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615)

84화 대비하지 못한 재앙 (5)

성문과 맥클리어리 남작과의 거리.

멀었다.

앞에서 득실거리는 적군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로만의 세상에서는 달랐다.

‘상대의 지휘관이 방심하고 있다.’

카이로 왕국의 전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일까.

맥클리어리 남작은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조금 앞으로 나온 상태였다.

물론 그 정도의 거리만으로도 충분히 멀리 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다가가지 못할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원래는 스티븐과 그의 병사들이 철책을 설치할 때까지 성문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로만은 상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땅을 박찼다.

‘지휘관을 죽인다.’

전쟁을 빠르게 끝내는 방법.

수많은 전장에서 경험했듯, 지휘관의 목이 날아가는 순간 적들은 단번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막아!”

“적은 혼자다!”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분노했다.

감히 홀로 성 밖으로 나온 로만의 모습에, 그들은 사나운 얼굴로 로만을 일제히 공격했다.

수많은 적과 뒤엉키는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무기는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목숨을 앗아 갈 터.

하지만, 그 어떤 공격도 로만에겐 통하지 않았다.

타타탕.

공격을 모두 튕겨 냈다.

그뿐만 아니라, 공격을 시도했던 병사들은 어느새 잘려 나간 사지에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수백의 적.

그들이 유리한 것이 상식이었다.

분명히 로만이 쓰러져야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의 피해만 늘었다.

“비켜라!”

“더 이상 날뛸 수 없게 해 주마!”

헥토르의 기사들.

맥클리어리 남작의 명령을 받은 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기사가 아니었다.

오라를 발현할 줄 아는 오라 검사였고, 그들의 검에서 제각기 다른 형태의 오라가 형성되었다.

콰르르르릉.

마나가 폭발했다.

동시에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헥토르의 병사들은 이번만큼은 로만을 쓰러트렸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천마검법 제 이초식.’

숨을 한번 들이켰다.

내부에서 마나가 들끓더니, 마주 달려오는 적들을 향해 오라를 뿜어냈다.

천마의 일격.

승리를 장담하던 헥토르의 기사들은,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그대로 소멸(消滅)했다.

콰콰콰쾅!

충격적일 정도의 위력이었다.

기사들이 발현한 오라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단숨에 흩어졌고,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의 강력한 육체는 종이가 찢겨 나가는 것처럼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넋을 잃었다.

그제야 그들은 본인들이 상대하는 존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괴물임을 알았다.

수백의 적을 보고도 달려든 것은, 그래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백중혁의 삶에 수백 대 일의 싸움은 흔했다.

이따위 잔챙이들이 아니라, 무림 고수라고 불리는 이들과의 싸움에서도 항상 수적으로 불리했었다.

스티븐의 조언을 받았던 건.

불필요하게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거리 안에 지휘관이 있음을 확인했기에, 로만은 자신의 방식으로 전투를 끝내고자 했다.

타닥.

땅을 박찼다.

어느새.

눈앞에 맥클리어리 남작이 있었다.

그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로만을 보았다.

수십의 병사를 도륙하고, 헥토르의 오라 검사들을 일격에 찢어발겼다.

카이로를 기습적으로 공격한 헥토르의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는 부분이었고,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은 계산한다고 할지라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머릿속은 당장 도망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순간 헥토르 왕국을 떠나기 전에 들었던 명령이 떠올랐다.

‘무리하게 방어선을 함락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씨발.”

겨우 1시간.

무리한 공격은 변수를 낳았다.

맥클리어리 남작이 검을 뽑았다.

그 또한 검사다.

2성의 오라를 사용할 줄 아는 검사로서, 작전에 실패한 패장으로 남을 바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나는 헥토르의 맥클리어리 남작이다! 내가 직접 너를…….”

번뜩.

푸확!

한 번의 번뜩임.

로만이 도착하는 그 순간, 맥클리어리 남작의 목이 날아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의 판단은 오만이었다.

헥토르의 기사들이 단 일격을 버티지 못했을 때부터, 그는 일단 도망치는 판단을 했어야만 했다.

지휘관의 죽음.

로만이 그 머리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마나를 실은 목소리로 외쳤다.

“적장을 죽였다!”

그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전장에 있는 이가 모두 행동을 멈추었다.

* * *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헥토르의 병사들.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휘관이 죽었다고 해서 곧바로 항복하기에는, 그들은 아직 충분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그 정적을 부숴 버린 것은, 이번에도 로만 드미트리였다.

서걱!

“크악.”

로만이 눈앞의 적을 베어 버렸다.

상식을 벗어난 판단이었다.

보통은 적의 지휘관을 죽였으면, 그것을 빌미로 병사들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선택이었다.

상대가 바르코 가문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로만은 전쟁의 원흉인 바르코 부자를 죽이고 상황을 마무리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헥토르.

그들은 예고도 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명분이 없는 전쟁일 뿐만 아니라, 아직 다른 방어선들은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받는 상태였다.

로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은 들어라! 우리는 포로를 확보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 다른 방어선들 또한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받고 있다. 이들을 지금 살려 둔다면. 분명히 적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적들을 처형하라!”

바르코와의 전쟁은.

큰 의미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왕국에서의 다툼이기에, 지휘관만 처리하면 패배를 시인한 병사들이 후에 위험 요소로 돌아올 일은 없다.

그러나.

헥토르의 병사들은 다르다.

맥클리어리 남작이 죽었다 해도.

그들은 헥토르의 소속으로서 끝까지 싸울 의무가 있다.

고로.

애초에 항복을 권유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들에게 팔이 뜯기고 피를 흘릴지라도, 기세를 잡은 지금 확실히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서로 반대편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잔인해질 이유로는 충분했다.

일방적으로 적들을 도륙하는 로만의 모습에, 카이로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성 밖으로 쏟아졌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라!”

“헥토르의 잔당들을 모조리 죽여라!”

퇴로를 막았다.

궁지에 몰린 헥토르의 병사들.

그들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 * *

헨리 앨버트.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뒤였다.

분명히 제5 방어선이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달랐다.

“……이, 이게 무슨.”

성 밖에서.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성의 이점을 살려야 할 카이로의 병사들이,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악에 받친 얼굴로 적을 공격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이 도드라진다는 것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 정도로 강하다니.’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궁지에 몰린 헥토르의 병사들이 발악하며 달려들었지만, 로만을 상대하는 순간 여지없이 사지가 찢겨 나갔다.

숫자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얼마가 달려들든, 죽음이라는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예전에.

헨리는 랭커의 싸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랭커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었는데, 기억 속에 미화된 존재조차도 로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신성.

겨우 25살의 나이에 헨리는 분명 소문보다 약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소문이 오히려 과소평가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로만의 병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크리스와 케빈, 푸키와 같은 인물들은, 일개 병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보였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소식과는 다른 상황.

변수는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다.

‘……외삼촌이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와 친해지라고 한 이유를 알겠어.’

침을 꼴깍 삼켰다.

외삼촌의 말이 옳았다.

태생은 중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언제고 카이로 왕국을 집어삼킬 괴물이었다.

헨리는, 아직 얼을 타고 있는 병사들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를 도와라! 다른 떨거지들은 버리고, 로만을 최우선으로 지켜야 한다!”

명령을 내리는 헨리.

그 와중에도, 그는 가장 뒤에서 병사들을 따라갔다.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헥토르의 병사들은 끝까지 싸우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전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등을 맡기던 동료들을 버리고 뿔뿔이 도망쳤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은 죽었다.

로만은 끝까지 따라가 적의 숨통을 끊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도망치는 적들을 모두 죽일 방법은 없었다.

전투가 끝나자.

크리스는, 곧바로 로만에게 달려왔다.

“크리스 외 30명. 사망자는 없습니다.”

격렬했던 전투.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무사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들 기본적으로 상처가 하나씩은 있었고, 조금 심한 사람들은 찢겨 나간 피부 사이로 시뻘건 속살이 보였다.

그런 상처에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특히 헨더슨은 이런 대규모의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을 텐데도, 식은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고생했다. 상처는 포션을 사용해 치료하도록.”

“알겠습니다.”

특별한 치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근처에 있던 스티븐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에게 전부 포션을 보급했다고?!’

포션(potion).

마탑에서 제작하는 치료용 물약은, 가장 최하등급도 상당한 액수를 자랑한다.

그런데.

로만의 병사들은 고가의 포션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

한눈에 보아도 중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 것이었는데, 한 통 전부를 상처에 들이부었다.

치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며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빠르게 아물어 가는 상처.

스티븐은, 병사들이 왜 로만 드미트리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압도적인 무력과 과감한 판단, 그리고 병사들에게 인색하지 않은 마음씨까지. 로만 드미트리와 병사들의 신뢰는 그냥 형성된 것이 아니야. 이런 사람이니깐, 불구덩이에 뛰어든다고 할지라도 믿고 따르는 것이겠지.’

감탄은 짧았다.

로만이, 스티븐에게 말했다.

“너는 이곳에서 전장을 수습하고 2차 공격을 대비하라. 그리고, 남부 전선 지리에 해박한 병사가 필요하다.”

“……설마 곧바로 떠나실 생각입니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평화를 찾은 이 시간에도, 다른 곳에서는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한 번의 승리는.

전쟁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로만이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나는 헥토르 왕국이 이 땅을 짓밟는 것을 넋 놓고 구경만 할 생각이 없다. 국경을 넘어온 헥토르 왕국의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그 말에.

스티븐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명백히 카이로가 불리한 싸움이었다.

헥토르 왕궁의 공격은 기습적이었고, 수성의 이점은 사라진 상태지 않은가.

하지만.

왠지 눈앞의 이 사내라면, 정말 큰 일을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이 병사들에게 외쳤다.

“지금부터 10분을 주겠다. 길을 떠날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예.”

명령을 따르는 로만의 병사들.

전쟁 발발 2시간.

제5 방어선은 수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헥토르 왕국이 예상하지 못한 첫 번째 변수이자, 또 다른 변수의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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