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헥토르의 별 (4)
처음 헥토르의 공격 소식이 전달되었을 때.
카이로 왕실이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젊은 왕.
다니엘 카이로는, 텅텅 비어 있는 회의실을 바라보며 참담한 표정을 보였다.
“대체 다들 언제쯤 도착한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워낙 갑작스러운 소식에 다들 멀리서 오느라고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하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뿐.
다시 한번 연락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모시는 주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 정부에서 괜히 입을 한번 잘못 놀렸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니엘 카이로의 권력은 하인의 목숨을 지켜 줄 수 없다.
만약 왕권(王權)이 강력했다면, 애초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아.”
다니엘 카이로가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남부 전선이 공격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소식.
빠르게 대응해도 모자랄 판에,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모두가 모일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라고 말했다.
그 말인즉.
왕에게는 결단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베네딕트 후작, 덴버 백작, 그레고리 백작.
막강한 권력을 지닌 그들의 동의가 있어야만, 나라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
그동안 헥토르 왕국의 레인저 부대는 남부 훈련소를 지나 후방 진지에 침투했고, 빠르게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런데도 카이로 왕실은 현실을 까맣게 몰랐다.
다니엘 카이로는 중앙 정부의 권력자들을 기다릴 뿐이었고, 뒤늦게야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오는 길에 마차가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헥토르 왕국이 남부 전선을 공격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베네딕트 후작.
그는 늦게 온 것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다른 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덴버 백작과 그레고리 백작은, 다니엘 카이로가 홀로 기다린 시간을 외면하며 말했다.
“남부 전선에서 보낸 연락에 의하면, 헥토르 왕국이 기습적으로 국경을 넘어서 방어 진지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어떤 명분을 가졌는지는 모르나, 이대로라면 남부 전선이 위험합니다.”
“그럼 바로 병력을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드디어.
지원을 보내자는 말이 언급되었다.
다니엘 카이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만약 귀족들이 빠르게 회의에 참석했다면.
최소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라도 있었다면, 1시간 전에는 지원 병력을 남부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카이로의 현실인 것을.
다니엘 카이로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남부 전선으로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결정이 내려졌다.
중앙 정부의 회의 끝에 나라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약소국인 카이로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남부 전선의 워프 게이트가 점령을 당했다.
그제야, 베네딕트 후작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았다.
“……워프 게이트를 점령당했다니.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남부 전선으로 빠르게 병력을 보낼 방법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남부 전선이 헥토르 왕국의 공격을 버텨 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번 공격으로.
카이로가 위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남부 전선은 다소 척박한 지역이다.
카이로 왕국에서 지리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남부를 넘어서 공격해 오는 헥토르의 병력은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남부에서 적들이 버틸 경우였다.
만약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워프 게이트를 점령당한 것은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4분화 된 지휘 체계가 문제를 악화시켰다.
조금만 빠르게 대응했더라면, 카이로 왕국은 이토록 허무하게 남부 전선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 카이로가 말했다.
“이 결과를 대체 어떻게 감당할 작정입니까? 남부 전선의 위기를 알렸을 때. 최소한 왕으로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양보했다면, 남부 전선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었습니다. 다들 반성하십시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당신들의 책임입니다!”
유약한 왕.
그로서도 이번 일은 참아넘길 수가 없었다.
얼굴을 붉히며 분노하는 그의 모습에도, 다른 귀족들은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쯤이었다.
에드윈 헥토르.
그가, 카이로 왕실에 연락을 취했다.
* * *
마법 통신이 연결되자.
다니엘 카이로를 대신해, 베네딕트 후작이 따져 물었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헥토르가 카이로를 공격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카이로와 헥토르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서로의 국경을 넘어서 위협을 가하는 일은 없었고, 최근에는 헥토르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식량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공격적인 목소리였다.
화면 안.
에드윈 헥토르는, 카이로의 분노를 마주하고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참으로 뻔뻔하시군요. 선을 넘은 것은 우리가 아니라 카이로입니다.]
지금의 상황.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연습했다.
카이로 왕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고, 그렇기에 에드윈 헥토르는 완벽한 대답을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에,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이 국경을 넘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잃어서 국경을 넘었다고 해명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가방에서 헥토르의 지리와 주요 건물의 위치를 파악한 지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포박하고 제압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의도가 들켰다는 생각에 도망치다가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카이로 왕국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왜, 헥토르의 국경을 탐색한 걸까. 불순한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진실과는 달랐다.
카이로의 병사들은 애초에 절벽에 떨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단순한 사고인 것으로 보였으나, 에드윈 헥토르는 그것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을 밑바탕으로 삼았다.
사실 명분 자체는 부실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전쟁이란.
승자의 논리가 적용되는 싸움이다.
이로 인해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헥토르 왕국에 중요한 것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카이로를 모함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반발이 격렬했다.
그런데도.
에드윈 헥토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카이로와 헥토르 사이에 불신이 생겼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죄를 묻고자 남부 전선을 공격했습니다. 워프 게이트가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헥토르 왕국은 남부 전선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요구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그날의 일을 사죄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십시오. 우리의 요구를 충실하게 따라 준다면, 그간의 관계를 생각해서 병력을 물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헥토르의 진짜 목적이었다.
계속되는 흉작.
국고는 말라 갔고, 골든 뱅크에 빌린 이자는 밀렸다.
다른 곳에서 돈을 빌리는 것은 문제를 가중할 뿐이기에, 에드윈 헥토르는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전쟁.
그 보상으로 금전을 바라는 건 이상하지 않은 요구였다.
남부 전선은 척박하지만 카이로에게 필요한 땅이었고, 그걸 담보로 헥토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런 날강도 같은!”
“그게 말이 되는 요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이로의 귀족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그뿐.
에드윈 헥토르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타협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남부 전선을 공격하는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에 울부짖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그는 악마가 되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딱 3일을 드리겠습니다.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십시오. 만약 우리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남부 전선을 헥토르의 영토로 병합할 준비를 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어쭙잖은 타협으로 시간을 끌려는 수작을 보인다면, 남부 전선의 인질들은 살아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툭.
에드윈 헥토르는 일방적으로 마법 통신을 끊어 버렸다.
* * *
격렬했던 마법 통신이 끝나고.
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드윈 헥토르의 일방적인 통보에, 기세등등하던 베네딕트 후작도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니엘 카이로가 참담한 얼굴로 현실을 말했다.
“워프 게이트가 적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상, 우리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제일 가까운 지역으로 병력을 보낸다고 할지라도 남부 전선까지는 최소 보름이 걸립니다. 헥토르 왕국은 그동안 수비할 준비를 모두 끝냈을 테고, 지루한 전쟁은 승패와는 관계없이 카이로를 나락으로 빠트리겠지요. 그나마 헥토르 왕국이 대놓고 요구하는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 손해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분명 거액을 요구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대책을 말해 주십시오!”
다들 말을 삼켰다.
참으로 웃겼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
이 작은 나라에서는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들이, 막상 진짜 위기가 닥치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현실은 같잖은 권력을 나누자고 싸우는 것이었다.
그나마 베네딕트 후작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욕이라도 보였지만, 덴버 백작과 그레고리 백작은 달랐다.
그들은 타국을 따랐다.
카이로의 운명이, 본인들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평소에는 다니엘 카이로를 허수아비 취급을 하면서, 막상 곤란한 일에는 왕을 앞으로 내세웠다.
“……헥토르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반대합니다.”
그때였다.
방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인물.
덴버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대책이 있다는 말입니까?”
“일단 헥토르 왕국이 금전을 요구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나라에 닥친 어려움을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는 의도일 테고, 그 액수는 카이로의 기반을 흔들 정도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일은 남부 전선을 되찾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후의 상황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국고가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크로노스 제국이 국경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남부 전선을 되찾은 대가로 더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순간.
시선이 집중되었다.
발할라파의 수장.
덴버 백작은, 이 자리에 모인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특별한 정보를 알았다.
‘이들은 지금 남부 전선에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요소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있다.
단 하나의 방법이.
덴버 백작이 말했다.
“남부 전선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습니다. 방금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제5 방어선의 수성에 성공하고 병력을 규합하여 헥토르 왕국에 대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저들은 모른다.
로만 드미트리의 진짜 실력을.
4성에 오른 재능과 바르코를 무너트린 그의 저력이라면, 결코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남부 전선으로 병력을 보내고, 로만 드미트리가 그 안에서 균열을 만들어 낸다면 우리에게 충분한 승산이 있습니다.”
단 하나의 변수.
덴버 백작은, 로만에게 배팅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