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헥토르의 별 (1)
카이로와 헥토르의 국경(國境).
그 근방에, 일단의 무리가 진영을 구축했다.
외부에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 거점이었고, 그 수는 얼추 보아도 수백은 거뜬히 넘는 인원이었다.
“방금 남부 훈련소를 통과하고 후방 진지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작전이 통한 것 같습니다. 카이로 왕국은 지금, 방어선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고 우리의 전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보고였다.
담담한 얼굴로 보고를 받는 사내.
에드윈 헥토르는, 책상에 펼쳐진 지도를 살피며 말했다.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르다. 카이로의 방어 진지를 공격하고 있는 지휘관들에게, 적당히 상대가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시간을 끌라고 전해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성벽을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다. 계획이 성공하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남부 전선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
이번 작전.
보안이 생명이었다.
그렇기에 무려 1년에 걸쳐 남부 전선의 경계 패턴을 파악했고,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잭슨이 이끄는 레인저 부대를 남부 전선에 침투시켰다.
가파른 산맥을 타고 올라가는 매우 위험한 동선이었지만, 오늘 새벽에 잭슨은 예정대로 지정된 위치에 도착해서 몸을 숨겼다는 보고를 보냈다.
작전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카이로 왕국은 기습적인 공격만으로도 당황했겠지만, 진짜 의도는 그 안에 숨겨 두었다.
‘남부 전선의 전력은 매우 부실하다. 만약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면, 적어도 4시간 안에는 남부 전선의 방어선들을 모두 무너트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남부 전선을 완벽하게 점령했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워프 게이트(Warp Gate)의 존재다. 그곳을 통해 카이로의 본대가 남부 전선으로 넘어온다면, 우리는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카이로 왕국.
그들이 아무리 방심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워프 게이트는 마법의 결정체다.
머나먼 거리를 단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고, 워프 게이트의 등장에 전쟁의 방식이 변했다.
남부에 있던 병력을 서부로.
서부에 있던 병력을 남부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워프 게이트는 찰나의 시간에 가능케 만들었다.
그래서 전장에서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거론되었다.
적들의 지원 병력을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만약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워프 게이트를 점령했을 때는 그것을 공격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일명 커넥트(connect). 워프 게이트의 좌표를 재설정해서 역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고, 그로 인해 워프 게이트에는 보통 폭발 장치가 설치되었다.
카이로의 후방 진지.
그곳엔 워프 게이트가 있었다.
로만이 열흘 만에 남부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였고, 카이로 왕국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후방에 워프 게이트를 두었다.
적들에게 공격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최전방 방어 진지들이 제 역할을 하는 동안 아군을 불러들이거나 파괴를 선택할 수 있으니, 안전한 위치라 믿었다.
그게 바로.
에드윈 헥토르의 노림수였다.
‘카이로 왕국은 지금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 애초에 우리가 공격하리라는 사실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눈에 보이는 공격으로 인해 정신이 없겠지.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잭슨의 레인저 부대가 비밀리에 후방 진지에 침투해서 워프 게이트를 점령한다면. 우리는 단번에 남부 전선을 집어삼킬 수가 있다.’
성공만 한다면.
패배는 없는 전략이었다.
워프 게이트의 부재로 카이로 왕국은 남부 전선에 병력을 빠르게 보낼 수 없을 테고, 그사이에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하면 방어 진지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매우 쉬운 문제였다.
남부 전선을 손아귀에 넣는 순간, 헥토르 왕국은 주도권을 얻는다.
비밀 거점의 지하.
일 년간 공들여 설치한 워프 게이트가 있었다.
잭슨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보내오는 순간, 이곳에 있는 병력은 전부 후방 진지로 이동될 것이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만약에라도 작전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워프 게이트를 파괴할 준비를 해 두어라. 잭슨의 작전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워프 게이트를 파괴하고 두 번째 작전에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잔인할 정도로 이성적인 판단.
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헥토르의 별이라 불리는 사내. 에드윈 헥토르로 인해, 헥토르 왕국은 다시 부흥할 것이다.’
그건 확신이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은, 헥토르 왕국의 축복이었다.
* * *
맥버니는 금방 일어났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지, 포션의 회복 효과가 돌자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크윽.”
전신에서 통증이 일어났다.
속이 역했다.
포션은 상처 부위를 빠르게 회복해 주었지만, 그렇다고 후유증까지 완벽하게 막아 주는 건 아니다.
복부를 살펴보니 찢겨 나간 피부가 정교하게 이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기절한 사이에 누군가가 치료해 준 것으로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크리스였다.
그 모습에 문득.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순간, 크리스가 모시는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분이 어떻게 남부 훈련소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거지?’
의문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제5 방어선 예비 부대에 배정되었다.
남부 훈련소가 공격받기 전만 하더라도 분명히 5개의 방어선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상식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는 이곳이 아니라 제5 방어선을 도와야 하는 의무가 있다.
혹시 위험하다는 판단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전장에서는 항상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본성이 드러나는 곳이 아니던가.
맥버니는 솔직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그를 놀라게 했다.
“헥토르 왕국이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곧바로 제5 방어선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얘기는 짧았다.
걱정과는 다른 내용.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적들을 물리쳤다는 말에, 맥버니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진심이었다.
헥토르의 기습적인 공격.
대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을 텐데,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이상적인 판단을 내려서 적을 물리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 과정에서 보여 준 결단력과 무력.
직접 현장을 지켜보지 않아도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역시.’
유일하게 전쟁을 대비하던 인물.
로만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와 같은 사람이 남부 전선에 있다는 사실이, 맥버니로서는 심적으로 큰 위안이 되었다.
대화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로만.
그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 * *
로만은 맥버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곧바로 본론을 물었다.
“남부 훈련소에서 벌어진 일을 상세히 설명하거라.”
“알겠습니다.”
기억을 더듬었다.
몸 상태는 처참했지만, 당시의 일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시간 전쯤입니다. 평소와 같이 다음 기수의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기습적으로 나타나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빠르게 병력을 소집해서 적들에게 대항해 보았지만, 전력의 차이가 심해서 버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고, 남부 훈련소의 지휘관이신 베일 자작님의 생사는 저희로서도 알지 못합니다.”
2시간.
중요한 포인트였다.
그렇게나 빨리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적들이 미리 남부 전선에 침투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적들의 복장 중 특이 사항은 있었나?”
“다들 가벼운 무장을 착용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적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인물의 얼굴에 상처가 가득했습니다.”
“상처가 가득했다고?”
“예.”
가벼운 무장.
상처가 가득한 얼굴.
특정되는 인물이 있었다.
로만은 남부 전선을 조사하면서, 헥토르 왕국의 주요 인물들도 확인해 두었다.
“레인저 부대일 수도 있겠군.”
“……아!”
맥버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어 본 것 같았다.
헥토르 왕국의 레인저 부대.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수많은 전쟁에서 얻은 얼굴의 상처를 훈장처럼 여긴다고 했다.
자신도 잘 떠오르지 않는 묵은 지식이었는데, 로만이 바로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문이 해소되질 않았다.
맥버니가 물었다.
“레인저 부대라면 미리 남부 전선에 침투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그들이 남부 훈련소를 공격한 이유가 이해되질 않습니다.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면. 그 이점을 활용해 최전방 방어선을 빠르게 무너트리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반대로 이동했습니다. 전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부 훈련소를 공격했습니다.”
“네 말대로다.”
“그게 무슨…….”
“후방 진지로 가는 길목에 남부 훈련소가 있기에, 너희들은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는 맥버니.
그에게, 로만은 진실을 말해 주었다.
“헥토르 왕국은 지금 연막작전을 사용하고 있다. 최전방 방어선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눈속임일 뿐. 그들의 진짜 목적은 바로 후방 진지에 있는 워프 게이트다.”
그건.
너무나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 * *
처음 남부 훈련소의 병사를 만났을 때.
로만은 생각했다.
‘적들이 남부 훈련소를 공격했다는 것은 진짜 목적지가 최전방 방어선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목적지는 후방 진지밖에 없다. 대체 무슨 목적이지? 자칫 잘못했다간 앞뒤로 둘러싸일 수도 있을 텐데.’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연막작전을 하면서까지 공격하는 이유가 후방 진지에 있다면.
그것은 혹시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워프 게이트이지 않을까?
그때만 해도 가설에 불과했다.
그리고.
헥토르의 병사들을 고문하며 확신을 얻었다.
‘헥토르 왕국은 이번 전쟁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다. 성공만 한다면 반드시 승리하는 필승 전략.
그것은 후방에 있는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것밖에 없다.
만약 그 작전이 성공한다면 헥토르 왕국은 카이로의 지원 병력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워프 게이트.
새로운 세상에 대해 알아 가며 가장 놀랐던 부분이다.
공간을 생략하는 마법의 결정체는, 로만에게 마법이라는 문물이 무공만큼이나 대단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에드윈 헥토르.
그의 전략은 예상치 못한 존재에게 발각되었다.
맥버니가 벌떡 일어났다.
극심한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전략이라면 지금 당장 후방 진지를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아니.”
로만이 고개를 저었다.
맥버니는 말했다.
레인저 부대의 공격 시기.
지금으로부터 2시간 전이라고.
그렇다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헥토르 왕국의 레인저 부대가 남부 훈련소를 공격하고 떠난 시간이 1시간 30분 전. 그 정도라면 이미 그들의 작전을 실행에 옮기고도 남을 시간이다. 맥버니. 너는 후방 진지로부터 적들이 공격했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나?”
“……설마.”
“그래.”
진실을 알고도.
로만은 서두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저들은 오랜 시간 우리와의 전쟁을 준비했고, 지금쯤 워프 게이트를 점령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곧 후방에도 적들이 나타나면 우리를 포함한 남부 전선의 병력은 완전히 고립되어 버릴 터. 우리는 왕국의 도움 없이, 이곳에서 헥토르 왕국과 싸워 살아남아야만 한다.”
예상대로였다.
그 시각.
헥토르의 레인저 부대는,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