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귀영(鬼影) (3)
전장을 뒤로하고.
에드윈 헥토르가 막사로 향했다.
지휘 본부로 지정한 간이 막사에는, 에드윈 헥토르의 명령을 받은 수뇌부들이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잭슨. 상황을 보고하라.”
“알겠습니다.”
레인저 부대의 대장.
잭슨이 앞으로 나섰다.
“제1 방어선을 무너트린 직후, 지휘관님의 명령대로 3대대를 동원해 잔당들을 처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부터 3대대 소속 중대들의 연락이 하나씩 두절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통신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만, 3개 중대가 차례로 연락이 끊긴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적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예상 피해는?”
“약 300명 정도입니다.”
표정이 굳었다.
이번 전쟁.
승리를 위한 완벽한 계획하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변수로 인해 헥토르의 전사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에드윈 헥토르의 심기를 건드렸다.
“남부 전선의 병력은 대부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을 택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피해가 발생한 것은, 제5 방어선에서 맥클리어리 남작을 죽였다는 로만 드미트리의 소행이겠지.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산을 넘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남부 전선에 남아 우리에게 대항하는 방법을 택했다.”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계획이 처음으로 어긋나는 순간, 에드윈 헥토르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담았다.
“계획에 변수가 발생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내버려 두었다간, 분명히 또 다른 문제를 낳을 것이다.”
“지휘관님.”
수뇌부 중 하나였다.
각진 얼굴의 사내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휘관님의 말씀처럼 처음 계획과는 다른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맥클리어리 남작은 죽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잔당을 규합하여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겠지요.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남부 전선은 5개의 최전방 방어 진지와 1개의 후방 진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후방 진지와 제1 방어선이 우리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금, 나머지 방어 진지들을 함락시키면 남부 전선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습니다. 숲을 보십시오. 로만 드미트리라는 쥐새끼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눈앞의 방어 진지들을 무너트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로만 드미트리는 작은 변수다.
그에게 휘둘리다가 공성에도 실패한다면, 그때부터는 계획의 성패를 확신할 수 없다.
3일.
카이로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들이 혹여 다른 생각을 할지라도, 3일 안에 방어 진지를 완벽히 무너트리고 숨통을 조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에드윈 헥토르를 만류했다.
헥토르의 별.
그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면, 항상 상식 밖의 행동을 했음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하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내 예상대로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는 제2 방어선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계획을 엉망으로 만드는 변수를 처단하는 것이다. 당장 병력을 물러라. 우리는 지금부터 남부 전선의 쥐새끼들을 완전히 몰살해 버릴 것이다.”
그 말에.
수뇌부들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 * *
제2 방어선.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고지가 눈앞에 있는데, 지금 병력을 물리라는 에드윈 헥토르의 판단을 선뜻 따를 수가 없었다.
수뇌부가 말했다.
“무모한 판단입니다. 잔당들은 소수일 뿐입니다. 일단 방어선을 모두 점령하고, 그 이후에 그들을 처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병력으로 대세를 뒤집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다.
에드윈 헥토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처음 보고를 받은 순간부터 계속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본능적인 감각.
사람들은 본능과 상식이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본능도 상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지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도 없이 계획을 되짚었기에, 본능은 로만 드미트리를 위험 요소로 분류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너희들의 뜻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휘관으로서 나는 항상 최악을 대비해야만 한다. 내가 걱정하는 최악은 3일 안에 다섯 개의 방어선을 모두 무너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부 전선에서 활개를 치며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만들지도 모르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만약에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예상 불가한 변수를 만들어 낸다면, 그때는 방어선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보다 좋지 않은 상황을 맞닥트릴 수밖에 없다.”
간단한 문제였다.
수습할 수 있는 문제와 없는 문제.
에드윈 헥토르는 후자에 힘을 실었다.
방어 진지는 어떻게든 무너트리면 그만이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완벽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최악이 아니라 차악(次惡)을 택할 뿐이다. 만약 내 설명을 듣고도 대다수가 제2 방어선을 무너트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면, 나도 내 고집을 꺾고 의견을 따르겠다.”
사실.
수뇌부들은 알고 있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런데도 상식적인 질문을 던진 것은, 단 한 번이라도 인간적인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을 했다는 의미.
잭슨이 대표로 말했다.
“지휘관님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들은 알까.
이 판단으로.
헥토르 왕국은 예정보다 일찍, 로만 드미트리가 기다리고 있는 남부 산맥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 * *
해가 저물어 갔다.
농민들은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저녁밥을 먹을 시간에, 어둠을 뚫고 환한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화륵.
화르르륵.
헥토르의 병사들이 횃불에 불을 붙였다.
“적들을 발견하면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곧바로 호각을 불어라. 카이로의 잔당에는 오라 검사가 포함되어 있다. 천천히 적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일제히 공격한다면, 큰 피해 없이 적들을 모조리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2대대 3중대.
일부 구역의 수색을 맡은 중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남부 산맥은 넓다.
무분별하게 수색했다가는 적을 놓칠 수도 있기에, 밑에서부터 병력을 늘어트려서 천천히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만약 적들이 나타난다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지만, 적의 위치가 드러난 순간부터는 그곳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완전히 에워싸 버리는 게 가능하다.
에드윈 헥토르의 생각이었다.
애매한 수색으로 시간을 날리는 것보다, 한번 움직일 때 완벽하게 잔당을 소탕해 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화악.
불길에 어둠이 밀려났다.
병사들은 천천히 산을 올랐다.
괜히 마른 나뭇잎을 밟을 때면 화들짝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정말 신중하게 주변의 모습을 살폈다.
“후우, 후우.”
선두에는 중대장이 나섰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중대장은 딱딱한 얼굴로 주변을 비추었다.
맥클리어리 남작을 따르던 생존자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그야말로 전장의 귀신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
아무리 출전(出戰)을 준비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하지만, 중대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제일 먼저 죽는 불상사를 원하진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불길이 어둠을 밝히면, 불길이 닿지 않는 부근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오른쪽은?”
“이상 없습니다.”
바로 옆에서 따라오는 병사였다.
꼬챙이로 땅을 찔러 보며 이동하는 병사의 모습에, 중대장은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확.
“……!”
어둠이 병사를 덮쳤다.
호각을 불 수도, 그렇다고 중대장에게 도와달라 소리칠 수도 없었다.
찰나의 순간.
목이 반대로 뒤틀렸다.
반항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병사는,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런데도 중대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중대장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었는데도 옆을 돌아보기는커녕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왼쪽은?”
“이상 없습니다.”
죽음의 시그널이었다.
중대장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뒤이어 찾아온 어둠이 병사의 목숨을 앗아 갔다.
하나둘.
처음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의 불길이 점점 사그라지는 상황에, 중대장은 뒤늦게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이게 무슨?!”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병사들이 사라졌다.
분명히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주변에 많은 인원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어둠을 밝히는 불길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히 간격을 잘 유지하면서 걸어왔는데도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사실에, 그는 황급히 호각을 불었다.
아니.
불려고 했다.
빠각.
중대장의 목이 뒤틀렸다.
호각을 입에 문 그는, 그 상태 그대로 실이 끊긴 인형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산 곳곳에서.
헥토르의 병사들이 하나씩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 * *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병사들의 죽음.
곧 발각되었고, 정적이 내려앉은 어둠을 뚫고 시끄러운 호각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익-
삐익, 삐이이익-
“적이 나타났다!”
“주변 동료를 확인하라!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한곳에 몰아넣어야 한다!”
다들 난리가 났다.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확인하는 병사들.
그중에는 마법 아티팩트로 어둠을 밝히는 오라 검사들도 있었지만, 아무리 살펴도 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었다.
당연히 주변에 있어야 정상이건만, 어떻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
어둠으로 내려앉은 공간에 한 사내가 있었다.
‘헥토르 왕국의 판단이 생각보다 과감하다. 예상대로라면 다른 방어 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게릴라 작전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볼 생각이었는데, 헥토르 왕국이 제2 방어선을 포기하면서까지 나라는 변수를 차단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과연 저들의 지휘관이 누굴까? 기습적인 공격부터 시작해서 워프 게이트를 공략하는 판단까지. 절대 예사 인물은 아니다.’
웃음이 나왔다.
살짝 건드렸다고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에, 로만은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호승심이 끓었다.
산 곳곳에 불빛이 일었다.
어중간하게 1개 대대를 이끌고 수색을 나선 것이 아니라, 방어 진지를 압박하는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기고 모두 산으로 끌고 온 것 같았다.
남부 산맥은 산세가 매우 험해서 몸을 숨길 수 있는 지형이 제한적이다.
헥토르 왕국의 지휘관은 그러한 사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버릴 지역은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카이로의 잔당들이 숨을 만한 지역을 정확히 공략했다.
판단은 옳았다.
실제로 로만의 병력이 그곳에 있었지만,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하나의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다.
그건 무력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험한 산세와 한 치 앞을 확인할 수 없는 어둠.
양측 모두의 발목을 제한하는 요소였지만, 로만은 어둠 속에서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구나.’
어둠을 활용해서 싸우는 방식.
사람들은 천마 백중혁이 항상 정면에서 대결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다르다.
아직은 힘이 부족했던 시절.
백중혁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칙칙한 어둠에서 살아가는 것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때.
사람들은 백중혁을 이렇게 불렀다.
‘귀영(鬼影).’
귀신의 그림자.
로만은 헥토르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산으로 들어오기를.
지금부터는 천마 백중혁, 아니 귀영 백중혁의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