗어 놓는 그들의 모습에, 맥버니는 시작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역시.’
언제나.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서부 전선에서처럼 강한 충성심을 가진 병사를 지도하면 자신도 자부심이 차오르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맥버니의 시선에는 ‘병사’라는 명칭 자체가 부끄러운 이들이 보였다.
만약 저런 오합지졸들이 서부 전선을 지킨다면? 단언컨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방어선이 무너질 것이다.
‘같은 전쟁 국가인데 어찌 이리도 다른 걸까.’
감정을 억눌렀다.
자신은 남부 훈련소의 총괄 교관으로서.
부여된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그것이 직업적인 자부심을 떨어트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팔을 잃으면서 과거의 삶도 같이 사라졌다.
그때였다.
‘……?!’
병사들은 각자 세력마다 도열했다.
그런데 그중.
어수선한 다른 병사들과는 다르게 열을 맞춰 도열한 세력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하늘에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병사들과 같이 서 있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였다.
맥버니의 예상은 틀렸다.
올해는.
그간 보았던 쓰레기들과는 다른, 드미트리의 돌연변이가 남부 훈련소에 입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