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615)

89화 헥토르의 별 (3)

마법 통신을 끝낸 직후.

도날드 백작은 곧바로 후방 진지에 연락했다.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통신병의 보고에, 도날드 백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차례 시도한 마법 통신.

한 시간이 넘도록 연락을 받지 않는 상황이라면, 정말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문제가 생겼다고 봐야 했다.

철렁 내려앉는 가슴에 손이 벌벌 떨렸다.

워프 게이트가 점령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로써 남부 전선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왕국에서 남부 전선과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워프 게이트를 통해 지원 병력을 보낸다고 할지라도, 그건 최소 보름 이상은 걸리는 거리다.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남부 전선의 완벽한 패배고, 지금부터는 인내심이 필요한 생존의 문제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가는 척박한 산에서 말라죽을 확률이 높았다.

가파르고 험한 산세는 도주로로 적합하지 않았고, 로만이 말한 게릴라 작전은 더더욱 힘들었다.

물론 성에 남는 판단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앞뒤로 고립되어 버린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성벽의 보호를 받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최초의 안일한 대응으로 문책을 당할 확률이 높다. 그런데 성마저 버리고 도망친다면, 분명히 전쟁이 끝나고 큰 처벌을 받게 되겠지. 전쟁이 끝난 미래를 위해서. 나는 성에서 결사의 항전을 할 것이다.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틴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은 충분히 있다.’

사실.

그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도날드 백작은 헥토르 왕국이 국경을 넘어서는 모습을 확인하고도, 곧바로 왕국에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

그게 지금의 결과를 낳았다.

조금이라도 일찍 대응했다면 카이로 왕국은 다른 상황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데, 최초의 대응부터 상황을 완전히 악화시켜 버렸다.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

수많은 병사가 현장에서 목격했기에, 도날드 백작은 자신의 실책이 보고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면죄부를 받을 명분이 필요했다.

끝까지 전장에 남아 투쟁한 지휘관.

괜찮은 명분이지 않은가.

적절하게 자신의 몸을 보호하면서도, 겉으로는 용맹한 지휘관으로 남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남부 전선의 산세가 얼마나 험한지도 모르고 게릴라 작전을 운운했겠지. 그의 판단은 일말의 승산도 없는 쓰레기다. 남부 전선에 배정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수년을 제1 방어선의 지휘관으로 일한 나에게 충고랍시고 하는 말이 산으로 도망치는 것이라니. 이래서 병법서로만 터득한 지식이 무서운 법이지.’

자기합리화에 빠졌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최연소 랭커라 할지라도, 전장에서는 아직 경험이 미천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때는.

그렇게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 * *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겨우 4시간 뒤.

제1 방어선은 앞뒤로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로만의 말은 사실이었다.

워프 게이트는 점령을 당했고, 헥토르 왕국은 대담하게 ‘워프’를 통해 병력을 보낸 것으로 보였다.

“모두 공격 준비!”

“공격 준비!”

척척.

병사들이 화살을 먹였다.

피가 말리는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적들과 싸울 준비를 마쳤다.

성벽의 보수를 완벽하게 끝냈고, 처음과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수성 물자를 충분하게 확보해 두었다.

게다가 수성 병기도 수리한 상태.

발리스타(ballista)와 같은 병기의 장전을 완료한 병사들은, 이번만큼은 쉽게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도날드 백작이 외쳤다.

“제1 방어선의 병사들은 들어라! 헥토르 왕국이 워프 게이트를 점령했다. 이로써 우리는 남부 전선에 완전히 고립되었고, 앞으로 최소 보름은 카이로 왕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첫 번째 전투에서도 극악무도한 헥토르의 악마들을 물리쳤던 것처럼, 서로를 믿고 싸운다면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다. 나 도날드 백작을 믿어라.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우오오오오오!”

“도날드 백작님을 따라라!”

카이로의 병사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진실을 몰랐다.

도날드 백작의 말이 사실이라 믿었고, 정보가 제한적인 그들로서는 수성만이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금방 암담한 현실을 목격하고 말았다.

국경 너머로.

재차 몰려드는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은, 첫 번째 공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가 많았다.

“……이런 미친.”

“저게 대체 몇 명이야?”

최소 수천의 병력.

선제공격은 장난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빼곡하게 몰려드는 병력은 마치 개미 떼와 같았고, 겨우 수백이 전부인 카이로의 병사들로서는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끌고 오는 공성 병기의 모습을 확인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헉.”

“플레어다.”

공성전의 재앙.

플레어가 나타났다.

카이로로서는 그걸 막을 방법이 없다.

신식 수성 병기를 갖추질 못했고, 그 말인즉 플레어의 공격을 그냥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연설로 인한 용기는 금방 사그라졌다.

병사들은 생각했다.

끝났다고.

그리고 그들의 생각처럼, 플레어가 강렬한 불길을 뿜는 순간 제1 방어선의 재앙이 시작되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크악!”

“악!”

불길이 일었다.

힘겹게 보수한 성벽이 단번에 무너졌고, 타오르는 성벽에 불길이 붙은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아직 제대로 된 공격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멀리서 플레어를 발사했을 뿐인데, 벌써 제1 방어선은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

도날드 백작은 넋을 잃었다.

연설할 때만 하더라도 대단한 영웅이 된 것만 같았는데, 이제야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깨달았다.

[단언컨대 더는 헥토르의 공격을 버틸 수 없습니다. 헥토르 왕국은 의도적으로 최전방 방어선을 함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힘이 없는 것이 아니고, 후방 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시선을 끌 미끼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도날드 백작님. 현실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정녕 그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로만의 말.

그건 진실이었다.

헥토르는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남부 전선 따위는 언제든 함락시킬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후회는 늦었다.

콰르르르르릉.

완전히 무너지는 성벽.

그리고.

“공격하라!”

“돌격!”

와아아아아아!

앞뒤로 적군이 밀려들었다.

도날드 백작은 아득해지는 정신에,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지휘관의 멍청한 판단에.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성벽과 성문은 시작부터 제 기능을 상실해 버렸고,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앞뒤로 거세게 밀려들었다.

결국.

“지휘관의 목을 베었다!”

황급히 도망치던 도날드 백작의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그로서는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의 병력이 후방 길목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고, 비를 홀딱 맞은 쥐새끼처럼 벌벌 떨던 도날드 백작은 구차할 정도로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다.

상황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대단한 전쟁이라도 할 것 같았던 제1 방어선의 병력은, 겨우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닥을 보였다.

완벽한 승리.

활짝 개방된 문으로 들어선 에드윈 헥토르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잭슨의 보고를 받았다.

“플레어로 기선을 제압한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성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다른 지휘관들도 남부 전선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도 제1 방어선과 같이 플레어에 대한 대응이 미흡할 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 전선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살짝 격양되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작전.

그것을 완벽하게 현실로 만들어 냈다.

역사적인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에, 잭슨으로서는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일단 제1 방어선을 확실하게 점령하는 것에 집중한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괜한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투항하는 병사들을 모두 포박하여 한곳에 가두어라. 상황에 따라 그들을 인질로 사용하거나,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카이로와의 대화를 위해서는 많은 무기가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에드윈 헥토르는 철저했다.

엄청난 승리에도.

방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을 조금 놓아도 되는데, 이상하게 에드윈 헥토르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계획은 완벽하다. 대체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그는 몰랐다.

자잘한 시그널들.

남부 훈련소에 남은 병사들이 복귀하지 않았고.

맥클리어리 남작의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사실 등이, 그의 예민한 감각을 자꾸만 자극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기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에드윈 헥토르에게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맥클리어리 남작이 죽었습니다. 그간 통신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전장에서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에.

에드윈 헥토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 * *

진실을 알려 온 대상은 패잔병(敗殘兵)이었다.

가까스로 전장에서 도망친 병사가 본대에 합류했고, 그는 곧 에드윈 헥토르 앞으로 불려 갔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라.”

싸늘한 말에.

병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처음에만 해도 헥토르 왕국이 유리한 싸움이었습니다. 제5 방어선은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되지 않았고, 플레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성문을 뚫었습니다. 맥클리어리 남작님은 병사들에게 성을 함락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괴물?”

“예. 그건 분명히 괴물이었습니다.”

순간.

당시의 기억에 병사는 몸을 벌벌 떨었다.

괴물과의 거리가 멀어서 살아남았을 뿐, 괴물이 헥토르의 병사들을 도륙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괴물의 무력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단 한 명이. 홀로 수많은 아군을 도륙해 버렸습니다. 수십의 병사가 눈을 몇 번 깜빡이면 사라져 버렸고, 헥토르의 오라 검사들도 그의 일격을 받아 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제5 방어선이 특별히 대단한 수성 능력을 보여 주었던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존재로 인해. 맥클리어리 남작님의 목이 날아가는 순간, 저희는 살기 위해서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괴물.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문득, 에드윈 헥토르는 한 이름이 떠올랐다.

‘카이로의 최연소 랭커. 그가 남부 전선으로 배정된다고 했었지.’

그 소식을 들을 때만 하더라도.

에드윈 헥토르는 일개 개인이 전장의 양상을 뒤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3성의 검사였고, 아직 압도적인 존재감을 표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이 변수의 시작이었다.

일 년간의 준비.

남부 전선을 해부하듯 완벽하게 조사했다.

문제는 로만 드미트리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존재라는 것이고, 일 년간의 조사로는 알 수 없는 변수였다.

‘변수가 생겼다.’

맥클리어리 남작이 죽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처리하지 못한 병력이 남부 전선을 활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대기하고 있던 병력이 제5 방어선을 확인한 결과, 그곳에는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산으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그들을 잡아 오라 명하신다면, 추격대를 만들어 카이로의 괴물을 눈앞에 대령하겠습니다.”

잭슨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 보고했다.

입맛이 썼다.

완벽한 계획에 구멍이 뚫렸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제5 방어선의 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는 대세에 영향을 미칠 수도, 그들끼리 무언가를 해낼 수도 없다. 우리는 작전대로 진행한다. 일단 다섯 개의 방어선을 모두 손아귀에 넣은 뒤에, 우리는 남부 전선을 카이로가 침범할 수 없는 요새(要塞)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계획의 핵심이었다.

남부 전선을 완전히 점령한다면, 그때부터는 카이로 왕국을 상대로 대화를 주도할 수가 있다.

에드윈 헥토르의 결단은 빨랐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헥토르 왕국은 남부 전선을 점령했다.

그리고는.

에드윈 헥토르가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는 카이로 왕국과 협상을 할 차례다. 카이로 왕실에 마법 통신을 연결하라.”

헥토르의 진짜 목적.

남부 전선의 절망적인 현실이, 카이로 왕실에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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