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615)

94화 귀영(鬼影) (4)

천마의 열두 아들.

삶의 밑바닥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천마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항상 자질을 시험받아야 했다.

“백중혁. 너는 지금부터 일 년간 암귀(暗鬼)로서 살아갈 것이다.”

마교의 암살 부대.

백중혁을 시험하기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다른 형제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씩 직책을 맡았고, 백중혁은 암귀의 일원으로서 암살 명령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마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친 하급 마인을 추살(追殺) 하는 것이었는데, 임무를 맡고 겨우 3일 만에 마인을 죽이는 것에 성공했다.

두 번째 임무.

처음보다는 어려운 상대였다.

소문이 흉흉한 사파의 고수가 암살 대상이었고, 백중혁은 곧바로 그를 찾아가서 결투를 청했다.

싸움은 격렬했다.

사파의 고수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백중혁을 몰아붙였으나, 단 한 번의 실수에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첫 번째 임무보다도 빠른 속도. 마교로 복귀한 백중혁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가 암귀로서 재능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 번째 임무는 달랐다.

정면 대결에서는 승산이 없는 정파의 고수였다.

사파의 고수를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대놓고 찾아갈 수 없었고, 일주일 안에 결과를 만들어 내라는 명령에 백중혁은 이전과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때부터 어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정파의 고수를 따라다니며 그가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파악했고, 가장 방심한 틈을 노려서 암살을 시도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설마 변소 밑바닥에 암살자가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그는, 볼일을 보던 자세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초라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임무.

백중혁은 살아남기 위해 현실에 충실했다.

시간이 흘러 천하제일이라 불리면서부터는 정면에서 대결하는 것을 선호했으나, 힘이 없을 때는 몸을 웅크리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건 자존심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삶의 밑바닥에서 백중혁이 자존심을 운운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지하 동굴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

백중혁은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과정에서 암살 기술들을 섭렵했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

사람들은 말했다.

38명의 고수를 죽인 마교의 암귀.

귀신의 그림자를 보는 순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그건.

현생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로만 드미트리의 비밀이었다.

* * *

이번 작전.

처음에 홀로 헥토르 왕국을 상대하겠다고 말하자, 로만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반대하는 반응을 보였다.

“절대 안 됩니다. 주군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군이라면 분명히 혼자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내겠지만,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헥토르 왕국은 이번 공격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끝냈습니다. 만약에라도 그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주군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저희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크리스였다.

담담한 반응을 보이는 케빈과는 다르게, 그는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로만의 계획을 말렸다.

다른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새로이 합류한 맥버니도 크리스와 의견이 같았다.

“불가능한 작전입니다. 남부 산맥은 산세가 매우 험합니다. 언뜻 들으면 지형지물을 활용해서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오히려 제한되는 지형으로 인해 기동력을 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는 산길이 얼마 되지 않아서, 적들의 추격을 당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격렬한 반대.

로만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실 겨우 이백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헥토르 왕국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로만은 구구절절한 말로 설득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은 상식을 벗어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상식적인 설득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완벽하게 따라 줄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나를 믿는다면 계획을 따라라.”

그뿐이었다.

짧은 말에.

크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맥버니와 같은 새로운 인물들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드미트리 가문에서부터 로만을 따르던 사람들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인물인가.

항상 상식을 벗어나는 행보를 보여 주었다.

블러드 팽을 시작으로 바르코 가문을 멸문시키는 과정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

로만은 홀로 적들의 앞에 나타났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불길을 보며, 로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맡겼다.

* * *

화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헥토르의 병사들은 로만을 찾아내려고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로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암왕(暗王)의 무공은 어둠과 하나가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암귀 시절.

백중혁은 마교의 보고에서 암왕의 무공을 접했다.

암왕은 무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좀도둑이었던 그는, 어둠을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하면서부터 대도(大盜)라 불리는 거물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도둑질의 수준이 달라졌다.

단순히 대부호의 주머니를 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림의 문파들을 목표로 삼았다.

남궁세가, 제갈세가와 같은 정파의 오대세가와 사파의 문파들, 그리고 감히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에 발을 들이기까지 했다.

딱 거기까지였다면.

암왕은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심취한 그는 천마의 보고를 탐했고, 그 결과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사사삭.

암왕의 무공.

어둠에 동화되었다.

바로 코앞에 있어도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나뭇잎을 밟아도 그 소리가 새어 나가질 않았다.

완벽한 은신이었다.

방금까지 횃불로 밝히던 곳이 어둠으로 물들면, 로만은 그곳에 나타나 어둠을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는.

푹!

“……커억?!”

기습적으로 적을 공격했다.

어둠에서 튀어나온 검은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고, 헥토르의 병사는 눈을 부릅뜨며 피를 토해 냈다.

“이런.”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삐이이익-

호각이 요란하게 울렸다.

분명히 적의 존재를 알아채고 대형을 좁혔는데도 불구하고, 찰나의 방심이 곧바로 동료의 죽음으로 직결되었다.

헥토르의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제히 대형을 형성하며 죽은 병사를 중심으로 둘러싸려고 했지만, 로만은 호각이 불린 순간에 이미 그곳을 빠져나간 뒤였다.

“크악!”

“컥!”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오른쪽을 둘러싸면 왼쪽에서.

왼쪽을 둘러싸면 오른쪽에서.

분명히 빠르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헥토르의 병사들을 놀리듯이 반대편에서 보란 듯이 나타났다.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움직임.

헥토르의 병사들은 악에 받쳐 주변을 확인했다.

그들은 간격을 좁혀서 서로를 보호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로만에게 틈을 내주는 꼴이 되었다.

‘천천히. 하나씩 처리한다.’

헥토르 왕국.

그들은 어둠으로 물든 산에 발을 들였다.

그들의 판단으로는 어둠이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겠지만, 불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초라한 능력은 눈앞에서 로만이 움직여도 아무런 반응도 하질 못했다.

암왕의 무공은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기를 활용해서 어둠에 동화되는 정도의 능력이지만, 암귀로서 살았던 시절의 경험은 그런 능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헥토르의 기사들.

그들이 발악했다.

오라를 사용할 줄 아는 그들이 선두에 나섰으나, 로만은 집요하게 그들의 사각지대를 노렸다.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순간.

로만은 어김없이 죽음을 선사했다.

마나로 소음을 차단해 버리자,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는 데도 적들은 곧바로 알아채지를 못했다.

헥토르 왕국은 몰랐다.

그들이 상대하는 존재.

어둠을 활보하는 적은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이번 계획은 적들의 몰살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간과할 수 없도록 최대한 많은 적을 죽이는 것. 어둠이 내려앉은 산에 발을 들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밤은 길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해가 뜨기를 정말 간절하게 기원할 것이다.

* * *

헥토르의 기사.

톰슨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손과 다리가 덜덜 떨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눈앞의 상황.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분명히 적이 나타난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적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저쪽이다!”

“빨리 움직여!”

악에 받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대열은 무의미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죽음의 소리에, 헥토르의 병사들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지휘관들로서는 병사들의 혼란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같이 주변을 경계하던 동료가 죽는 상황이 속출하자, 분노와 공포가 뒤얽혀 판단력을 멀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푹!

“커억.”

희생자가 속출했다.

수많은 병사가 눈에 불을 켜고 수색했지만, 조금이라도 한눈을 파는 순간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그건 정말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였다.

어둠으로 내려앉은 공간에 얼마나 많은 적이 도사리고 있을지 예상할 수 없기에, 톰슨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절대 대열을 이탈하지 않았다.

병사들과 같이 천천히 움직이며, 적을 찾는 것보다는 일단 자신의 안위를 챙겼다.

대열의 후방.

톰슨의 눈에는 보였다.

앞에서 먼저 움직이는 병사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모습을.

파삭.

불빛이 하나 꺼졌다.

병사가 죽는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불빛을 보고 병사가 죽었음을 추측했다.

예상대로.

바로 옆에 있던 병사가 호각을 요란하게 불어 댔고, 불빛이 요동치며 그쪽으로 일제히 몰려들었다.

그러자.

파삭.

또다시 반대편에 있는 불빛이 사라졌다.

한 발 뒤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불빛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제야 알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분명히 헥토르 왕국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절대 유리하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중대장님!”

“1중대장님이 죽었다!”

1중대장의 죽음.

톰슨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1중대장의 근처에는 병사들이 제법 있었는데도, 그들과 더불어 지휘관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인간의 감각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확인하고 있는데도,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건 말도 안 돼.’

헐레벌떡 뛰었다.

중대장의 시신을 챙기는 게 아니라, 중대장이 가지고 있던 통신 기구를 집어 들더니 황급히 연결했다.

그리고는.

“지휘관님! 이곳에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있다간 모두 죽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통신 너머의 사람들을 당혹스러움에 빠트리는 목소리.

아니,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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