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전지적 헨리 앨버트 시점 (1)
날이 밝았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침에, 헥토르의 병사들은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침이구나.”
“빌어먹을.”
복잡한 감정이었다.
밤을 지새우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이 주는 공포. 밤새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언제 로만 드미트리가 튀어나와 죽음을 선사할지 모르기에, 헥토르의 병사들은 뜬눈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맞이했다.
전투는 끝났다.
어둠이 밀려나면서부터는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고, 헥토르 왕국도 그들을 추격할 힘을 잃었다.
“동료들의 시체를 옮겨라. 화장(火葬)으로 그들의 혼을 달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이다.”
“조금만 힘을 내라!”
명령이 떨어졌다.
헥토르의 병사들은 힘겨운 얼굴로 명령을 따랐다.
시체는 한두 구가 아니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처참한 상태의 시체는 온전히 옮길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상태가 양호한 것들은 최대한 챙겼다.
힘들어도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조금만 재수가 없었다면 바닥에 쓰러진 시체가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르기에, 피곤하더라도 망자에 대한 예우는 잊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 틈에.
에드윈 헥토르도, 시체를 짊어지고 산을 내려갔다.
“지휘관님. 직접 움직이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다. 나 때문에 죽은 이들이다. 그들을 살릴 순 없더라도, 하늘로 떠나보내는 길을 병사들에게만 맡기고 싶지는 않다.”
“…….”
잭슨이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에드윈 헥토르는 최선을 다했다.
다만.
상대가 강했을 뿐이다.
잭슨으로서는 위로의 한마디를 해 주고 싶었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지금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의 패배다.’
이를 악물었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날이 밝아 시체들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며 에드윈 헥토르는 죄책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체스판 위의 말들.
명령을 내릴 때는 그들의 희생을 덤덤히 받아들였지만, 패배라는 결과와 더불어 현실을 확인하자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역했다.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과신했다. 내 능력으로 로만 드미트리라는 변수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 순간부터, 완벽했던 계획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차악이라 생각했던 계획은 최악의 선택이 되었고, 지금부터 헥토르 왕국은 계획에도 없던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최악이었다.
헥토르를 떠나며.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다짐했다.
수도 없이 계획을 점검하면서, 에드윈 헥토르는 자신의 계획에 실패 가능성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따위 현실이라니.
걸음이 무거웠다.
시체를 짊어진 등에서 전해지는 무게에, 자꾸만 발이 푹푹 박혔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마침내 시체를 산 아래로 모두 옮긴 에드윈 헥토르는, 산처럼 쌓아 둔 시체에 불을 붙였다.
화륵.
화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에드윈 헥토르와 그의 병사들은, 타오르는 불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장례가 끝났다.
에드윈 헥토르는 수뇌부들을 소집했다.
절망감에 빠지는 것은 잠시일 뿐.
눈앞의 현실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해 상황을 보고하도록.”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만, 대략적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밤새 약 700명의 병사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적의 사망자는 채 10명이 되지 않습니다.”
“허.”
“……이런.”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압도적인 패배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나의 판단으로 인한 패배다. 이 자리를 빌려, 너희들에게 잘못된 명령을 내린 것에 사죄하겠다.”
“왕자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이건 지휘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수뇌부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중.
버틀러는,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왕자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3성의 오라 검사라고 알려진 그는, 왕자님과 저희 협공을 받아 낼 만큼의 강자였습니다. 그런 변수를 대체 누가 예상할 수 있답니까? 상대가 너무 강했을 뿐입니다. 저희는 왕자님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새로운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는, 여전히 지휘관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들 동조했다.
산에서의 전투.
직접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해 보았기에, 그들은 이번 패배가 에드윈 헥토르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버틀러의 말이 옳다.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이었다.
포위망을 뚫어 버리는 기동력에, 일격에 목숨을 앗아 가는 무력.
산에 처음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헥토르 왕국에서 그런 변수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나는 패장(敗將)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 주지 않기에, 나는 너희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 만약 내 명령이 또다시 패배로 향하는 판단이라 생각된다면. 직책을 막론하고 무조건 말해 주길 바란다.”
“명을 받듭니다.”
자리에 앉았다.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에드윈 헥토르는 한참을 고민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지금, 상황을 뒤엎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우리는 아무런 소득 없이 왕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로, 카이로 왕국의 본대가 남부 전선에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미루어 두었던 최전방 방어 진지들을 모두 정리할 것이다. 기한은 열흘. 그 안에 확실히 카이로의 잔당들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런 이후, 우리는 후방 진지를 거점으로 삼아 결사의 항전을 준비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는 분명히 우리의 계획을 방해할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이름만으로도 수뇌부들의 표정이 굳었다.
위험한 적이었다.
그가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단 한 명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위험한 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만약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려 든다면 우리는 오히려 복수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어둠과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했던 산에서의 전투와 평야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완전히 다르다. 최전방 방어 진지들. 카이로 왕국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그곳이, 로만 드미트리를 유인할 미끼가 될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남부 진지.
그들을 미끼로 로만을 끌어낼 생각이었다.
본대가 도착하고 나면,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감당할 수 없다.
열흘.
도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거나 남부 진지를 모두 함락시킨다면, 결사의 항전을 진행할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사의 항전만으로는 카이로를 상대로 원하는 보상을 끌어내기 힘듭니다. 이미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고, 카이로 왕국은 우리의 의도를 간파했을 겁니다. 장기적으로 간다면 결국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의 목적.
보상을 받아 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버티는 것만으로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에드윈 헥토르는 고민 끝에 하나의 답을 찾았다.
“보상을 꼭 카이로 왕국에게 받을 필요는 없다. 남부 전선을 완전히 우리의 손아귀에 움켜쥐는 순간. 나는 헥토르 왕국의 왕자로서, 크로노스 제국에 하나의 거래를 제안할 생각이다.”
그는 생각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 * *
그 시각.
카이로 왕국은 분주하게 헥토르 왕국과의 협상을 준비했다.
나라의 국고(國庫)를 관리하는 인물.
아예르 백작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카이로의 재정 상황으로는 헥토르 왕국의 조건을 모두 수용할 수 없습니다. 최근 일 년간. 크로노스의 잦은 도발로 서부 전선에 상당한 예산을 투입했습니다. 그로 인해 금전적인 여유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헥토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간, 카이로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세금을 더 걷는 방법은 어떤가?”
“불가능합니다. 이미 반년 전에 세금을 한번 올렸습니다. 나라의 안위를 목적으로 세금을 올렸을 때도 반발이 대단했는데, 반년 만에 또 올리겠다고 말한다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절망적인 보고였다.
아예르 백작의 단호한 태도에, 다니엘 카이로 국왕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막막했다.
국왕으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건만,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귀족들의 재산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절대 중앙 정부의 허락을 받을 수 없겠지. 카이로의 귀족들. 그들은 나라를 위해 헌신할 인물들이 아니다.’
카이로는 참 웃긴 나라였다.
외세의 침략에 왕권이 강한 것 같으면서도, 그건 지방 귀족들에게 해당할 뿐 중앙 정부는 달랐다.
베네딕트 후작.
덴버 백작.
그레고리 백작.
그들의 세력은 논외였다.
카이로 왕국이 완전히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먼저 챙길 것이 분명했다.
“……방법이 없구나.”
결국.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고가 마르는 것은 나중에 해결할 문제였다.
아무리 사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남부 전선을 헥토르 왕국에 넘길 수는 없었다.
지난 회의.
덴버 백작의 주장으로 인해, 일단은 로만 드미트리를 믿고 3일의 시간을 기다려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뿐.
다니엘 카이로를 비롯한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3일의 여유 시간이 있기에 기다리는 것이지, 정말 로만 드미트리가 무얼 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토르가 통보한 날짜가 다가오는 지금, 협상의 문제는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에게 연락하거라. 협상의 문제로 회의를 진행하겠다고.”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왕실 기사단의 기사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다니엘 국왕 폐하! 남부 전선에서 적을 물리쳤다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승전보(勝戰報).
예상치 못한 소식에, 다니엘 카이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중앙 정부의 귀족들이 소집되었다.
회의실.
그곳에 모인 귀족들은 왕실에서 알려 온 소식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 로만 드미트리가 헥토르 왕국을 물리쳤다는 게 사실입니까?”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헥토르 왕국은 남부 전선을 공격하기 위해 무려 일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그건 절대 남부 전선이 감당할 수 없는 전력인데, 로만 드미트리가 대체 어떻게 헥토르 왕국을 물리쳤는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확인해 보면 알겠지요. 정말로 로만 드미트리가 승전보를 알려 온 것이라면, 우리는 활로를 얻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레고리 백작과 베네딕트 후작의 대화였다.
사실.
아직 믿기지 않았다.
특히 로만 드미트리를 믿어 보자고 말했던 덴버 백작도, 현실로 닥친 상황에 얼떨떨하기만 했다.
‘로만 드미트리. 정말로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 냈단 말인가.’
대단했다.
로렌스를 데리고 바르코를 쓰러트릴 때부터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번 성과는 이전과는 다른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히 4성 검사로 치부할 인물이 아니다.
심지어 3성 검사로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더한 충격일 것이다.
패색이 짙은 전쟁을 뒤엎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는 지휘관으로서도 상당한 재능을 타고난 것이 분명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마침내.
다니엘 카이로가 회의실에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마법 통신기를 연결했다.
“지금 남부 전선에 통신을 연결하겠습니다.”
화악.
마나가 일었다.
이윽고.
화면 너머로,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