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벼랑 끝에서 (3)
사람들은 말했다.
5성의 경지.
그때부터는 대륙에서 강함을 논할 수 있으며, 단 한 명의 무력이 전장의 양상을 뒤바꿀 수 있다고.
콰앙!
콰르르르르릉.
버틀러의 오라가 폭발적으로 휘몰아쳤다.
이번 대결.
명예가 걸린 겉만 번지르르한 승부가 아니다.
헥토르 왕국의 명운이 걸렸고, 버틀러는 처음부터 승부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공간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강력한 공격에 카이로의 귀족들이 눈을 부릅떴다.
로만 드미트리가 세간의 소문보다 한 단계 더 강하다고 할지라도, 버틀러의 일격을 어떻게 막을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그런데.
콰앙!
콰콰쾅!
로만과 버틀러의 검이 격돌했다.
당장에라도 로만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오라는 로만의 검을 뚫지 못했고, 검이 부닥칠 때마다 강력한 충격파가 일어나며 주변을 휩쓸었다.
순간 버틀러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잘해야 4성의 검사이건만, 자신의 오라를 막아서는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보였다.
예상 밖의 상황.
하지만 의문은 접어 두었다.
상대가 생각보다 강하다고 한들, 힘과 힘의 대결에서 버틀러가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단숨에 끝낸다.’
콰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버틀러는 상대의 수비를 개의치 않았다.
머리를 내리찍는 공격을 막으면 한 발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오른쪽을, 오른쪽을 막는다고 로만이 몸을 틀면 다시 반대편을 공략했다.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의 스피드였다.
체내의 마나가 끊임없이 몸을 순환하며, 버틀러가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폭발적인 힘을 부여했다.
타닥!
허벅지가 크게 부풀었다.
오라를 폭발시키며 땅을 박차자, 마치 공간을 한번 접은 것처럼 로만의 시야에 불쑥 나타났다.
콰쾅!
콰르르르릉.
명불허전(名不虛傳).
버틀러의 이름값은 단순한 명성이 아니었다.
수십 년을 검사로서 살아가며 켜켜이 쌓은 업적이었고, 그가 5성의 경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버틀러를 헥토르의 검이라고 인정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일반 검사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폭풍같이 몰아치는 공격에 로만은 연신 밀렸고, 알게 모르게 몸에 상처가 하나씩 생겨났다.
파앗-
피가 튀었다.
살짝 스쳐 지나간 정도인데도, 오라로 보호한 피부가 종이처럼 찢겨 나가며 핏방울을 흩뿌렸다.
그런데도.
로만은 표정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카이로의 귀족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이러다 패배하는 거 아니야?”
로만의 계획.
믿어 달라는 말에 신뢰를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라 할지라도 버틀러를 쓰러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5성의 오라를 버텨 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 대륙에서 명성을 떨칠 재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지만, 만약 버틀러의 검에 머리가 날아간다면 그따위 미래는 의미가 없다.
번뜩.
버틀러의 검.
눈앞에서 사라졌다.
착실하게 궁지에 몰아넣은 뒤에, 상대의 사각(死角)을 노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경악스러울 정도의 반응 속도였다.
이번에는 정말 공격이 먹혔다고 생각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에도 간발의 차이로 버틀러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의구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버틀러는 분명히 자신이 유리한 싸움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검에서 전해져 오는 반발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로만 드미트리가 힘겹게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공수를 주고받을수록 상황이 묘하게 변했다.
‘점점 빨라지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뒤에 다급하게 후속 공격을 막았다.
버틀러는 그때보다 상대를 더욱 강력하게 몰아붙이는데도, 로만의 방어 전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쾅!
콰콰쾅!
빨랐다.
어떻게 공격하든.
로만은 반응했다.
단순히 5성의 오라를 막아 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눈은 정확히 버틀러의 의도를 읽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버틀러는 자신의 의구심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알아챘다.
‘설마 탐색전이라는 건가.’
그렇다.
로만 드미트리는.
감히 5성 검사인 버틀러를 상대로,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 * *
버틀러.
그는 강했다.
겨우 반년의 수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보유했고, 처음으로 힘과 힘의 대결에서 밀린다는 느낌을 받은 상대였다.
드디어 새로운 세상에서의 위치가 보였다.
4성에 오른 호메로스를 단숨에 베어 버렸으나, 아직은 노련한 5성 검사들을 상대로는 확실하게 이길 수 없었다.
벽.
올려다봐야 하는 상대를 맞이했다.
시간이 흐르면 그를 넘어선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오히려 지금 만났기에 로만의 호승심이 들끓었다.
‘버틀러를 무너트리고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목숨을 걸었다.
폭발하는 오라를, 온몸으로 맞닥트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엄청난 위력이었다.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동급의 수준이 아니고서는 막을 수 없는 것이 정상이건만, 신기하게도 로만의 오라는 그런 공격과 부닥치는데도 사그라지질 않았다.
그것은 버틀러와 같은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오라의 사용법이 진리라 믿고 따랐지만, 로만은 그들이 사용하는 방식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라의 폭발. 무분별한 기의 분출은 약점이 명확하다.’
로만의 세상.
오라 검사라고 불리는 이들은 마나를 정교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폭발하듯 힘을 분출했다.
무분별한 힘.
한순간에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방법이라고는 하나, 사방으로 폭발하는 힘은 검의 모든 부분을 일정하게 강화시킬 수 없었다.
단순한 이론이었다.
무림에서는 응축한 힘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일정한 충격을 입힐 수 있지만, 로만의 세상에서는 타격하는 부위마다 충격이 달랐다.
버틀러의 검.
검날에는 120%의 오라를 발현한다면, 옆면은 80%의 위력을 발휘했다.
로만의 노림수였다.
아직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로만은 마나의 흐름을 읽고 정확히 약한 부분을 공략했다.
콰앙!
콰콰콰쾅!
오라의 격돌.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접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오라의 분출을 파악하고 약점을 공략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로만의 예민한 감각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래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상대의 공격을 지켜보면서 패턴을 읽었고, 머릿속으로 상상 속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상상의 세계에서.
버틀러를 상대로 수도 없이 죽었다.
현실로 나타난 버틀러는 그보다 강한 존재였지만, 머릿속에 쌓아 둔 경우의 수는 미래를 읽었다.
훅!
머리를 노리고.
곧바로 측면을 공략하는 공격.
산에서의 짧은 전투에서 딱 한 번 나온 패턴이었지만, 로만은 그가 공격하는 방식을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 나올 수 있는 다양한 공격 방식. 그것은 아직 버틀러가 보여 주지 않은 모습인데도, 사방으로 뻗어 나간 상상의 나래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했다.
천마 백중혁.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버틀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적들을 만났지만, 항상 그만의 방식으로 끝에는 승리했다.
바로 지금처럼.
‘탐색전은 끝났다.’
기세가 돌변했다.
순간.
상대의 품을 파고들었다.
버틀러가 검을 회수하며 오라를 일으키자, 로만의 눈은 오라가 덜 발현되는 부위를 포착했다.
‘천마검법 삼초식.’
콰콰쾅!
콰르르르르릉.
전력을 다했다.
한 번의 공격에.
단전의 마나를 폭발시켰다.
당연히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버틀러는, 검과 검이 부닥치는 순간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 버렸다.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버틀러의 내부가 단번에 뒤틀리는 기분이었고, 살짝 균형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로만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콰앙!
콰콰콰쾅!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한순간의 실수.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수라고도 볼 수 없는 약간의 흔들림이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은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버틀러는 다급하게 공격을 막아 내기 바빴고, 조금이라도 오라가 균등하게 발휘되지 못하면 로만은 그 틈을 노려서 공격했다.
버틀러.
무려 5성의 검사가 밀렸다.
버틀러를 밀어붙이는 로만의 모습에, 양측의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한 표정을 보였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겨우 20대 중반의 사내가, 5성 검사인 버틀러를 밀어붙이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버틀러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 * *
버틀러는 생각했다.
‘이 녀석은 진짜 미친놈이었어.’
대결을 받아들이기 전에.
에드윈 헥토르는 함정의 가능성을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상식적으로 승리할 방법은 없으니, 무조건 모종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로만은 정말 아무런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
순수하게 무력으로 자신을 쓰러트리려는 의도를 보였고, 실제로 로만의 압박에 버틀러는 자신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악스러웠다.
버틀러는 살면서 수많은 검사를 상대했다.
그중에는 천재라고 불리는 부류도 있었지만, 그래도 버틀러 또한 그에 못지않은 재능을 타고났다.
수십 년의 경험.
그중에도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승부를 내는 과감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카이로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 년간 준비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가 하필이면 남부 전선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확실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 숨 쉬는 한은 우리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를 이대로 살려 준다면. 언제고 헥토르 왕국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맞닥트릴지도 모른다.’
상대를 인정했다.
20대의 나이에.
자신은 저렇지 못했다.
저런 대단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목숨을 걸 만큼 용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식의 세계에서 용기를 발휘했다.
버틀러도 분명히 투사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눈앞의 저 로만 드미트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반드시 죽인다.’
아직은.
자신이 우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상대가 정말 대단한 능력을 보여 주고 있지만, 검을 직접 섞어 보면서 그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
오라를 폭발시켰다.
마나를 남김없이 사용하며, 상대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콰앙!
콰콰콰쾅!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과도한 오라의 분출.
모든 부위가 100%로 발휘되니, 로만은 직접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회피하는 동작을 보였다.
영리했다.
빠르고, 판단에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버틀러는 승부수를 걸었다.
‘이것도 받아 낸다면 네가 나와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겠다.’
일격.
지금의 버틀러를 만든 비기(祕器).
마나가 들끓었다.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마나가 한곳에 집중되더니,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치솟으며 시야를 가득 메웠다.
수많은 사선을 오가며.
버틀러의 공격을 막은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헥토르 제일의 검이 되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대륙 랭킹에 올랐다.
그런 일격을.
버틀러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사용했다.
“이제는 끝이다.”
콰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쾅!
그대로 작렬하는 공격.
태양이 떨어지듯, 폭발하는 오라가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단번에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