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615)

82화 대비하지 못한 재앙 (3)

적들이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만은 제5 방어선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남부 전선은 전체적으로 국방 의식이 떨어지는 곳이지만, 그중 제5 방어선은 지휘관인 브루스 남작으로 인해 그야말로 최악의 전력을 갖추고 있다. 노후화된 장비와 썩어 빠진 정신 상태로는 오래 버틴다고 할지라도 2시간을 채 넘기지 못할 터. 최소 1시간 안에는 도착해야만 한다.’

루카스의 정보.

그리고 맥버니가 준 책에 똑같이 언급된 내용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로만은 예비 부대의 간부에게 먼저 가겠다고 통보한 뒤에, 병사들을 데리고 빠르게 이동했다.

예비 부대에서 약 2시간 거리.

상식적으로 그것을 반으로 줄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로만의 병사들은 조금의 불만도 없이 로만을 따라 달렸다.

그간의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매일 무거운 군장을 메고 산을 끊임없이 올랐던 병사들로서는, 평지에서의 달리기 정도로는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어느새 제5 방어선 근방에 도달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한 사내의 모습에, 로만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는 병사들에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오오, 예비 부대 병력이구나!”

사내가 반색했다.

브루스 남작.

그에게 예비 부대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그는 뻘뻘 흘리는 땀을 소매로 닦아 내더니, 로만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이 병사들의 지휘관인가? 관등성명(官等姓名)은 생략하고, 일단 나를 후방으로 안내해다오. 지금은 제5 방어선을 도와주는 것보다, 내가 왕실에 남부 전선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숨을 계속 헐떡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하대하는 브루스 남작의 모습에, 로만은 그의 모습을 살폈다.

‘제5 방어선의 지휘관.’

인명부에서 확인한 얼굴이었다.

문제는.

전쟁이 발발한 지금 그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가능성은 두 개밖에 없었다.

이미 제5 방어선이 함락을 당했거나, 아니면 혼자 도망을 쳤거나.

“브루스 남작. 왜 병력도 없이 이곳에 혼자 있지?”

“브루스 남작?! 이런 건방진 새끼를 보았나. 예비 부대 소속이면 기껏해야 준귀족일 텐데, 감히 내게 반말을 해?”

“지금 뭔가를 착각하나 본데…….”

콱.

“커억?!”

로만이 브루스 남작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애처로운 움직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브루스 남작은 발악하며 로만의 손길을 뿌리치려 해 보았지만, 강력한 악력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도록 강하게 억압했다.

브루스 남작을 내려다보는 로만 드미트리.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사람의 눈빛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사나운 그것은, 브루스 남작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로만이 말했다.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을 의미하지. 지휘관이라는 작자가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 군법(軍法)에 따르면, 탈영병은 신분과 관계없이 즉결처형할 수 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너 설마…….”

“설마가 아니야.”

서걱!

바람이 불었다.

로만이 검을 뽑는 장면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햇볕에 반사되는 검날이 브루스 남작의 목을 갈랐다.

바닥에 떨어지는 브루스 남작의 머리.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 얼굴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탁.

피를 털었다.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귀족을 죽인 것은 엄청난 사건인데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바라보는 로만의 눈빛은 덤덤했다.

“적어도 퇴각을 명하고 도망쳤다면, 내 손에 죽는 일은 없었겠지.”

이번 일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전쟁 중이다.

증인은 로만의 병사들밖에 없었고, 그들도 로만과 다르지 않게 방금의 상황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바르코를 무너트리는 과정에서.

로만은 포식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어쩌면 브루스 남작이 오히려 소리를 질렀을 때, 그들 또한 지금과 같은 결말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가자.”

먼저 걸음을 옮기는 로만.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병사들은 브루스 남작의 시체만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빠르게 따라붙었다.

* * *

겨우 1시간.

적들의 공격이 시작된 지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은 수성의 이점을 살려야 하는 시각이건만, 성문이 뚫린 제5 방어선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되었다.

푹!

“커억.”

“크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카이로의 병사들을 도륙했고, 성문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로 인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먼지가 쌓인 마법 병기들은 말을 듣지 않았고, 그렇다고 화살을 발사하자니 벌써 성벽 위에도 적들이 난입했다.

그래도.

병사들은 끝까지 싸웠다.

브루스 남작이 결사의 항전을 하라 명했기에, 제5 방어선의 유일한 기사인 스티븐은 악에 받쳐서 검을 휘둘렀다.

“죽어!”

푸확!

적병의 피로 얼굴이 흠뻑 물들었다.

그나마 제5 방어선에서 ‘진짜 군인’으로 불리는 스티븐은, 막아서는 적들을 차례로 베어 버렸다.

예리한 검술에 죽음을 맞이한 병사만 벌써 열둘.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병들의 모습을 확인하니, 스티븐으로서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끝났다.

이미 패배한 싸움이었다.

성문이라도 건재했다면 어떻게 버텨 보겠지만, 성문이 열린 순간부터 적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찾아올 줄 알았어.’

방심은 전염되었다.

장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경계 근무를 소홀히 하는 태도는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런데 대대로 모두가 안일하게 행동했다면.

사람들은 그걸 관행(慣行)으로 받아들였다.

남부 전선은 지휘관의 힘이 강하다.

일개 기사로서는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고, 현실을 수긍하다 보니 지금의 상황이 되었다.

쿠르르르릉.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성벽으로도 밀려드는 적군들.

눈앞이 캄캄했다.

수성의 이점을 보유하고도, 제5 방어선은 겨우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대로 전멸을 당할 수는 없다. 후퇴해서라도 병사들을 살려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황급히 지휘관을 찾았다.

명령은 지휘관의 영역.

브루스 남작을 설득해 병사들을 후퇴시킬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살펴도 지휘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문득.

혼자 뛰어가던 브루스 남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도망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명색이 한 방어선의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스티븐은, 이곳이 자신의 사지(死地)임을 직감했다.

“좆 같은 돼지 새끼.”

그를 따라 도망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 하나 살자고 모두를 버릴 바에는,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죽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크아아아아!”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적들을 베고, 또 베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브루스 남작은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생존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고, 스티븐과 같은 중요한 인물은 더더욱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죽음을 받아들였기에. 스티븐은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 가는데도, 광기에 젖어 적들의 목숨을 취했다.

서걱!

적의 살을 베었다.

검을 통해 생명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대가로 스티븐도 뒤에서 창에 찔리고 말았다.

퍽!

“커억.”

고통이 뇌리를 관통했다.

이제는 죽음이 눈앞에 보였다.

간신히 자신을 찌른 병사의 머리를 베어 낸 그는, 바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검을 보며 생각했다.

‘끝이구나.’

이제는 한계였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푸확!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새빨간 핏물을 흩뿌리며 나타났다.

* * *

로만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문은 뚫리고 난 뒤였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먼저 앞으로 달려나가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선봉에 서겠다. 차례로 적들을 정리하며 나를 따라와라.”

전생과 같았다.

천마 백중혁.

그는 항상 선두에서 누구보다 먼저 적들과 싸웠고, 그렇게 무림 정벌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 세상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한 명이라도 더 죽인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끝낼 수 있음을 알았다.

로만은 아비규환으로 변해 버린 땅에 몸을 날리더니, 자신을 발견한 적군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푸확!

학살(虐殺)의 시작이었다.

가장 먼저 협공을 펼친 병사 두 명은 일격에 목이 날아가 버렸고, 사방에서 로만을 덮친 병사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로만은 양 떼 사이에 떨어진 한 마리의 늑대처럼, 마주치는 족족 적들을 베어 버리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서두르진 않았다.

적당한 간격으로.

병사들과의 거리를 유지했고, 자연스럽게 병사들에게 향해야 할 칼날이 대부분 로만에게 집중되었다.

“괴, 괴물 같은 새끼!”

“저 녀석을 죽여!”

헥토르의 병사들.

그들도 로만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그들이 동시에 로만을 공격했지만, 아무리 많은 숫자가 덤벼들어도 시체가 되는 쪽은 헥토르 왕국이었다.

겨우 5분.

로만은 그 짧은 시간에 수십의 병사를 베었다.

검에서는 타인의 피가 뚝뚝 흘러내렸고, 로만도 어느새 피로 흠뻑 물들었다.

그때였다.

로만의 시야에, 발악하며 적들과 싸우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스티븐?’

인명부에 있는 인물.

루카스의 정보대로라면, 만약 제5 방어선에 배치되었을 때는 그나마 스티븐 정도가 활용 가치가 있다고 설명되었다.

그렇기에.

로만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앞을 막아서는 적들을 도륙했다.

그리고는.

스티븐이 죽음을 받아들인 그 타이밍에.

스티븐에게 검을 휘두르던 적군의 목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푸확!

툭.

데구루루.

머리가 땅바닥을 굴렀다.

서로 통성명할 시간은 없었다.

적들은 많은 수가 성벽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고, 로만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적들을 쉬지 않고 베었다.

“……이게 무슨.”

일련의 광경.

스티븐은 넋을 잃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적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로만의 모습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남부 전선에 저런 인물이 있었던 말인가.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그는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제5 방어선 예비 부대에 배정될 예정이다.”

오늘 아침.

브루스 남작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남부 전선에 랭커가 배정된다는 소식에, 스티븐은 솔직히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랭커는 강자다.

막말로 남부 전선보다는 서부 전선에 필요한 인재고, 로만 드미트리가 정녕 왕국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제5 방어선에 배정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이렇게나 빨리 도착한 로만의 모습에, 스티븐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푹!

“……크르륵.”

근처에 남은 마지막 적을 정리했다.

로만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스티븐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스티븐인가?”

“맞습니다.”

“브루스 남작은 죽었다. 지금부터는 네가 이곳의 책임자고, 수년을 제5 방어선에서 근무한 네 판단으로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를 말하라. 만약 네 판단으로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나 로만 드미트리는 예비 부대의 책임자로서 병력을 모두 후퇴시키도록 하겠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머릿속이 선뜻 정리되질 않았다.

로만은 스티븐에게 ‘경험’에 따른 조언을 구했고, 스티븐은 짧지만 신중하게 고민하더니 말했다.

“……사실 이미 대세가 많이 기운 전투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후퇴를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나, 그랬다간 적들에게 유리한 위치를 내주게 됩니다. 남부 전선 뒤로는 강물이 흐릅니다. 저들로서는 전쟁이 길어질 것을 대비해서 보급 병력이 이동할 길목을 확보해야 하는데, 다섯 군데의 방어선을 점령하지 못하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말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할수록, 이곳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판을 뒤집을 필요가 있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적들이 더 이상 성문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성벽이 무너진 틈은 통로가 그리 넓지 않지만, 성문은 다릅니다. 만약 딱 10분의 시간만 확보할 수 있다면. 예비 철책을 활용해서, 궁여지책으로나마 적들의 진입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유일한 방법이었다.

적들이 모두 성안으로 진입하면.

승산은 없었다.

스티븐은 아주 힘든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후의 상황을 생각한 최선의 선택을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이미 수많은 적군이 성안으로 들이닥친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저들을 뚫고 성문을 확보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로만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철책을 설치할 공간을 확보하겠다. 너는 지금 당장, 병력을 움직여 철책을 준비하라.”

그 말에.

스티븐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