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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105/615)

105화 끝나지 않은 전쟁 (2)

전투가 끝난 직후.

로만은 생각에 빠졌다.

‘이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다.’

미지의 세계.

직접 경험한 마법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읽으며 마법이 어떤 것인지, 그에 대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떠올렸었다.

그러나 머릿속의 지식과 현실은 느낌이 달랐다.

마법사의 손길에 대자연이 반응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뱀처럼 움직이는 나무줄기와 강렬한 불길은 상상을 넘어섰다.

주술과는 다른 영역.

대단했다.

자연의 기운을 이용하는 같은 뿌리를 두고, 무림은 무공을 발달시켰다면 이 세상은 마법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었다.

‘마법은 내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세계다. 만약 에드윈 헥토르가 훨씬 대단한 마법사였다면. 나는 전력을 다하고도 살아서 도망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나는 천마 백중혁으로서의 무공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섣부른 판단은 나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에드윈 헥토르와 버틀러의 협공.

위험한 순간이었다.

에드윈 헥토르의 마법은 예상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로만을 공격했고, 버틀러는 새로운 세상에서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강자였다.

천마검법 전반부 3초식.

끝장낼 생각으로 사용한 공격도 버틀러를 상대로 막혔고, 곧바로 시도되는 반격에 잘못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로만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그때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전장.

그곳에서 안전을 바라는 것은 사치다.

천마 백중혁은 수많은 사지를 넘어서면서 정점의 자리에 올랐고, 그건 지금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목숨을 거는 경험이 필요했다.

능력이 부족해서 죽어 버린다면 결국 그 정도의 그릇밖에 되지 않는 것이고, 시련을 이겨 내고 살아남는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음을 알았다.

피가 끓었다.

새로운 세상에도 넘어서야 할 산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할 수 없었다.

“크리스.”

“말씀하십시오.”

“헥토르 왕국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자존심의 싸움이 아니라, 헥토르의 명운이 걸린 문제다. 아마도 하루 정도의 휴식을 취한 뒤에 남부 전선의 방어 진지를 빠르게 정리하려고 들겠지.”

“그렇다면 곧바로 병력을 준비시킬까요?”

“아니.”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 헥토르.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자신의 무력을 경험했음에도 전쟁을 속행한다면, 그건 충분한 대비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밤새 처리한 적은 일부에 불과하다. 헥토르 왕국은 여전히 남부 전선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고, 섣불리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는 적들에게 당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카이로 왕실은 분명히 본대를 보내 헥토르 왕국을 토벌하려 할 테니, 그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했다.

다른 남부 전선 사람들의 안위?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들을 살리겠다고 목숨을 거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너무나도 멍청한 판단이었다.

‘남부 전선의 지휘관들은 내 조언에도 불구하고 성에 남는 것을 택했다. 지금부터는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열흘 동안 버텨 준다면 그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모두 정리된다고 할지라도 대세에 큰 영향은 없다. 애초에 카이로의 본대가 후방 진지를 함락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나는 그때까지 전력을 유지하다가, 판이 깔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결정을 내렸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를 뒤로하고.

로만은 산을 올랐다.

“당분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겠다.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절대 내 시간을 방해하지 마라.”

그것이.

크리스가 기억하는 로만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 * *

진법을 사용했다.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낸 로만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冥想)에 빠졌다.

‘에드윈 헥토르. 그는 내가 공격하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거미처럼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숨을 골랐다.

의식이 깊게 내려앉았다.

오감이 옅어지며, 주변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이 거짓되게 변했다.

‘시작은 강렬한 불길이었다.’

번뜩.

눈을 떴다.

눈앞에.

강렬한 불길이 일어나며, 그대로 로만을 덮쳤다.

“인페르노.”

화륵.

화르르르륵.

피부가 닿는 순간 단번에 녹아 버릴 정도의 열기.

로만은 빠르게 피했다.

그때.

기억 속의 모습처럼, 에드윈 헥토르는 메모라이즈 마법을 사용해 로만을 몰아붙이려 했다.

‘만약 이때 틈을 주지 않고 공격했다면?’

콰르르릉.

마나를 일으켰다.

폭발적인 움직임.

순식간에 상대의 공간을 파고들었고, 바로 앞에서 불길이 타오르는데도 간결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모두 흘려 버렸다.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했다.

살갗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마나로 피부를 보호함으로써 직접적인 피해는 막았다.

그리고는.

‘섬전(閃電).’

번뜩.

극한의 쾌검.

검에서부터 오라의 기운이 일어나며,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에드윈 헥토르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공격은 먹히지 않았다.

에드윈 헥토르는 자신의 마지막 일격을 피했던 것처럼 블링크로 자취를 감추었고, 공격 직후에 드러난 허점을 버틀러가 놓치지 않았다.

순간 몸이 크게 흔들렸다.

에드윈 헥토르가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버틀러가, 5성의 오라를 극성으로 끌어올려서 로만을 공격한 것이었다.

콰앙!

콰콰쾅!

대기가 뒤흔들렸다.

확실했다.

버틀러는 지금의 로만보다 한 수 위였다.

상상 속의 존재인데도 그 압박감은 생생했고, 로만은 보법을 밟아 가며 버틀러의 공격에 대항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에드윈 헥토르의 마법이 작렬했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후퇴를 하는 것이 옳건만, 로만은 자신의 경험과는 다른 판단을 내렸다.

‘이때다.’

공격의 틈.

그 공간을 파고들었다.

천마신공을 일으켜, 버틀러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 결과.

서걱!

툭.

데구루루.

로만의 목이 날아갔다.

로만이 경험한 버틀러라는 존재는, 이 정도의 공격은 충분히 반응하고 역으로 반격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것이 상상의 결론이었다.

주변이 다시 처음처럼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눈앞에는 에드윈 헥토르가 인페르노를 사용하고 있었고, 시야를 가득 메우는 뜨거운 불길에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했다.

반복되는 선택.

계속해서 죽었다.

상상의 세계에서.

로만은 경우의 수를 반복했다.

승패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콰앙!

화르르르르륵!

불길에 휩싸였다.

몸이 타오르는 고통은 실제와 똑같았지만, 로만은 자신의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의 나는 절대적이지 않다. 무림에서의 말년은 너무나도 따분한 시간이었다면,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헥토르 왕국 제일의 강자도 아닌 버틀러를 상대로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어쩌면 나는 이런 상황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강자. 나는 안락(安樂)한 삶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웃었다.

삶의 밑바닥에서 정점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한때는 평범했을지도 모르는 아이가, 자극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평범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불길을 뚫고, 로만은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상상 속의 전투.

얼마나 반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싸울 뿐이었다.

상대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자신의 공격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직접 경험했던 기억에 따라 수많은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 쌓였다.

공격이 매번 실패했던 것은 아니다.

로만이 둘을 모두 베어 버리고 승리했던 상황도 있었지만, 로만은 만족하지 않고 다시 한번 상황을 반복했다.

약육강식의 세계.

그곳에서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적들을 만날 때면, 백중혁은 끊임없이 되새기며 상대를 쓰러트릴 다양한 방법을 떠올렸다.

훅!

에드윈 헥토르를 공격했다.

그건 함정이었다.

버틀러의 충성심을 유도했고, 득달같이 막아서는 버틀러의 허점을 노려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다.

푹!

“커억.”

비명을 질렀다.

버틀러는 몸을 비틀거리다가 쓰러지고 말았고, 혼자 남은 에드윈 헥토르는 로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둘을 모두 베어 버렸다. 헥토르의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로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다음 상황.

반대로 에드윈 헥토르의 공격을 이용했다.

버틀러를 충분히 끌어들이고, 에드윈 헥토르의 마법이 버틀러에게 작렬하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퍼엉!

화르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버틀러가 불길에 휩싸이자, 로만은 그의 목을 날려 버렸다.

수도 없이 반복되는 행위.

모든 경우의 수가 쌓였다.

그건 실제와 다를 수도 있다.

실제의 적은 그보다 더한 저력을 갖추었겠지만, 적어도 경험했던 순간의 파훼법을 차곡차곡 알아 갔다.

마침내.

서걱!

가장 짧은 시간에 상대의 목을 날려 버렸다.

숨을 골랐다.

원하는 만큼의 경험이 쌓이자, 의식이 다시 표면 위로 올라오며 주변의 모습이 원래대로 변했다.

그런데.

로만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상상 속에서 일어난 전투인데도, 온몸에 붉게 달아오른 상처들이 남았다.

고통이 밀려왔다.

메마른 입이 쩍쩍 갈라졌지만, 로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다시 돌아갈 때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 *

로만의 복귀에.

크리스는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주군의 예상대로 헥토르 왕국은 곧바로 남부 전선의 최전방 방어 진지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겨우 하루 만에 제3 방어선과 제4 방어선이 무너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 방어선도 적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헥토르 왕국은 전쟁 물자를 모두 챙긴 뒤에 후방 진지로 집결했습니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결사의 항전을 하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농성(籠城).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로만으로서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결과였지만, 헨리 앨버트의 경우에는 달랐다.

“로만 님. 지금 카이로 왕실이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카이로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남부 전선의 방어 진지들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채 3일도 버티지 못하고 모두 무너져 버렸습니다. 남부 전선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희의 목숨도 위험합니다.”

곧.

카이로의 본대가 도착한다.

하지만 이미 헥토르 왕국은 수성 준비를 끝냈고, 지금부터는 희생을 피할 수가 없었다.

“카이로 왕실이 로만 드미트리 님과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는 할 만큼 했습니다. 그러니, 뒷일은 카이로의 본대에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성전은 희생이 불가피한 싸움입니다. 헥토르 왕국이 절벽 끝에 몰렸다면, 분명히 혼자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혹시라도.

로만이 혼자 무엇을 하겠다고 말할까 봐 불안했다.

어떻게든 로만의 곁에 남겠다고 결심한 그로서는, 최대한 로만이 안전한 선택을 하기를 바랐다.

약 일주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전세(戰勢)가 변했다.

로만이 말했다.

“왕실과의 통신을 연결하거라.”

일단 지금은.

일주일간 애가 탔을 카이로 왕실과 대화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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