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615)

96화 귀영(鬼影) (6)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네 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헥토르 왕국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극심한 대기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외부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그래서 카이로 왕국을 공격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로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해라도 해 달라는 말인가?”

[아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번 전쟁에 헥토르 왕국의 명운이 걸렸다. 우리는 군량이 충분하지 않다. 네가 말한 것처럼 3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바닥을 드러내는 식량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로서는 물러날 수 없다. 산에서 나물을 캐고, 죽어 나간 동료의 육신을 씹어 먹는 한이 있어도. 원하는 바를 얻을 때까지 순순히 물러날 생각 따위는 없다.]

서늘한 발언이었다.

인간으로서 경험해서는 안 될 식인(食人)의 영역을 말할 정도로, 에드윈 헥토르의 태도는 단호했다.

언젠가.

에드윈 헥토르가 사찰을 나갔던 적이 있다.

헥토르 왕국의 상태는 정말 처참했다.

과거에는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땅이 심한 가뭄으로 인해 쩍쩍 갈라졌고,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는 어린아이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땅만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들이 에드윈 헥토르를 발견하고는 앙상한 손바닥을 내밀며 먹을 것을 구걸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매일 고민하던 에드윈 헥토르는, 카이로 왕국을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그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로만의 예상대로였다.

그의 발언은 헥토르 왕국을 벼랑 끝에 몰았다.

하지만 애초에, 헥토르 왕국은 이번 전쟁이 아니더라도 언제고 벼랑 아래로 떨어질 운명이었다.

[내 계획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인지 잘 알겠지. 카이로 왕실에 전하라.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시간이 너희들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만약에 우리가 이 땅을 통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네크로맨서에게 구한 시독(屍毒)을 사방에 뿌려 이곳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상황을 반전시켰다.

궁지로 몰아넣는 발언을.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로 맞받아쳤다.

에드윈 헥토르는, 처음부터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이름은 에드윈 헥토르다. 헥토르 왕국의 왕자로서, 나는 내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벼랑 끝에 몰린 헥토르 왕국과 같이 벼랑 아래로 추락하겠는가, 아니면 적당한 타협으로 후일을 도모하겠는가.]

카이로.

그들에게 자신은 극악무도한 악인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왕국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이야말로.

[선택은 카이로의 몫이다.]

에드윈 헥토르가 생각하는 왕가(王家)의 역할이었다.

* * *

상대가 이름을 밝혔다.

에드윈 헥토르.

헥토르의 별이라 불리는 사내.

헥토르 왕국을 조사하면서, 익히 들었던 이름이었다.

‘무능력한 아비와는 다르게 걸출한 능력으로 헥토르 왕국의 중추로 성장한 인물. 어렸을 때부터 나라의 대소사(大小事)에 관여하며 수많은 문제를 해결했고, 그 능력에 감탄한 사람들이 에드윈 헥토르를 헥토르의 별이라고 불렀다지. 대기근으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크로노스 제국과 같은 다양한 국가에서 에드윈 헥토르와의 정략결혼을 바랄 정도로, 그는 나라 안팎에서 모두 인정하는 인재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이번 전쟁의 지휘봉을 맡았다.’

예상대로였다.

이번 전쟁.

평범한 인물이 지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체계적이고 과감하게 치고 들어오는 판단은, 로만으로서도 상대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왕가의 역할.

명분은 확고했다.

그들이 절대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도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푹!

“크아아아악!”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로만이 톰슨의 허벅지에 검을 쑤셔 박았다.

소리를 차단한 덕분에 병사들이 비명을 들을 일은 없었다.

로만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톰슨의 몸을 강하게 억누르며, 비명을 쥐어 짜내듯 천천히 검을 비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냐고? 비명을 들었다시피 지금 내 검으로 이 녀석의 허벅지를 찔렀다.”

[차라리 죽여라! 아무리 적군이라 한들, 왜 고문까지 한단 말이냐!]

“왜 고문까지 하느냐라. 참으로 감성적인 발언을 하는구나. 나는 헥토르 왕국의 사정은 조금도 관심이 없다. 어떤 이유든 간에 너희들은 국경을 넘었고, 죄 없는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을 학살했다. 그런데 허벅지를 조금 찔렀다고 겁쟁이처럼 우는 꼴이라니.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라. 네가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을 아끼듯, 나 또한 나의 사람들이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왜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먼저 선을 넘은 너희들이, 내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바랄 수는 없다.”

에드윈 헥토르.

그는 크나큰 착각을 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상대가 정해 주는 선택지가 무엇이든, 본인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했다.

꽈드득.

“크악, 크아아아악!”

톰슨이 발악했다.

뼈를 잘라 내는 고통에, 당장 죽여 달라는 듯이 애처로운 손길을 보냈다.

로만은 톰슨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그에게 아무런 악의(惡意)도 없지만, 전장에서 반대편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슴없이 고문했다.

약육강식의 세계.

그곳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가 어떤 가치관을 가졌든, 어떤 정의를 추구하든.

서로를 적이라 인식하고 적의를 드러낸 순간부터,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다.

그뿐이었다.

로만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드윈 헥토르의 협박에도 물러날 생각이 없기에, 오히려 그가 들으라는 듯이 톰슨을 고문해 버렸다.

피가 튀었다.

얼굴이 피로 흠뻑 물들었다.

로만은 살벌한 눈빛을 드러내며, 톰슨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네가 너의 도리를 행하듯, 나도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할 것이다. 그러니 절대 내게 붙잡히지 마라. 나는 내가 마주하는 녀석들을 모조리 고통 속에서 죽여 버릴 것이다. 단 한 놈도 살려 주지 않을 것이고, 너희들이 백기를 내걸고 도망치는 것을 택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따라가서 등에 칼을 꽂을 것이다. 내 이름은 로만 드미트리다. 나는 너와 같은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너희가 나의 사람들을 건드렸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반드시 그 값을 받아 낼 것이다.”

적의를 토해 냈다.

헥토르 왕국은 몰랐을 것이다.

국경을 넘어서는 그 순간부터.

건드려서는 안 될 적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이미 헥토르 왕국은 배수의 진을 쳤다.

그들이 항복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로만 또한 역으로 통신기를 통해 상대에게 공포를 전염시켰다.

푹.

“크르르륵.”

톰슨의 목에 칼을 쑤셔 박았다.

한 생명이 꺼져 가는 소리가 통신기를 타고 넘어갔고, 에드윈 헥토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떨구는 톰슨.

로만이 다시 통신기를 입에 댔다.

“네가 결사의 항전을 택한다면.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툭.

통신을 끊어 버렸다.

* * *

통신이 끝났다.

속에서 폭발할 것 같은 분노와는 다르게.

에드윈 헥토르의 표정은 싸늘함을 풍겼다.

‘로만 드미트리. 생각보다도 더 위험한 인물이다.’

동귀어진의 수.

보통의 사람이라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죽더라도 같이 죽자는 발언은 웬만한 심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 상대의 반응은 더 강렬했다.

톰슨을 죽였다.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에드윈 헥토르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어떤 마음가짐인지를 알고 있는데도, 톰슨의 육신을 난도질하면서 그에게 경고를 보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험한 인간이었다.

한 발이라도 물러나는 순간 기세를 잃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한순간도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적으로 절대 만나기 싫은 유형의 인간.

완벽했던 계획에 발생한 단 하나의 변수가, 에드윈 헥토르가 상상하기 싫은 방향으로 몸집을 불려 갔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잭슨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잭슨은 대화를 들었다.

특히 톰슨이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얼굴이 당장 폭발할 것만 같았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우리가 만약 결단을 내리지 않고 이전과 똑같은 시간을 보냈다면, 우리는 서서히 말라 가다가 결국 국가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결단을 내렸다. 가능한 자금을 모두 동원하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전사들을 동원했다. 잭슨. 우리에게는 돌아갈 길이 없다. 지금 헥토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생존보다도 우리가 가지고 온 보상이 더 중요할 것이다.”

가혹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게 에드윈 헥토르가 짊어진 짐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보다도 살았다는 생각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그렇다.

그걸 알면서도.

에드윈 헥토르는 짐을 짊어졌다.

전쟁의 책임을 모두 떠안고, 일국의 왕을 대신해서 본인이 전장으로 떠났다.

고로.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수 없다. 지금 당장 병력을 동원해,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난 위치를 기점으로 포위망을 형성하라. 그리고 그 녀석을 생포한다면. 고통 속에 죽어 간 톰슨의 복수를 위해, 내가 직접 로만 드미트리의 살점을 하나하나 도려낼 것이다.”

악에 받쳐 말했다.

에드윈 헥토르의 진심에,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번 전쟁.

그 끝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잭슨은, 에드윈 헥토르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 *

작전을 바꾸었다.

헥토르의 오라 검사들.

그들이 선두에 나섰다.

“내 뒤를 따라오도록.”

10분 전.

에드윈 헥토르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더는 카이로의 잔당들에게 휘둘릴 수 없다. 우리는 지금부터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어둠 속의 존재들을 처단할 것이다. 오라 검사들이 선두에 나서서 길을 밝히고, 공격을 당하는 순간 다른 구역의 병사들은 일제히 산을 올라라. 머릿수로 압도하는 싸움이다. 살을 내어주고, 적의 뼈를 취할 것이다.”

결단을 내렸다.

천라지망(天羅地網).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과감하게 치고 올라가는 병력은 로만이 도망칠 수 있는 모든 퇴로를 차단할 것이다.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전략이다.

에드윈 헥토르로서는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결과를 만들어 내길 바랐지만, 통신기 너머에서 들려온 로만의 적의를 마주하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상대를 인정했다.

괴물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화악.

선두의 오라 검사들.

그들에게서 밝은 빛무리가 일었다.

마법 아티팩트였다.

마나에 반응해서 빛을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이 빛에 닿은 적은 일시적으로 반짝거리는 빛의 파편에 노출된다.

천라지망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마법 아티팩트를 발현하는 도중에는 오라 검사가 제힘을 발휘하기 힘들지만,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로만의 목에 방울을 걸어야 했다.

그렇기에.

헥토르의 검사들은 목숨을 걸었다.

미끼로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겠다는 강한 열망이 그들의 눈빛에서 드러났다.

“전방에 아무도 없다! 천천히 따라오도록!”

오라 검사가 길을 밝혔다.

그를 선두로.

헥토르의 병력이 우르르 걸음을 옮겼다.

다들 얼굴에 자신감이 붙었다.

미지의 공포를 해결했다는 확신이 생기자, 더뎠던 수색 작업에 다시 탄력이 붙었다.

그러나.

그건 이른 확신이었다.

분명히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 공간이 뒤틀리더니 불빛에 반사되는 무언가가 번뜩였다.

서걱!

피가 튀었다.

오라 검사가 눈을 부릅뜨더니, 피거품을 물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 너머로.

분명히 방금까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던 카이로의 병사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 일제히 달려들었다.

“공격해!”

“적들을 공격하라!”

검의 주인.

크리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처음 산에 들어왔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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