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벼랑 끝에서 (2)
첫 번째 방법.
한 시간 전.
로만은 귀족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헥토르 왕국은 지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워프 게이트를 활용해서 아군의 지원을 받든, 크로노스 제국을 끌어들이든, 워프 게이트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일의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적들로서는 무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변수가 발생할 선택은 최대한 피하고, 우리의 공격을 맞받아치는 정도로만 싸울 확률이 높습니다.”
성벽 안.
헥토르가 숨어들었다.
높고 단단한 성벽을 단숨에 무너트릴 수 없다면, 적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첫 번째 방법은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대전사의 자격으로 헥토르 왕국에 대결을 신청하겠습니다.”
“무모합니다.”
“헥토르 왕국에는 지금 버틀러가 있습니다.”
귀족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버틀러.
그가 누구인가?
헥토르 왕실 기사단의 단장이자, 기사의 정석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상당히 체계적인 검술과 폭발적인 5성의 오라로 수많은 적을 쓰러트렸고, 평민 출신의 버틀러는 오로지 실력만으로 왕실 기사단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지만, 버틀러는 대륙에서도 그 이름을 알아주는 실력자 중의 실력자였다.
고로.
로만의 대결 제안에, 상대의 선택지는 뻔했다.
파비우스 백작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강하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이백의 병력으로 헥토르 왕국을 물리쳤을 때부터,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의 업적을 무시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버틀러이지 않습니까? 대전사 전투는 양날의 검입니다. 승리했을 때는 기세를 얻어 상대를 단숨에 무너트릴 수 있겠지만, 패배한다면 그 충격은 어떻게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버틀러입니다. 5성의 검사를 대체 어떻게 이긴단 말입니까?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의지는 잘 알겠으나,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견이 통일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세 귀족이 처음으로 뜻을 모아서 로만을 설득했다.
그들의 반응에.
로만은 웃었다.
“지금 여러분들의 반응 때문에라도 저는 첫 번째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헥토르 왕국.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버틀러의 승리를 확신할 테고,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기에 본래의 목적은 잊어버리고 제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변수의 시작입니다.”
이번 작전.
단순히 대결을 제안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강한 어조로 귀족들의 반발을 억눌렀다.
“저를 믿으십시오. 제가 버틀러를 쓰러트리는 순간, 헥토르의 견고한 성벽에 균열이 생길 것입니다.”
* * *
그리고 현재.
로만의 제안에 헥토르 왕국이 술렁였다.
선뜻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로만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원한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헥토르의 목적에 의해 우리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무의미한 피를 흘리지 않길 바라고, 그렇기에 대전사 전투로 이번 전쟁을 완전히 매듭짓고자 한다.”
당근을 내밀었다.
향긋한 냄새에 반응할 수밖에 없도록.
로만은 그들이 원하는 보상을 말했다.
“만약 이번 대결에서 너희가 승리한다면. 우리는 순순히 헥토르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남부 전선을 대가로,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의 보상을 지급하겠다. 반대로 내가 승리했을 때는 곧바로 카이로의 영토에서 물러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단 하나의 조건이다. 이미 우리는 회의 끝에 결정을 내렸고, 너희들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간에 그 결과에 승복할 것이다.”
웅성웅성.
양측 모두.
난리가 났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파격적인 제안이었고, 그로 인한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버틀러.’
헥토르 랭킹 2위의 검사.
강한 상대다.
로만은 그간 빠르게 발전했지만, 5성의 검사는 아직 로만 드미트리의 육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산에서 벌어진 짧은 전투.
그때의 경험은 버틀러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알려 주었다.
절대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대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호승심이 들끓었다.
‘이번 대결에 목숨을 걸 가치는 충분하다.’
투사(鬪士)의 삶.
안락을 바라지 않는다.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고,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발견했다면 그 상대를 무너트려야만 직성이 풀렸다.
천마 백중혁.
마교의 정점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백중혁이 현재에 안주하고 안락한 삶을 바랐다면, 애초에 12굴에 떨어졌을 때 대장의 머리를 돌멩이로 부숴 버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면 자존심을 버리는 대신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 수 있는 상황에서, 백중혁은 항상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도 같았다.
버틀러가 강한 존재라면.
그를 넘어설 것이다.
그를 짓밟고 나아가, 또다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할 것이다.
로만이 소리쳤다.
“나는 너희들의 생각을 알고 있다. 카이로와의 협상이 결렬된 지금, 너희들은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겠지. 호시탐탐 카이로의 영토를 노리는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막대한 보상을 내주고서라도 남부 전선을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워프 게이트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너희가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피해를 각오하고서라도 3일 안에 후방 진지를 무너트려 버릴 것이다. 감히 카이로의 영토를 침범한 너희를 모조리 학살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제발 죽여 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고문을 가할 것이다.”
채찍이었다.
상대를 궁지에 몰았다.
카이로 왕국의 선택지를 미리 밝힘으로써, 그들의 선택에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말했다.
“정확히 10분 주겠다. 그 안에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
한발 물러났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는.
헥토르 왕국이 선택할 차례였다.
* * *
성벽 위.
헥토르의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목숨을 걸고 저항하겠다고 다짐했건만, 불쑥 튀어나온 생존의 가능성에 다들 한 사람을 보았다.
버틀러였다.
사람들의 시선에.
버틀러는 에드윈 헥토르에게 다가가 말했다.
“싸우겠습니다.”
“불허(不許)한다.”
“지휘관님!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과 거래를 하려 한다는 사실이 발각이 난 지금,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저를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제가 로만 드미트리의 목을 베고, 헥토르 왕국이 살아갈 길을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굳은 의지가 깃든 목소리였다.
버틀러는 등을 떠밀려 나선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헥토르 왕국을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었고, 로만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너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헥토르 왕실 기사단장 버틀러. 너의 실력이라면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사실을 너와 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는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는 애송이가 아니다. 심연(深淵)과 같은 속내는 감히 들여다볼 수 없고, 우리는 밤새 로만 드미트리에게 휘둘리다가 헥토르의 병사 700명을 잃었다. 그는 승리할 확신이 있기에 우리에게 대결을 요청한 것이다. 너를 실력으로 무너트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분명히 계획이 있다.”
로만의 계획은 모른다.
다만.
패배의 경험을 되새길 뿐이었다.
승리를 확신했을 때도 참담한 패배를 맞이했기에, 에드윈 헥토르는 뻔한 함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버틀러가 말했다.
“지휘관님. 아니, 왕자님. 저는 왕실 기사단에 입성한 뒤로 평생을 왕자님을 모시며 살았습니다. 왕자님이 기억하는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패배가 두려워 뒤로 물러나고, 상대의 함정을 미리 걱정해서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겁쟁이였습니까? 로만 드미트리에게 특별한 계획이 있다는 사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헥토르 왕실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제가 경험한 로만 드미트리는 저보다 한 수 아래였고, 그가 무엇을 준비하든 모조리 박살 낼 자신이 있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뜨겁게 들끓어 오르는 목소리로 호소하며, 에드윈 헥토르의 동의를 구했다.
그 열의에.
에드윈 헥토르는 말을 잃었다.
버틀러의 말이 옳다.
지금은 나이를 먹었지만, 혈기왕성한 시절의 버틀러는 그 누구보다도 호전적이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도전.
죽을 위기를 셀 수 없이 넘겼다.
그 과정을 이겨 내고 버틀러는 5성의 검사가 되었고, 대륙에서 인정하는 강자로서 이름을 알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으로는 절대 버틀러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함정을 파서 버틀러를 쓰러트리는 것밖에 없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헥토르 왕국은 명분을 얻는다. 적들의 비겁함을 문제 삼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판을 만들 수 있다.’
머리가 아팠다.
코끝에 매캐한 냄새가 맴돌았다.
병사들을 화장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말이 선뜻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버틀러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헥토르 왕국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하나만 약속해다오.”
“말씀하십시오.”
“이상한 기미가 감지되면 곧바로 도망쳐라.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 그것을 약속해 줄 수 있나?”
“알겠습니다.”
버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빛이 밀려났다.
헥토르의 거인(巨人)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끼익.
문이 열렸다.
앞으로 걸어 나오는 버틀러의 모습에, 전장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한 적막으로 가라앉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로만과 가까워졌다.
마침내 언제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에 도달하자, 버틀러가 말했다.
“내 살면서 수많은 미친놈을 보았지만, 너와 같은 녀석은 난생처음이다. 미리 말해 두지. 나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 무슨 함정을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쭙잖은 마음가짐으로 나선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걸음을 돌려라. 그렇게 한다면 목숨은 살려 주지.”
슥.
검을 뽑았다.
아직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닌데도, 서늘한 기세를 풍겼다.
로만이 웃었다.
“나야말로 한 가지 약속하지. 구구절절한 명분은 사실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산에서 너와 검을 맞닥트렸던 순간. 나는 너와 끝까지 승부를 보길 바랐다. 그때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무대를 만들었다.”
헥토르 왕국.
자신의 제안에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해했다.
이미 한번 당했기에, 선뜻 나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함정 따위는 없었다.
“내게는 검 한 자루가 전부다. 너를 함정에 빠트릴 계획은 존재하지 않고, 나는 오롯이 너와의 승부를 보길 바란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다오. 이 자리에서 날 죽인다면, 너희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순간.
버틀러가 씰룩 웃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났다.
“미친 새끼.”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팍.
파팍!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