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615)

95화 귀영(鬼影) (5)

사건 발생지와 멀리 떨어진 곳.

마법 통신기로 들려오는 톰슨의 목소리에, 에드윈 헥토르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톰슨, 침착해라. 적들은 수적으로 불리하기에 어둠을 이용할 뿐이다. 주변을 경계하고, 차분하게 내게 상황을 설명해라.”

[2대대 1중대가 맡은 구역에서 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확인해도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헥토르의 병사들은 차례로 죽어 나가고 있는데, 시체만 덩그러니 남을 뿐. 적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휘관님. 이, 이걸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형체가 없는 귀신을 상대로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창백하게 질린 톰슨의 얼굴이 떠올랐다.

‘톰슨은 오라 검사다. 일반인보다 감각이 월등히 발달한 존재가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니. 아무리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이라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아니.

불가능하다.

오라 검사는 어둠을 꿰뚫는다.

마나를 머금은 눈은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에, 해가 저문 시간인데도 산을 오르는 선택을 내렸다.

그런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중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전해 오는 연락을 보면, 카이로의 잔당들은 산을 활개 치며 돌아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마법의 가능성은?’

없다.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인비저블(invisible)과 하이드(hide) 계통의 마법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나 애초에 마법은 자주 사용할 수가 없다.

일회성의 기술.

한번 사용하고 나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로만 드미트리는 톰슨의 설명처럼 마치 실체가 없는 귀신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했다.

헥토르의 병사들이 죽고 있다.

실체를 드러냈다는 의미고, 마법의 효과가 소멸하였는데도 다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알아갈수록 진창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많은 상황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번 전쟁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시험에 빠트렸다.

정답은 모른다.

하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는 체력적인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계산한 바로는, 로만 드미트리와 합류한 병사의 숫자는 채 이백이 되지 않는다. 톰슨. 어둠에 현혹되지 마라.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이고, 침착하게 대응한다면 분명히 적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병력을 이끌고 그리로 가겠다. 너희가 공격받은 기점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싸면, 마법 조명탄으로 시야를 밝히면 적들로서는 도망칠 방법이 없다.”

객관적인 계산 아래.

에드윈 헥토르는 유리한 상황임을 자신했다.

눈앞에 벌어지는 공포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격렬하게 흘러가는 상황에서도 현실을 직시했다.

신호를 보냈다.

병력을 대동하고 움직이려는 그때.

[……지, 지휘관님! 아무래도 카이로의 귀신이 저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통신 너머로.

절망에 물든 톰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척.

톰슨이 검을 들어 주변을 경계했다.

주변의 병사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어둠에, 톰슨은 자신이 귀신의 목표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1중대 병사들은 들어라!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방어 대형을 형성하라! 적은 지금 우리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어둠에 빨려 들어가지 말고, 서로 등을 맞대고 적의 공격을 막아 내란 말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오라 검사.

일반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인(超人)의 경지에 올랐지만, 그도 결국 인간일 뿐이었다.

‘이곳에는 1중대만 있는 게 아니다. 아군이 다닥다닥 붙어 경계 라인을 형성하고 있기에, 앞으로 빠르면 3분 안에 이 주변 일대는 완전히 포위될 것이다. 그러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지휘관님의 말처럼, 상황은 우리가 유리하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마법 통신기는 켜 두었다.

혹시라도 상황이 벌어지면 곧바로 전달할 수 있도록, 허리춤에 마법 통신기를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때였다.

파삭.

불길이 사라졌다.

톰슨이 위치한 곳에서 한 5m 떨어진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병사 하나가 어둠에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확실했다.

어둠의 존재가 바로 코앞에 나타났고, 톰슨은 본능적으로 마나를 일으켰다.

‘기회다!’

타닥.

오라의 폭발.

공간을 쇄도했다.

상대가 도망칠 수 없도록, 빠르게 공간을 파고들더니 병사를 데려간 어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바람을 갈랐다.

검에 걸리는 감각이 없었다.

분명히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병사의 시체만이 보였다.

병사는 눈을 부릅뜬 채로 죽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 얼굴에, 톰슨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런.’

한 번의 쇄도.

대열을 이탈했다.

자신을 따라오던 병사들과 멀어졌다는 생각에, 톰슨은 황급히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 순간.

톰슨의 몸이 굳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그곳에서, 검은 인영(人影)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인영.

로만 드미트리였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적들이 흩뿌린 피가 곳곳에 묻어 있었다.

“어둠에 숨어 적들을 사냥하다 보면 가끔 이런 상황이 발생하고는 하지.”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

톰슨은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길게 늘어트린 검은 공격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검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피는 언제든 공격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전신의 털이 삐쭉 섰다.

톰슨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오라를 최대한 끌어올리면서, 로만 드미트리의 기습적인 공격을 대비했다.

바스락.

낙엽을 밟았다.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은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눈앞에 나타나니 어둠 속의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보였다.

로만이 이죽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 그 적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 분명히 방금까지 겁에 질려 있던 너는, 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어둠 안으로 뛰어들었다. 왜 그런 실수를 범했을까? 정말로 나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나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힐끗.

톰슨이 주변을 살폈다.

병사들은 생각보다 멀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믿어야 했다.

‘승부를 보자.’

귀를 막았다.

의미 없는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로만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상대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땅을 박찼다.

타닥.

“죽어!”

빨랐다.

다시 한번 폭발하는 오라.

겨우 1성의 오라였지만,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능력은 단번에 로만의 몸을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었다.

톰슨의 머릿속에서는 공격이 먹혔다고 생각했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끈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서걱!

“크악!”

피가 튀었다.

가슴팍이 길게 베이면서, 극심한 고통에 톰슨의 몸이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단 일격.

톰슨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절대 로만 드미트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가슴팍의 피부가 찢겨 나갔지만, 그는 곧바로 벌떡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살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비명을 꽥꽥 지르며 병사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사일런스(silence) 마법이라도 사용했는지 음성은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비틀.

벼락같은 통증과 더불어 균형이 무너졌다.

로만의 검이 톰슨의 아킬레스건을 잘라 버렸고, 손을 뻗어 막으려고 하자 손목마저도 날아갔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손목.

톰슨의 얼굴이 시체처럼 변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하나 남은 손으로 바닥을 질질 끌어 도망쳤지만, 로만은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왔다.

로만이 손을 뻗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는 톰슨.

죽이진 않았다.

그의 허리춤을 확인하더니,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마법 통신기를 빼내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

통신기 너머.

로만은, 헥토르의 지휘관을 찾았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까지 톰슨과 대화를 했는데도, 통신기 너머로는 싸늘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로만이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남부 전선을 공격하면서 시선을 분산한 뒤에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계획. 아마도 하루 이틀 준비한 계획이 아니겠지. 카이로 왕국이 방심했다고는 하나, 너희들의 계획은 완벽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남부 전선을 차지하려고 했을까. 유례없는 대기근으로 인해 나라의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는 헥토르 왕국이, 대체 왜 얻을 것 하나 없는 남부 전선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까.”

주변에서 불빛이 일렁였다.

병사들은 주변을 확인하는데도, 바로 근처에서 로만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아채지를 못했다.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나라의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것. 너희들은 남부 전선을 인질로 삼아 카이로 왕실과 거액의 거래를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겠지. 후방 진지에 남아 있는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수성을 준비하는 이유도, 카이로 왕실에 확실한 위협을 보여 주려는 의도일 테고.”

씰룩.

웃었다.

상대의 계획은 완벽하게 진행되었지만, 자신의 존재로 인해 하나씩 무너져 가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 계획을 알아 버렸다는 거야. 너희에게는 시간이 없다. 애초에 군량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병력으로는, 아무리 길어도 석 달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지. 나는 너희들이 하려는 일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끝까지 버텨서, 너희의 계획을 방해할 것이다.”

이번 연락.

철저하게 의도되었다.

헥토르 왕국은 실제로 시간이 얼마 없다.

그들은 오차 범위를 줄이기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도록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방법을 택했다.

완벽한 계획은 오히려 그들의 약점을 드러냈다.

만약 로만이 약점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직 시간이 있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직접 연락함으로써 헥토르 왕국을 벼랑 끝에 몰았다.

‘어차피 헥토르 왕국에는 선택지가 없다. 그렇기에, 애써 외면했던 진실은 그들을 조급하게 만들겠지.’

자신의 존재.

이제는 간과할 수 없다.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존재가 뻔히 버티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카이로 왕실과 협상한단 말인가.

외통수였다.

로만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모래성처럼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이것으로 목표는 달성했다.’

상대가 포기하고 물러나든.

아니면 끝까지 싸우든.

로만의 연락은 변수를 만들었다.

이번 연락 한 번으로, 헥토르 왕국은 절대 그 이전보다 좋은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때였다.

[네가 로만 드미트리인가?]

에드윈 헥토르.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마침내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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