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벼랑 끝에서 (1)
로만 드미트리.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름이다.
파비우스 백작은, 다른 귀족들이 나서기 전에 한발 먼저 로만을 반겨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헥토르 왕국을 물리친 카이로의 영웅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방긋 웃었다.
로만을 껴안기라도 할 것 같은 격렬한 반응에, 선수를 빼앗긴 다른 두 귀족이 다급하게 말했다.
“소문보다 훨씬 훤칠하시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웬 미남자가 나타나서, 순간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멀리서 보면 상당히 즐거운 자리처럼 보이겠지만, 세 귀족은 서로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는 뻔히 보였다.
카이로를 사분하고 있는 중앙 정부의 귀족들이, 실익이 없는 남부 전선까지 내려온 것은 의도가 명백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모시는 주인이 말했다.
“남부 전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 일단 로만 드미트리의 환심을 사는 것이 우선이다. 헥토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도 그 책임은 왕실로 돌아가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다른 귀족파에게 빼앗긴다면 힘의 균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5성 검사 버틀러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은 놈이다.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특명(特命)이 떨어졌다.
파비우스 백작은 힐끗 로만의 얼굴을 살폈다.
입바른 말이 아니었다.
대단한 행보를 보여 주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가, 이 정도로 젊은 외모를 보유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의 나이는 이제 겨우 20대 중반. 게다가 동북쪽 일대에서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는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이다. 평민 출신 가문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중앙 정부에 입성할 인물로 모자람이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재를 내가 끌어온다면, 베네딕트 후작님은 앞으로 나를 더욱 중요하게 사용하시겠지.’
이번에도.
선수를 친 것은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여기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베네딕트 후작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베네딕트 후작님의 말로는 로만 드미트리 님과 연이 있어서 직접 남부 훈련소로 연결해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전쟁의 기미를 예상하지 못해서 배려를 해 주었던 것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별말이 아닌데도.
파비우스 백작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베네딕트 후작님은 마음이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주십시오. 혹시라도 로만 드미트리 님이 위험해지실까 봐,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카이로를 빛내실 별인데, 이런 곳에서 다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회의.
주제를 잃었다.
헥토르 왕국을 무너트리는 것에 대해 논의해야 하건만, 파비우스 백작은 그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건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욕심을 드러내는 모습에, 그들도 말을 덧붙였다.
“그레고리 백작님이 한번 연락하기를 바랍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매우 유용한 연락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덴버 백작님이 가문의 병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 님의 명령을 따를 것이고,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유용하게 사용해 주십시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한 덴버 백작님의 작은 호의입니다.”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준비해 두었던 카드를 꺼내며, 다들 로만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당연히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리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로만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지금 대체 뭣들 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아직 로만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 * *
그동안.
로만은 단 한 번도 자신의 행보를 숨기지 않았다.
존재감을 드러냈고,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송곳에 다들 욕심을 보이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네 개의 세력.
네 번의 회유.
적절했다.
권력자들의 관심을 이용해 성장할 시간을 벌 생각이었으나,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로만이 말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를 찾아온 이유를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베네딕트 후작님, 그레고리 백작님, 덴버 백작님. 다들 저를 찾아와 충성을 요구했고, 저는 결단을 내리지 못해 그 선택을 미루어 두었습니다. 한 번의 충성은 평생을 약속합니다. 그렇기에 저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호의는 정말 감사한 일이나, 이건 아닙니다. 카이로 왕국을 공격한 적들이 코앞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토에 깃발을 꽂고 보란 듯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데,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저의 거취를 논의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로만은 자신의 발언이 오히려, 상대의 욕망에 불을 붙이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경쟁을 표면 위로 드러내고 나는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내가 섣불리 선택하지 않는 충직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상대를 애타게 만들겠지. 네 개의 세력과는 항상 적절한 간격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나를 포기할 수 없도록. 나를 어떻게든 차지하고 싶도록. 그리고 언제 결정을 내릴지 명확하게 말해 준다면, 저들로서는 내가 뭐라 말하든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판을 휘어잡았다.
당황하는 귀족들.
그들에게 확실한 임팩트를 선보였다.
“이번 전쟁을 경험하면서 저는 제가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헥토르 왕국을 물리치고 나면. 저는 카이로 제일(第一)의 검이 되기 위해 랭킹전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 자신을 증명하고, 제 검을 한 사람에게 바치겠습니다.”
카이로 제일의 검.
매력적인 카드였다.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은 욕망으로 들끓는 눈빛을 보였다.
섣부르게 말을 내뱉진 않았다.
로만이 지금은 그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들은 이걸 주군에게 어떻게 보고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니.”
촤르륵.
지도를 펼쳤다.
논점을 돌리고, 귀족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치열한 경쟁은 잠시 미루어 두었다.
로만의 제안에, 그들은 본격적으로 헥토르 왕국을 공격할 방법을 구상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경고한 대로라면 우리는 3일 안에 후방 진지를 점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공법. 플레어로 성벽을 무너트리고, 사다리를 성벽에 걸어 정면에서 승부를 보면 됩니다. 헥토르 왕국의 병력은 일만 남짓한 정도. 우리가 이만의 병력을 끌고 왔으니, 정면에서 싸운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가장 단순한 전략이니만큼, 명백한 문제점도 있었다.
브라힘 남작이 말했다.
“머릿수로 밀고 들어가는 방법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임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군의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헥토르 왕국은 분명히 플레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웠을 것이고, 수성은 적은 인원으로도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싸움입니다. 혹시라도 공성에 실패한다면. 그때는 3일 안에 끝내기는커녕,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런 단순한 방법 말고,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을 전략이 필요합니다.”
의견이 분분했다.
확실한 해결책은 없었다.
결국.
성을 함락시키는 싸움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단단한 성벽을 무너트리고 피해 없이 일만에 달하는 적들을 물리칠 방법은 떠오르질 않았다.
피해가 불가피한 싸움이었다.
그래도 전략 회의의 의미를 살려서 기발한 해결책을 찾기를 바랐지만, 회의가 진행될수록 처음 말했던 전략으로 의견이 점차 기울어졌다.
파비우스 백작이 물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순간.
다들 기대 어린 시선을 보였다.
이백으로 일만을 물리친 명장.
로만 드미트리라면, 왠지 자신들과는 다른 해결책을 말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도 여러분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후방 진지는 애초에 남부 전선 최후의 보루로서 요새화(要塞化)를 시킨 장소고, 그곳을 빼앗긴 순간부터 장기전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적들은 워프 게이트를 통해 다양한 변수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실망한 기색이었다.
로만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진 만큼, 평범한 대답을 말하는 정도로는 기대감이 충족되질 않았다.
그들에게 말한 것처럼.
상황적인 해결책은 없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전쟁을 빠르게 종결시킬 두 가지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전략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상황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전략이 통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전면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로만의 설명.
처음에는 의심쩍은 표정을 보이던 귀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만의 설명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 * *
뎅뎅뎅-
전쟁을 알리는 소리였다.
카이로 왕국이 병력을 움직였다는 보고에,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성벽 위로 올라갔다.
“자리를 고수하라!”
“적들이 오고 있다!”
저 멀리.
카이로의 깃발이 보였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들의 모습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식량을 구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 무게가 두려움을 억눌렀고, 공성전(攻城戰)은 지키는 쪽이 유리한 싸움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척척척.
성벽 위에 정렬했다.
궁수들은 화살에 활을 먹이고, 언제든 카이로 왕국을 공격할 준비를 끝냈다.
“대기.”
에드윈 헥토르.
그가 손을 들었다.
아직 적들은 사정거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멀리서 화살을 발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소모기에, 그는 침착한 얼굴로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눈앞에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카이로 왕국의 병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곳에서 플레어와 같은 마법 병기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웬 사람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게 무슨.’
처음에는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혹시 전령일까?
카이로 왕국이 의사를 전달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순간.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에드윈 헥토르에게 크나큰 존재감을 남겼다.
밤새 칠백에 달하는 병사들을 학살했고, 자신과 버틀러의 협공에도 끝까지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존재.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상대가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공격할 준비를 끝냈다.
한 걸음.
한 걸음.
로만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마나를 끌어올리면서 공격할 준비를 하는 그때, 로만이 마나를 실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카이로 왕국의 로만 드미트리다! 나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 왕국을 대표하는 전사로서 헥토르 왕국의 버틀러에게 대결을 신청하는 바이다!”
우뚝.
모두가 굳어 버렸다.
그 말은.
헥토르 왕국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