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 (4)
열기가 폭발했다.
에드윈 헥토르의 손길에서 일어난 불길이, 마치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사방팔방으로 뿜어졌다.
화륵.
화르르르륵!
피부가 닿는 순간 단번에 녹아 버릴 정도의 열기.
로만은 방향을 틀었다.
달려가는 속도가 있었는데도, 단번에 걸음을 멈추더니 열기를 피해 에드윈 헥토르의 측면을 노렸다.
“어딜!”
화악.
에드윈 헥토르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메모라이즈(memorize).
그의 서클에 각인된 마법이 즉각적으로 발현되었다.
“인탱글(entangle).”
팍!
파파파박!
땅바닥이 일어났다.
흙에 묻혀 있던 식물의 씨앗들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발아하더니, 사람 몸통만 한 나무줄기가 되어 로만의 몸을 휘어잡았다.
그건 마치 거대한 아나콘다와도 같았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나무줄기들은, 인간의 육체 따위는 단번에 부숴 버릴 강력한 힘을 보유했다.
하나하나.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로만은 마나를 일으켜, 자신을 덮치는 나무줄기들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강력한 충격이 들이닥쳤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감히 왕자님을 건드리다니!”
처음 보는 사내였다.
중년의 사내.
얼굴을 숨기기 위해 로브를 눌러쓴 그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휘날리면서 로만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사내의 검에서는 폭발적인 오라가 분출되었다.
그건 잭슨이 사용하던 오라와는 차원이 달랐다.
주변의 대기를 일그러트릴 정도로 강렬한 오라는, 로만이 이 세상에서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5성 검사.
사내의 이름은 버틀러였다.
헥토르 왕국 랭킹 2위에 해당하는 왕실 기사단 단장.
그가 나타났다.
헥토르 왕국은, 이번 작전을 위해서 정말 그들의 전력을 다했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
쾅!
콰콰콰쾅!
버틀러의 오라가 폭발적으로 로만을 밀어붙였다.
숲이 뒤흔들렸다.
강하고 빠른 연계 공격은, 당장 로만의 목이 날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윈드 블레이드(Wind Blade).”
사사사삭!
에드윈 헥토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길을 따라 휘몰아치는 바람이 마치 칼날처럼 변했고, 버틀러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생겨나는 틈을 공격했다. 이건 보고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에드윈 헥토르로서도, 이번만큼은 공격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파박.
간발의 차이.
로만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의 칼날을 피해 내고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버틀러의 공격에 반응했다.
콰앙-!
머리가 뒤흔들렸다.
에드윈 헥토르.
그는 완벽한 함정을 팠다.
잭슨의 이탈로 호위가 얼마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버틀러를 주변에 대기시켰다.
로만 드미트리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4서클 마법사와 5성 검사의 협공은 버텨 내지 못할 터.
이건 상식을 벗어난 함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이제껏 당한 것처럼, 에드윈 헥토르도 상식 밖의 반격을 시도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정말, 로만 드미트리의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다고 말이다.
* * *
머리가 팽팽 돌았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상대의 공격에, 속에서 역한 기운이 치밀었다.
“퉷.”
피를 뱉어 냈다.
눈앞에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버틀러의 모습이 보였지만, 로만은 한순간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역시나 만반의 준비를 했구나.’
공격 직전.
로만 드미트리는 직감했다.
에드윈 헥토르의 심장에서 휘몰아치는 마나와 일반 병사 시늉을 하는 한 존재.
에드윈 헥토르가 자신의 공격을 예상하고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상대의 의도를 따라 주었다.
함정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에드윈 헥토르를 공격했다.
대체 왜.
그런 무모한 선택을 했을까.
확인해 보고 싶었다.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정말 위기라고 할 만한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블러드 팽.
바르코.
이번 게릴라 작전.
백중혁의 삶에서는 우스울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안락함에 찌들어 가는 자신의 심장에, 로만은 일부러 자신을 시험하고자 사선(死線) 위에 섰다.
콰앙!
공격을 막았다.
5성의 오라.
뇌가 뒤흔들릴 정도로 강력했다.
환골탈태를 경험하면서 로만 드미트리의 육체가 강해졌다지만, 아직은 5성의 오라를 쉽게 받아 낼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버틀러의 검술은 매우 정석적이고 체계적이었다.
검술이란 이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듯, 로만에게 쉴 틈을 허락하지 않고 매섭게 몰아붙였다.
카앙!
카카카카캉!
불꽃이 튀었다.
오라가 격돌하면서, 강한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순간.
로만은 섬뜩함을 느꼈다.
다시 한번 빠르게 몰아치는 마나의 기운에, 로만은 무형(無形)의 공격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사사사삭-
윈드 블레이드.
바람의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로만의 얼굴에 피가 튀었고, 버틀러는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숨이 차올랐다.
연속되는 공격에 로만의 체력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지만, 로만은 버틀러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천마검법 삼초식.’
단전의 마나가 들끓었다.
강력한 폭발.
활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마나가 사방팔방 분출하더니, 오라로 발현되어 그대로 버틀러를 덮쳤다.
“………!”
콰콰콰쾅!
엄청난 힘이었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일격에 버틀러는 황급히 검을 들었고, 전력을 다해서 오라를 일으켰다.
그렇게 했는데도 공격에서 완전히 무사할 수가 없었다.
버틀러의 코에서 핏물이 흘렀고, 그대로 튕겨 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딱.
그 정도였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버틀러는 무너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4서클 마법사와 5성 검사의 협공.
상대가 자신과 동등한 5성 검사였다고 해도 쓰러져야 옳다.
그런데 전투의 양상은 생각과 달랐다.
격렬하게 반격하는 로만의 무력은, 머릿속으로 그려 두었던 그림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리고 있었다.
더구나.
‘로만 드미트리는 겨우 20대 중반이다.’
소름이 돋았다.
자신은 50이 넘는 나이에 5성의 경지에 올랐는데, 상대는 벌써 자신과 검을 섞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일까.
버틀러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 로만 드미트리를 만났기에. 후일 헥토르 왕국을 위협할 만한 위험 요소를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직.
자신과 동급은 아니었다.
그리고.
힐끗.
에드윈 헥토르의 존재.
버틀러가 눈길을 주자, 에드윈 헥토르가 굳은 표정으로 마나를 일으켰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 브레이크(break), 홀드(hold).”
더블 캐스팅.
마나의 기운이 로만을 덮쳤다.
브레이크.
강한 압력으로 물체를 박살 내는 마법.
홀드.
상대를 억압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마법.
두 마법은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로만의 검을 부러트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에서 버틀러가 공격해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만약 마법 면역 아티팩트를 보유하지 못했다면.
로만이 드러내는 찰나의 틈은 그대로 죽음으로 직결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마법 아티팩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고로, 이번 공격은 막을 수 없다.’
확신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확!
버틀러의 공격.
피해 버렸다.
로만의 검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홀드의 효과도 없는 모양인지 로만의 움직임은 너무도 자유로웠다.
번뜩!
역으로 반격을 가했다.
버틀러의 얼굴에도 피가 튀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격이기에, 그로서도 빠르게 반응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몰랐다.
로만의 비밀을.
에드윈 헥토르가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로만은 상대가 어떤 생각인지를 단번에 알아챘다.
‘마법의 힘으로 날 억압하려 한다.’
홀드의 힘.
체내에 침투해서 자신의 근육을 억압하는 힘을 느꼈다.
마법은 난생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힘이었지만, 로만은 그것을 알기에 드미트리에 머무는 동안 마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무형의 힘.
마나를 활용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영역.
무림에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주술이라는 영역에 대해선 알았다.
지난 6개월.
로만은 전쟁을 준비했다.
그곳에서 마법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했고,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마법과 주술은 다르면서도 그 근본은 다르지 않다. 주술과 마찬가지로 내 몸에 마나를 침투시켜서 육체를 제한하려 한다면. 나는 천마신공을 운용해, 그 힘을 곧바로 제거해 버리면 그만이다.’
말처럼 간단한 방법은 아니다.
체내에 침투한 마나.
그들은 바이러스처럼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하겠지만, 절정에 오른 로만의 마나 운용 능력은 그런 문제를 모두 해결해 버렸다.
천마 백중혁이기에 가능한 일.
특별한 힘을 들이지 않고도, 로만의 단전에서 요동치는 마나는 홀드의 힘을 증발시켰다.
그리고.
브레이크는 사실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로만의 검.
샐러맨더를 주고 새로이 만든 염화(炎火)라는 이름의 검은, 마법 따위에 부서질 그런 검이 아니었다.
마법이 파훼 되었다.
상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대비한 것이 아니다.
전쟁을 앞두고.
로만은 모든 변수를 대비했을 뿐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
에드윈 헥토르와 버틀러가 당황했다.
그리고 그 틈을.
로만은 놓치지 않았다.
파박!
“……!”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드는 로만 드미트리.
이번에는 버틀러로서도 반응할 수 없었다.
경악으로 얼룩진 그가 눈을 부릅뜨며 따라붙으려 했지만, 로만의 검은 이미 에드윈 헥토르의 목을 베어 버린 뒤였다.
서걱!
완벽했다.
예상대로라면.
에드윈 헥토르의 머리가 날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마법의 힘은 그런 상황을 허락하지 않았다.
“블링크(Blink).”
한 번의 번뜩임.
에드윈 헥토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로만에게서 다소 떨어진 곳에 나타난 그는, 마법을 무리하게 사용한 모양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개새끼가!”
버틀러가 폭발했다.
헥토르의 왕자가 죽을 뻔했다.
그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마나를 폭발시키더니, 로만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삐이이익-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들렸다.
로만을 쫓던 병력들.
그들이 도착한 것이다.
잭슨을 필두로 들이닥치는 병력의 모습에, 로만은 이만 판단을 내려야 했다.
‘더는 시간을 끌었다간 죽는다.’
저 멀리.
에드윈 헥토르가 보였다.
로만은 그를 바라보며,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해. 내게 붙잡히지 말라는 말. 다음에 날 또 만난다면, 오늘처럼 살아가진 못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로만은 땅을 박찼다.
버틀러로서도 로만을 따라잡지 못했다.
경공술을 발휘하자 순식간에 멀어졌고, 어둠으로 물든 공간에 도달하는 순간,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암왕의 무공이었다.
다급하게 어둠을 밝히며 로만의 존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밤새 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들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안.
그곳으로 따라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한바탕 들이닥친 폭풍에, 사람들은 생각했다.
‘헥토르의 패배다.’
그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특히 모두가 인정하는 삶을 살았던 에드윈 헥토르로서는, 로만이 사라진 어둠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