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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615)

88화 헥토르의 별 (2)

1년 전.

레인저 부대의 대장 잭슨은, 에드윈 헥토르와 대화를 나누었던 날을 기억했다.

“잭슨. 헥토르 왕국은 더는 버틸 힘이 없다. 골든 뱅크의 이자 압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서, 내년에도 흉작(凶作)이 반복된다면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겠지. 그래서 너에게 한 가지를 제안하려고 한다. 나와 같이, 카이로 왕국의 남부 전선을 점령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당돌한 제안이었다.

헥토르의 별.

세간의 소문처럼 에드윈 헥토르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카이로 왕국을 공격하는 일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언급했다.

그의 말투와 행동.

고개를 끄덕이면 바로 카이로 왕국이 수중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만 해도 당연히 거절했다.

카이로가 헥토르와 같은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전쟁 국가를 아무런 출혈 없이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했다.

2시간.

잭슨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미리 구상한 계획을 들으니, 아무런 근거 없이 말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진짜 가능할지도 몰랐다.

헥토르는 계속되는 흉작에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작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이라도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로 에드윈 헥토르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헥토르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그는, 운명처럼 난세에 탄생한 영웅이 분명했다.

그렇게 1년.

착실하게 계획을 진행했다.

첩자를 심어 후방 진지에 땅굴을 팠고, 잭슨의 레인저 부대는 비밀스럽게 침투하는 것에 성공했다.

에드윈 헥토르는 말했었다.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다. 일 년간 48번의 정찰. 카이로 왕국은 단 한 번도 우리가 남부 전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그들이. 우리의 연막작전의 의도를 뚫고 워프 게이트를 지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방심하지 않는 태도다. 계획대로 차근히. 남부 훈련소의 통신 장치를 끊어 버리고 땅굴을 통해 후방 진지로 진입하면, 남부 전선의 워프 게이트는 우리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잭슨은 워프 게이트를 눈앞에 두었다.

푹!

“커억!”

워프 게이트를 지키는 병사를 순식간에 암살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암살에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고, 잭슨은 시체를 치우지 않은 채로 곧바로 워프 게이트로 달려갔다.

지금부터는 시간의 싸움이었다.

커넥트를 성공하기 전에 적에게 발각된다면 모두 전멸을 당하겠지만, 반대로 성공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서둘러.”

기술자가 빠르게 작업을 시작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시간이었다.

만약 카이로 왕국이 경계를 똑바로 했다면.

이미 발각되어야 정상이건만, 그들은 최전방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결국.

화아아아악.

“……성공했다!”

워프 게이트가 밝게 빛났다.

이윽고.

세차게 일어나는 하얀 빛을 뚫고, 에드윈 헥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한 발 앞으로.

카이로의 땅을 밟았다.

에드윈 헥토르의 빨간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에, 레인저 부대의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을 뵙습니다.”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을 뵙습니다.”

목소리가 격정(激情)으로 들끓었다.

이번 작전.

레인저 부대의 병사들은 헥토르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섰다.

그만큼 뼈를 깎는 준비를 했고, 결국에는 모두가 바라던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것 같았다.

어떤 병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렸고, 또 어떤 병사들은 차오르는 자부심에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그러나.

에드윈 헥토르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앞으로 걸으며, 잭슨에게 말했다.

“상황은?”

“후방 진지의 병력 대부분은 최전방 방어선으로 출동한 상태입니다. 예상대로 카이로의 복잡한 지휘 체계로 인해 지원 병력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후방 진지를 완벽하게 점령하겠습니다.”

카이로 왕국.

그들의 4분화된 권력 체계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남부 전선이 공격을 당한 지 2시간이 넘도록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았고, 덕분에 헥토르 왕국은 무사히 워프 게이트를 점령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시간은 헥토르의 편이었다.

카이로로서는 지원 병력을 보낼 방법이 없을 테니,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켈란.”

“예.”

뒤따라오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너에게 1대대를 맡기겠다. 후방 진지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카이로 왕국이 지상으로 병력을 보낼 것을 대비해서 방어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해라. 우리는 남부 전선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낼지 예상할 수 없다. 일주일일 수도, 한 달일 수도, 길면 일 년일 수도 있다. 그러니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명을 받듭니다.”

켈란이 물러났다.

워프 게이트를 통해 속속들이 나타나는 병사 중 일부가, 켈란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잭슨.”

“말씀하십시오.”

“제5 방어선을 맡은 맥클리어리 남작과 연락이 끊겼다. 아는 바가 있나?”

“아직 정확한 사실을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전투 도중이라 연락을 받을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제5 방어선입니다. 카이로의 지휘관은 남부 전선에서도 제일 문제가 많기로 유명한 인물이니, 아무래도 일부의 병력만으로도 제5 방어선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공격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닌가?”

“……맞습니다.”

“이번 작전이 끝나는 대로. 성과와 관계없이 맥클리어리 남작은 따로 처벌하도록 하겠다. 동의하나?”

“예, 동의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데 그런 그조차도.

맥클리어리 남작이 패배했으리라는 변수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5 방어선은 남부 전선에서도 최약체였고, 수많은 계산에서도 그곳에서는 변수가 발생하지 않았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지금부터 1대대를 제외한 전원은 남부 전선에 고립된 카이로의 잔당들을 처리할 것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남부 전선에 헥토르의 깃발을 꽂을 때까지, 조금도 방심하지 마라.”

“명을 받듭니다!”

그때만 해도.

헥토르 왕국은 변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하나도 아닌, 무려 두 개의 변수가 발생했다는 것을.

* * *

제1 방어선.

그곳은 다행히도 위기를 넘겼다.

카이로 왕국의 격렬한 반격에 적들은 한발 물러났고, 덕분에 숨을 돌릴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적들이 다시 공격하기 전에 빠르게 성벽을 보수하라! 우리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서둘러라!”

도날드 백작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성벽은 보수가 한창이었다.

적들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일부 성벽은 무너진 상태였고, 특히 성문은 거의 뚫리기 직전이었다.

헥토르 왕국이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계속 공격을 감행했다면, 둘 중 하나는 전멸을 당할 각오를 하고 싸워야 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도날드 백작은 한숨을 돌렸다.

그때였다.

병사가 다가와 말했다.

“지휘관님. 남부 훈련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연결해.”

걸음을 옮겼다.

지휘실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도날드 백작님. 저는 제5 방어선 예비 부대 소속인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화면 너머.

로만이 있었다.

로만이라는 이름에, 도날드 백작은 아는 체를 했다.

“카이로의 최연소 랭커가 무슨 일로 연락을 했지?”

[곧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헥토르 왕국이 연막작전을 써서, 후방 진지의 워프 게이트를 점령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남부 전선에 고립되었습니다. 앞뒤로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에게 완전히 고립되기 전에, 성을 버리고 산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뭐라고?!”

벌떡.

도날드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겨우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막았는데, 워프 게이트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니.

현기증이 일었다.

그건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렇기에 도날드 백작은 눈앞의 진실을 부정해 버렸다.

“후방 진지가 벌써 함락을 당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너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성을 버리지 말고 수성을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인지 않은가? 적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산에서는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나는, 제1 방어선에서 방어를 더욱 견고히 할 것이다.”

[단언컨대 더는 헥토르의 공격을 버틸 수 없습니다. 헥토르 왕국은 의도적으로 최전방 방어선을 함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힘이 없는 것이 아니고, 후방 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시선을 끌 미끼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도날드 백작님. 현실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정녕 그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이상한 점은 많았다.

헥토르 왕국은 분명히 유리한 상황이었는데도, 돌연 병력을 후퇴시키는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을 보였다.

하지만.

후방 진지의 지원 병력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산으로의 피신은 도망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안에 있다가는 고립될 테고, 적과의 전력 차이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산에서 게릴라(guerrilla) 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적들이 남부 전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을 수 없도록.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로만의 설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도날드 백작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후방 진지가 점령을 당했다는 것도 아직 믿을 수 없거니와, 성이 더 안전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가, 헥토르의 첩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알아서 판단하겠다. 연락은 이만 끊도록 하지.”

뚝.

일방적인 통보.

마법 통신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다른 방어선의 지휘관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후방 진지가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지만, 공통점은 성을 버려야 한다는 말에는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들의 상식에서는 성은 안전한 영역이었다.

성벽이 보호하는 곳에서 끝까지 농성하겠다는 것이, 그들이 생각한 최선의 선택지였다.

딱 한 명.

현재 제5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스티븐만이, 로만의 명령에 따랐다.

[곧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지휘관들의 거절.

황당한 상황이었다.

진실을 말해 주고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로만으로서는 그들의 반응을 예상했다.

‘애초에 전쟁에 해박하고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이었다면, 남부 전선이 이렇게 썩어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최전방 방어선들의 병력은 버린다. 그들을 억지로 데리고 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수많은 전쟁을 경험하며.

로만은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무지(無知)하면서도 권력을 가진 아군이라는 것을 말이다.

알면서도 연락을 돌린 이유는 명확했다.

자신은 카이로 왕국의 소속이고, 그들이 말을 듣는다면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의 도리를 했을 뿐.

여기까지였다.

로만은 억지로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깔끔하게 그들의 존재를 털어 버렸다.

로만이 병사들을 소집했다.

“짐을 챙겨라. 우리는 지금부터 산으로 갈 것이다.”

“예.”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지금부터는 힘들고 어려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전생에서는 이보다도 더한 상황이 많았고, 그때마다 승리했기에 결국 정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로만이 떠나고 1시간 뒤.

척척.

일단의 병력이 나타났다.

헥토르 왕국의 깃발을 펄럭이는 병사들.

그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

헥토르 왕국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제1 방어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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