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615)

106화 끝나지 않은 전쟁 (3)

마법 통신이 연결되었다.

임시방편으로 설치한 스크린에,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부 전선의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화면 너머.

다니엘 카이로를 비롯한 카이로 왕국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은 로만의 얼굴을 확인하자, 눈빛에서부터 드러나는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남부 전선의 최전방 방어 진지들이 모두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동안 뭘 하고 있었지?”

다니엘 카이로였다.

일주일간의 공백.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유일하게 전투에서 승리한 존재였는데, 전세가 뒤바뀌는 상황에도 아무런 대응도 보여 주질 않았다.

그의 전공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끊겨 버린 통신과 그 이후 벌어진 상황은,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로만이 말했다.

[일주일 동안 전력을 재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전력의 재정비라. 헥토르 왕국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너의 결정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동안 남부 전선의 세 개의 방어선이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전쟁이란 항상 완벽할 수 없는 곳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전열을 가다듬고 그들을 도와줄 수는 없었던 것인가?”

[솔직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헥토르 왕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 따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부 전선을 압도하는 전력을 갖추었습니다. 다행히도 산의 지리적인 이점과 어둠을 이용하여 적들의 공격을 맞받아칠 수 있었지만, 평야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력을 지키는 방향으로 결정했습니다. 남부 전선의 지휘관들이 제 조언과는 달리 성문을 걸어 잠근 순간부터, 저로서는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습니다.]

담담했다.

이유를 따져 묻는 물음에도.

로만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멀리서 전장을 지켜보는 사람들이야 말이 쉽겠지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다.

그리고.

단번에 자신의 선택을 이해시킬 방법도 알았다.

[헥토르 왕국은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헥토르 왕국의 랭킹 2위인 버틀러가 전쟁에 참전했고, 적들의 지휘관인 에드윈 헥토르 왕자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마법사는 평야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싸울 무대는 지금이 아니라, 카이로의 본대가 도착했을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다니엘 카이로가 눈을 부릅떴다.

버틀러와 에드윈 헥토르.

익숙한 이름이었다.

버틀러는 헥토르 왕국을 대표하는 검사로서 명성을 떨쳤고, 에드윈 헥토르는 다니엘 카이로와는 다르게 왕의 자질을 타고난 인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런 에드윈 헥토르가, 알고 보니 마법사였다니.

충격적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카이로의 수뇌부들도, 로만이 밝힌 사실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로만의 판단이 옳다. 헥토르 왕국이 5성의 검사와 마법사를 동원했다면, 지금 남부 전선의 전력으로는 승산이 없다.’

‘버틀러가 참전했다니.’

‘헥토르 왕국이 정말 사활을 걸었구나.’

문득.

그들은 새삼스럽게 로만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버틀러와 마법사를 상대로도, 로만은 게릴라 작전을 통해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것이지 않은가.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이었다.

훗날 대륙으로 뻗어 나갈 재능을 바라보고 있자니, 귀족들의 눈빛이 탐욕이 물들었다.

“국왕 폐하. 전쟁의 영웅을 더 추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남부 전선에서 유일하게 헥토르 왕국을 물리친 인물입니다. 그가 전력을 재정비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면, 현장의 판단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말을 덧붙였다.

명백히 다니엘 카이로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익숙했다.

다니엘 카이로는,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분노를 삭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더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의 본대는 곧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헥토르 왕국은 이미 후방 진지에서 수성 준비를 끝마쳤을 테니, 우리도 충분한 준비를 끝낸 뒤에 적들을 공격하도록 하겠다. 너는 그때 본대에 합류해, 그들을 도와주도록 해라.”

[죄송합니다만,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로만의 발언.

의문스럽다는 눈빛을 보였다.

헥토르 왕국이 후방 진지에 틀어박힌 순간, 로만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카이로의 본대가 도착하고 길어야 3일입니다. 그 안에 후방 진지를 무너트리지 못한다면, 헥토르 왕국은 분명히 ‘크로노스 제국’과 같은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말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 * *

헥토르 왕국.

그들은 벼랑 끝에 몰렸다.

그런데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부 전선의 방어 진지들을 빠르게 무너트리고, 후방 진지에서 결사의 항전을 하는 방법을 택했다.

‘적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과 최악은 무엇인가?’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의 시각에서 생각했다.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카이로가 순순히 협상에 응해 준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자신의 존재로 인해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로만은 무전을 통해 헥토르 왕국의 속셈을 낱낱이 밝혀 버렸다.

헥토르 왕국은 최악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협상 결렬 이후의 해결책이 필요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던 협박.

네크로맨서의 독을 뿌려 남부의 땅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되지 않는다.

헥토르 왕국이 살아남을 길.

그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헥토르 왕국이 이번 전쟁을 계획한 목적은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카이로 왕국에 원한을 가진 것도, 그렇다고 남부의 땅을 차지하길 바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관리해야 할 땅이 늘어 버린다면 나라의 부담만 늘겠지요. 헥토르 왕국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런데도 결사의 항전을 택했다면, 그들은 본인들의 상황으로 명확한 결과물을 얻길 바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헥토르의 별.

그는 계획 없이 일을 진행할 인물이 아니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남부 전선에 남았다면, 그 선택에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후방 진지에는 다수의 사람을 순간이동 시킬 수 있는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워프 게이트는 매우 편리한 마법 문명이지만, 전쟁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으니 유사시에 반드시 파괴해야만 합니다. 남부 전선은 기습적인 공격에 워프 게이트를 빼앗겼습니다. 만약, 헥토르 왕국이 그 워프 게이트를 대가로 크로노스 제국과 거래를 한다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헥토르 왕국은 우리에게 받으려던 보상을 얻을 수 있을 테고, 크로노스 제국은 남부 전선을 기점으로 카이로 왕국을 압박할 수 있는 또 다른 거점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런.”

충격에 빠졌다.

다니엘 카이로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설마.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카이로 왕국이 명백히 유리한 싸움이라 생각했는데, 예상하지도 못한 변수가 숨통을 콱 틀어막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가 승리를 확신할 때.

로만 드미트리는 유일하게 변수를 예상했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수뇌부들은 로만을 완전히 인정했고, 그의 말 한마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로만이 말했다.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전쟁은 단순하다.

결국.

[정공법(正攻法). 3일 안에, 후방 진지를 함락시키면 됩니다.]

상대를 무너트리는 순간,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 * *

로만의 예상은 옳았다.

남부 전선을 손아귀에 넣은 에드윈 헥토르는, 곧바로 크로노스 제국에게 연락을 넣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카이로 왕국의 남부 전선을 크로노스 제국에게 판매하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남부 전선의 핵심은 후방 진지에 있는 워프 게이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온전한 상태로 점령한 상황이고, 적절한 대가만 받는다면 팔 의향이 있습니다.”

워프 게이트.

마법의 정수다.

에드윈 헥토르가 기습 공격을 위해 설치한 워프 게이트는 적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낮은 등급의 워프 게이트라면, 남부 전선에 있는 것은 설치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상급의 워프 게이트다.

그것을 차지한다면.

로만이 마법 통신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크로노스 제국은 서부 전선과 더불어 남부 전선에도 거점을 확보해 카이로 왕국을 압박할 수 있다.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군요.]

화면 너머.

크로노스 제국 소속의 하디드 백작이 웃었다.

[하지만 지금 바로 헥토르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카이로 왕국은 남부 전선을 되찾으려고 발악할 것입니다. 남부 전선을 확보하는 것은 좋으나, 우리가 그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와의 거래를 희망한다면. 약 한 달 정도는 후방 진지를 완벽하게 점령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십시오. 한 달 동안 후방 진지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헥토르 왕국과의 거래를 응해 그만한 ‘대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크로노스 제국.

그들은 영악했다.

지금 당장 제안을 받아들여도 이득이건만, 최대한의 이득을 보려고 상황을 주도했다.

그걸 알면서도.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안을 승낙합니다. 한 달 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툭.

통신을 끊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크로노스 제국과 같은 거물이, 헥토르 왕국이 바라는 대로 순순히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잭슨.”

“예.”

“지금 당장 헥토르 왕실에 연락해라. 현재의 전력으로는 한 달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없다. 헥토르 왕국의 워프 게이트를 후방 진지의 워프 게이트와 링크(link)해서, 한 달을 버틸 인력과 물자를 확보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카이로 왕국.

그들도 전력을 다해 후방 진지를 공격할 것이다.

미리 플레어와 같은 공성 병기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지만, 그렇다고 한 달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거리가 멀수록 링크는 더욱 어려워진다.

최소 3일.

헥토르의 워프 게이트와 링크할 시간만 번다면, 벼랑 끝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쟁. 패배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나는 반드시 희망을 안고 헥토르 왕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왕가의 숙명.

그 무거운 짐을, 에드윈 헥토르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 * *

딱 열흘.

예정된 시간이 되었다.

남부 전선에 도착한 카이로의 본대는, 멀리서 펄럭이는 헥토르의 깃발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빌어먹을 녀석들.”

“감히 카이로의 영토에 헥토르의 깃발을 꽂다니. 내 반드시 찢어 죽이리라.”

본대의 지휘관.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그는 후방 진지가 보이는 곳에 거점을 설치하더니, 수뇌부들을 지휘관 막사로 불러들였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수뇌부들.

그런데 그들은, 파비우스 백작을 보고도 크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겨우 남부 전선에 파견되는, 실익도 크게 없는 전쟁에 중앙 정부의 인물들이 직접 행차하다니. 그만큼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다는 의미겠지. 이번 전쟁은 헥토르 왕국을 무너트리는 것만이 목적인 싸움이 아니다.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또한.

베네딕트 후작의 사람이었다.

오른쪽에 앉은 탈레스 남작은 크로노스 제국, 왼쪽에 앉은 브라힘 남작은 발할라 제국의 사람이었다.

장외 전쟁.

그들은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

최대한 로만을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길 바랐다.

파비우스 백작이 말했다.

“다니엘 국왕 폐하는 로만 드미트리가 합류한 이후, 그와 상의해서 헥토르 왕국을 무너트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회의는 그가 도착한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펄럭.

문이 열렸다.

남부 전선의 영웅.

이번 회의의 주인공인 로만 드미트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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