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귀영(鬼影) (1)
회의실에 침묵이 맴돌았다.
덴버 백작의 발언.
상식을 벗어났다.
다니엘 카이로는,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단한 검사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겨우 20대의 나이에, 호메로스를 쓰러트리고 3성 검사임을 증명한 것은 카이로 왕국의 축복이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잘 알지 않습니까. 로만 드미트리 정도로는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카이로의 네 파벌.
그들이 로만을 원하는 이유는 미래의 가치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3성을 이루었기에 너도나도 로만을 영입하고자 달려드는 것이지, 단순히 현재의 무력을 비교하자면 그보다 강한 사람은 많다.
그 말인즉.
헥토르 왕국을 상대로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겠다는 로만의 계획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젊은 피의 객기(客氣)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베네딕트 후작도 왕의 편을 들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의 미래입니다. 괜한 일에 자국의 인재를 잃는 것보다는, 현명한 판단으로 왕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어찌 되었든 남부 전선은 이미 헥토르 왕국에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시작부터 우리가 패배한 싸움입니다.”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게다가.
로만 드미트리는 베네딕트 후작이 영입을 희망하는 대상.
이렇게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남부 훈련소부터 충분한 밑밥을 깔아 두었으니, 국방의 의무만 해결하는 대로 영입할 생각이었다.
모두가 반대하는 작전이었다.
표면에 드러난 정보만으로는, 덴버 백작을 지지할 사람은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할까.’
덴버 백작이 웃음을 삼켰다.
랭킹을 관리하기에 선점할 수 있었던 정보다.
사실을 말한다면야 분위기를 반전시키겠지만, 덴버 백작으로서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카이로의 피가 흐를지라도.
그의 정신은 발할라에 있었다.
“모두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저도 괜한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3일이라는 시간이 있는데도 먼저 헥토르 왕국이 원하는 것을 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딱 3일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대비해서 병력을 움직이되, 3일 안으로 남부 전선에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헥토르 왕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절충안이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3일을 주었다.
충분히 생각하면서도, 절대 전세를 뒤집을 수 없는 시간.
덴버 백작은 그에 베팅을 걸었다.
이런 짧은 시간에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로만의 가치를 다시 한번 판단해야만 했다.
단순히 4성의 검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괴물로 말이다.
덴버 백작의 제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한참을 고민하던 다니엘 카이로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현 시간부로 카이로 왕국은, 헥토르 왕국과의 전쟁과 협상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할 뿐.
덴버 백작을 제외한 모두는, 워프 게이트를 점령당한 순간부터 끝난 싸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언컨대.
기적은 없을 것이다.
* * *
그 시각.
헨리 앨버트는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로만을 따라 길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헨리 앨버트의 가슴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잔뜩 차올랐다.
수많은 적을 도륙하던 로만과 함께라면, 왠지 어떠한 위험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시작부터 일이 틀어졌다.
저질 체력으로는 로만의 병력을 따라갈 수 없었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흔적을 찾아 겨우 남부 훈련소에 도착했을 때, 헨리 앨버트는 현실을 직면했다.
‘좆 됐다.’
눈앞의 광경은 처참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평화롭게 지내던 곳이 쑥대밭이 되었고, 익숙한 얼굴의 시체가 사방에 즐비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그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제1 방어선으로 후퇴한다.”
영웅 심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남부 훈련소를 쑥대밭으로 만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
그렇게 걸음을 서두른 헨리 앨버트를 반긴 광경은, 이미 무너져서 불타오르는 제1 방어선의 모습이었다.
“……세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실.
그는 상황이 이토록 심각한 줄을 몰랐다.
헥토르 왕국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고는 하나, 제5 방어선은 로만의 활약으로 잘 막아 냈다.
그런 것처럼 다른 방어선에도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제1 방어선의 현실을 확인하니, 헨리 앨버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끝났어.”
제1 방어선.
핵심 진지다.
남부 훈련소가 공격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곳이 무너졌다면, 사실상 이번 전쟁에 희망 따위는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이로는 패배했다.
그렇다고, 자신도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당장 산을 넘어 후퇴한다!”
“빨리 움직여!”
판단은 빨랐다.
남부 산맥.
산세(山勢)가 험해서 도주로로 적합하지 않다지만, 이곳에서 멍을 때리다가 학살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헨리 앨버트는 온몸이 땀에 젖도록 열심히 달렸다.
저질 체력에 숨은 턱밑까지 차올랐고, 안락한 삶에 찌들었던 그의 병사들도 힘든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방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싸우기를 택했다면.
그와 같이 남부 전선에 남는 것은, 볏짚을 안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전쟁의 영웅? 그따위 명성은 다 필요 없어! 일단 살아야 뭐라도 하지!’
한참을 뛰었다.
주변 풍경이 변했다.
풀이 우거진 산 한복판.
이제는 위험에서 많이 안전해졌다는 판단에, 헨리 앨버트는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숨을 골랐다.
“허억, 허억.”
‘살았다.’
저 밑에서는 아직도 싸우고 있을 터.
산만 넘으면 정말 안전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척.
“쉿. 조용해.”
그의 목에.
누군가가 서늘한 검을 들이밀었다.
목소리의 주인공.
그는 바로 크리스였다.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던 헨리 앨버트는, 크리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가 검을 겨눈 이유.
목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검을 회수한 크리스는,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따라오십시오.”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크리스를 따라가던 헨리 앨버트는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기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상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후방 진지로 향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산 한복판에서 그의 기사가 나타난단 말인가.
남부 훈련소가 공격당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이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산을 넘어 도망쳤을 것이다.
나름 멀리 도망쳤다고는 하나, 아직은 적의 추격에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변의 풍경에, 헨리 앨버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겨우 몇 걸음.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그곳은 완벽하게 준비된 진지(陣地)였다.
적당한 크기의 엄폐물이 병사들의 몸을 가려 주었고, 그 뒤로는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산 한복판에 만들어진 장소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정도의 진지라면 사실 멀리서도 보였어야 했는데,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니까 갑자기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났다.
당황스러운 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병사들의 반응에, 헨리 앨버트가 대표로 물었다.
“대체 언제 이런 은신처를 만든 거지?”
크리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경계병들에게 손을 들어 위험하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한 후에,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음에 답했다.
“후방 진지로 향하는 길에 남부 훈련소가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주군은 후방 진지가 이미 무너졌다는 판단을 내렸고, 곧바로 산으로 올라와 비밀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럼 당장 산을 넘어 도망가야지! 대체 왜 여기에 남았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크리스가 헨리 앨버트를 돌아보더니, 약간의 혐오가 담긴 눈빛을 보였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남은 이유는 헨리 님과 같은 아군을 보호하고, 산으로 올라오는 적들을 처단하기 위함입니다. 산은 적은 인원으로도 많은 적을 상대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만약 헨리 님이 헥토르의 사람이었다면, 목을 겨누었던 검은 그대로 숨통을 끊어 버렸을 겁니다.”
살벌한 발언이었다.
입이 쏙 들어갔다.
크리스와 헨리 앨버트 사이에는 신분의 벽이 있지만, 싸우는 모습을 보았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로만과 그의 병사들.
다들 괴물이었다.
특히 크리스는, 단연 돋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발군의 전투 실력을 보였다.
‘드미트리 가문은 어떻게 이런 괴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걸까.’
의문을 삼켰다.
그리고는,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물음을 던졌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어디 계시지?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데.”
이미 진지 깊숙이 들어왔다.
그런데도 로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물음에.
크리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주군은 지금 최전방에서 적들을 직접 처리하고 있습니다.”
창백해지는 헨리 앨버트의 얼굴.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미친놈이었다.
* * *
전쟁의 승패는 명확한 결론으로 직결된다.
패자의 죽음.
제1 방어선이 무너진 직후, 그곳으로부터 도망쳐온 병력은 추격자들에게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
서걱!
“크악.”
“컥!”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사방에서 공격당하는 상황에 카이로의 병사들은 발악했으나, 자비 없는 손속에 비명을 지르며 차례로 쓰러졌다.
에드윈 헥토르는 많은 포로는 필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짧은 시간에 남부 전선을 통째로 집어삼켜야 하는 만큼, 많은 포로는 오히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학살.
피와 죽음이 난무했다.
순식간에 줄어드는 병력에, 제1 방어선의 부관 중 하나였던 브란트는 창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날드, 이 개새끼.’
공격을 당하기 전.
브란트는 도날드 백작이 로만의 연락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
만약 그때 로만의 말을 들었더라면.
최악의 상황은 면했을 것이다.
근거 없는 객기로 수성을 택했고, 제1 방어선은 얼마 버텨 보지도 못하고 함락을 당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헥토르 왕국은 만반의 준비를 했어. 기습적인 공격부터 시작해서 후방 진지를 점령, 그리고 플레어까지. 이건 우리에게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로만 드미트리도 그래서 산으로 도망치자고 했던 것이겠지. 말이야 게릴라 작전을 위해서라지만, 그건 남부 전선을 버리자는 의미였어.’
비겁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옳은 판단이다.
방심의 대가로 남부 전선은 후방 게이트를 점령당했고, 그 순간부터 전쟁의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
압도적인 패배.
혀끝에 비릿한 맛이 맴돌았다.
피를 머금은 것도 아닌데, 피 냄새만으로도 코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퍽!
바로 옆.
병사의 얼굴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창 하나가 병사의 뒤통수를 관통해 버린 상황에, 브란트는 본능적으로 적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확!
“……!”
간발의 차이.
공격이 실패했다.
기사로 보이는 이의 분노 어린 시선을 마주하자, 브란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까지인가.’
공격 동작이 너무 컸다.
제1 방어선이 무너질 때부터 알았다.
자신을 비롯한 남부 전선의 병력 모두가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를 악물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최후의 반격을 하려는 순간.
서걱!
푸확.
피가 튀었다.
하늘로 둥실 떠오르는 헥토르 기사의 머리.
경악으로 물든 브란트의 시선에,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