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615)

102화 전지적 헨리 앨버트 시점 (2)

화면에 떠오른 얼굴.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사내가 화면에 나타나자, 다니엘 카이로 국왕이 물었다.

“신분과 소속을 밝혀라.”

[……저, 저는 앨버트 가문의 차남인 헨리 앨버트라고 합니다.]

“앨버트?”

다들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중앙 정부의 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누구냐는 눈빛을 보이는 그때,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앨버트! 그래, 앨버트라는 가문이 있었지. 지금이야 어떨진 몰라도, 과거에는 나름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면서 중앙 정부에서 한자리했던 가문이었지. 그건 그거고. 왜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라 네가 통신을 받는 거지? 우리는 남부 전선의 지휘권자와 연락하길 바라는데.”

헨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가문의 이름을 알아주었기 때문일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그는 애써 억누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지금 로만 드미트리 님이 이끄는 부대의 일원으로 합류해 있습니다. 베네딕트 후작님의 말씀처럼 제가 아니라 그분이 연락을 받는 것이 맞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고 하셔서 유일한 귀족인 제가 대표로 나섰습니다.]

자꾸만 입이 말랐다.

화면 너머.

카이로 왕국을 대표하는 실세들이 모여 있었다.

국왕은 말할 것도 없었고, 베네딕트 후작은 중앙 정부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눈도장을 찍어야만 하는 인물.

그리고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에 대해서도 익히 들었다.

만약 이 자리를 통해 저들의 마음에 든다면, 헨리 앨버트는 중앙 정부 입성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일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상황을 보고하라는 국왕의 말에, 헨리는 열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과 저는 남부 훈련소의 동기였습니다. 제5 방어선의 예비 진지로 배정받고 이동하는 길에, 갑자기 헥토르 왕국이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저와 로만 드미트리 님은 전력을 다해 제5 방어선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잠깐. 처음부터 설명할 셈인가? 곧바로 본론을 말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긴장한 탓에 말이 길었다.

숨을 크게 골랐다.

그리고는, 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중앙 정부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산에서의 게릴라 전투. 그건 정말 대단한 작전이었습니다.]

밤새 벌어진 전투.

헨리 앨버트가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 * *

헨리 앨버트는 운이 좋았다.

크리스의 부대에 합류해서 목숨을 구한 그는, 앞으로의 작전을 듣고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고?!”

“들은 대로입니다. 우리는 헥토르 왕국을 산으로 유인해 싸울 생각입니다.”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헥토르 왕국은 다섯 개의 최전방 방어 진지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어. 최소 1만 이상의 병력을 끌고 왔을 것이 분명한데, 곧바로 산을 넘어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서 그들과 싸우겠다고? 미쳤네. 완전히 미쳤네. 내 장담하는데, 적에게 꼬리를 붙잡히는 순간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학살을 당하고 말 거야.”

솔직한 심정이었다.

말이 게릴라 작전이다.

아무리 산의 지형지물을 이용한다지만, 압도적인 전략 차이를 이겨 낼 전략은 존재하지 않았다.

속이 탔다.

헨리 앨버트는, 크리스를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더니 말했다.

“……내가 정말 은인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조언인데. 이대로 나와 같이 산을 넘어서 도망치는 게 어때? 인생은 길어. 네가 충성심이 대단하고 그런 건 정말 잘 알겠는데, 난파선(難破船)인지 알면서도 끝까지 남는 건 멍청하고 미련한 거야. 내가 가문으로 복귀하면 너를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해 줄게. 크리스라고 했나? 제발 현명한 판단을 내렸으면 좋겠어.”

우뚝.

크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기세가 돌변했다.

그래도 방금까지는 귀족으로서 대우해 주던 그가, 헨리 앨버트의 목덜미를 콱 틀어쥐었다.

“커억.”

“개수작 부릴 생각이면 여기서 꺼져. 우리는 그 누구도 도망치지 않아. 네 말처럼 미련한 선택으로 헥토르 왕국에 학살을 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주군의 곁에 끝까지 남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아. 우리가 주군을 배신할 일은 절대 없다고, 알아들었어?”

“……알겠어.”

자존심을 버렸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목덜미를 놔 주는 크리스의 행동에, 헨리 앨버트는 정말 이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대체 로만 드미트리가 뭐라고 그렇게 충성심을 보이는 거야? 멍청한 녀석들. 만약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는 것 같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녀석들을 버리고 산 너머로 도망쳐 버리겠어.’

그때만 해도.

그게 옳다고 믿었다.

상식의 영역이었고, 로만 드미트리가 대단한 무력을 보유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작전이 시작되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

로만 드미트리가 적들을 학살하는 소리가 들렸다.

산을 울리는 호각 소리와 더불어, 악에 받친 헥토르 왕국 병사들의 목소리가 귀에 선명히 들렸다.

그리고 그때.

크리스의 병력이 움직였다.

“공격해!”

“적들을 공격하라!”

기습 공격.

작전이 적중했다.

진법의 능력은 상대의 허를 찔렀고, 크리스를 비롯한 병사들의 압도적인 무력이 헥토르 왕국을 일방적으로 도륙해 버렸다.

헨리 앨버트는 눈이 팽팽 도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이들은 이름 하나 알려지지 않은 일반 병사일 뿐인데, 그들이 보여 주는 무력은 자신의 상식과 달랐다.

학살.

적들을 압도했다.

그리고는 다시 안전한 장소로 도망치는 전략에, 헨리 앨버트는 얼떨결에 같이 그들을 따라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경악의 연속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진법의 효과와 로만 드미트리를 비롯한 그 수하들의 압도적인 무력. 헨리 앨버트가 걱정한 조금이라도 나빠지는 상황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다.

로만의 수하들은 최대한 안정적으로 적을 공격했고, 가장 최전선에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홀로 날뛰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심장이 뛰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보다도 더 괴물이라는 사실에, 헨리 앨버트는 외삼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헨리. 특별히 너를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제5 방어선의 예비 부대로 편성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명심해. 이번 문제는 이 외삼촌의 미래가 달린 매우 중대한 문제고, 아무리 조카라 할지라도 일을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거물로 성장할 그에게 잘 보이는 것이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그때만 해도 완벽하게 수긍하지 못했는데, 일련의 상황을 경험하며 헨리 앨버트의 생각이 바뀌었다.

‘삼촌의 말이 옳았어.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 왕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서 명성을 떨칠 재능이야. 앨버트 가문이 그런 존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금밖에 없어.’

로만을 향한 반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목숨을 걸었다.

헨리 앨버트도 크리스의 병력과 같이 적들을 공격하면서, 어떻게든 좋은 이미지를 심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

통신을 맡은 헨리 앨버트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헨리 앨버트가 말했다.

[이번 작전은 전적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의 생각이었습니다. 헥토르 왕국의 레인저 부대가 남부 훈련소를 공격한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로만 드미트리 님은 그들이 ‘워프 게이트’를 노린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곧바로 산으로 올라가 비밀 진지를 확보했습니다. 사실 그때 최전방 방어 진지의 지휘관들이 로만 드미트리 님의 경고를 들었더라면, 일은 쉽게 풀렸을지도 모릅니다.]

모자란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로만을 띄웠다.

헨리 앨버트는 근처에서 로만의 수하들이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홀로 게릴라 작전을 통해 수백의 적을 도륙했습니다. 헥토르 왕국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를 처리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산으로 진군했고, 그렇게 산에서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때의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일만에 달하는 병력이 산의 어둠을 밀어내며 무섭게 진군했지만, 로만 드미트리 님은 홀로 그들을 도륙하는 괴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덕분에 저희로서는 손쉽게 기습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적들의 시선을 끌고 혼란을 일으키면, 저희는 몸을 숨겼다가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떨리던 몸이 진정되었다.

그때의 순간.

그곳에 같이 있었다는 사실이, 헨리 앨버트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부여했다.

[날이 밝도록. 저희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필두로 끝까지 싸웠습니다. 그분이 선두에서 저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기에, 저희는 불리한 싸움임을 알면서도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새 수백의 적을 죽였습니다. 겨우 이백의 병력이, 수십 배에 달하는 적들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죠.]

화면 너머.

경악으로 얼룩진 귀족들의 표정이 보였다.

자신의 판단은 옳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거물로 성장할 인물이었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입에 꿀을 발랐다.

마치 로만의 충직한 수하인 것처럼.

헨리 앨버트는 당당하게 말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남부 전선에 버티고 있는 이상, 우리는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저희는 끝까지 헥토르 왕국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발언.

그건 정말이지, 헨리 앨버트 본인으로서도 완벽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 *

통신이 끝났다.

회의실.

침묵이 맴돌았다.

다니엘 카이로를 비롯한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보고에 따르면, 헥토르 왕국은 일만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남부 전선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적들을 상대로 승리하다니. 우리가 나약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악조건에서도 끝까지 투쟁했는데, 카이로의 수뇌부라는 사람들은 미리 포기할 생각부터 했습니다.”

다니엘 카이로였다.

그가 자조 섞인 발언을 내뱉었다.

일평생.

그는 패배자로 살았다.

항상 약자의 입장이었기에, 승리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었다.

베네딕트 후작도, 경악한 얼굴로 말을 보탰다.

“국왕 폐하의 말이 옳습니다. 헥토르 왕국이 워프 게이트를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부터, 저희는 승리의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정신적으로 패배를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 왕국의 저력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남부 전선에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카이로의 영웅이 있었고, 지금부터는 그가 살려 준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만 합니다.”

“옳습니다. 당장 남부 전선으로 추가 병력을 보내시지요. 이 기회에, 감히 국경을 넘은 헥토르 왕국을 단죄(斷罪)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국제 사회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결정은 금방 내려졌다.

단 한 번의 승리.

승리의 불길이 살았다.

다니엘 카이로는, 모두의 의견대로 전쟁을 선택했다.

“헥토르 왕국과의 협상은 결렬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극악무도한 무리를 처단하고 카이로 왕국의 자존심을 되찾을 것입니다!”

전쟁.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이제, 헥토르와 카이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렇게 끝난 회의.

다니엘 카이로에게 전쟁을 요구하던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안색을 바꾸었다.

“지금 당장 가문의 가신들을 소집하라.”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정보를 모두 가져와라.”

“다른 세력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지금부터는 속도가 생명이다.”

베네딕트, 덴버, 그레고리.

그들의 생각은 같았다.

동상이몽(同牀異夢).

겉으로는 남부 전선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진짜 목적은 단 하나의 존재에 고정되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향한 욕망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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