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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615)

110화 벼랑 끝에서 (4)

성벽 위.

버틀러가 시작부터 로만을 몰아붙이는 모습에,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다.

“와아아아아!”

“버틀러! 버틀러!”

“동료들의 원한을 갚아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뼈에 사무치는 이름이다.

햇볕 아래 드러난 로만의 모습에 동료들의 죽음이 떠올랐고, 헥토르의 병사들은 성벽에 바짝 붙어서 광기(狂氣)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버틀러의 승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버틀러는 신뢰의 상징이었고, 상대가 강하다고 한들 버틀러를 넘어서진 못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역으로 기세를 잡아 가는 상황에, 성벽 위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침묵으로 물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로만 드미트리는 3성 검사라며. 대체 어떻게 5성 검사인 버틀러 님과 대등한 승부를 보이는 건데? 누가 설명 좀 해 봐. 제발, 이 상황을 설명 좀 해 달라고.”

누군가의 말처럼.

충격적인 감정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에드윈 헥토르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가 ‘5성의 오라’를 받아 내는 그 순간부터 그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설마 정말 실력으로 대결하려는 건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번 대결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명백하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경지의 차이가 매우 심했고, 직접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해 보았기에 버틀러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함정을 확신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버틀러를 쓰러트릴 방법은 전무했고, 처음 버틀러의 검을 받아 내자마자 마법 인챈트(enchant)를 한 검을 사용했다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었다.

에드윈 헥토르 또한 마법사기에, 상대가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심장이 뛰었다.

처음 로만을 만났던 그 순간처럼.

어둠 속에서 나타나 충격을 주었던 그때와 같이, 에드윈 헥토르는 입이 바짝 마르고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버틀러가 로만 드미트리에게 패배한다면. 그보다 최악의 상황은 없다. 우리는 가장 강력한 존재를 잃을 뿐만 아니라, 대결의 패배로 후방 진지에서 퇴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승패와 관계없이 우리는 대결의 결과를 따를 수 없다.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투입하고도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건 헥토르의 몰락을 의미하고, 신의(信義)를 저버린 헥토르 왕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판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겠지.’

고개를 저었다.

버틀러를 믿었다.

아직은.

버틀러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자꾸만 불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이 대결의 승자가 버틀러라는 사실을 믿으려 노력했다.

그 믿음에 부응이라도 하듯.

콰앙!

콰콰콰쾅!

다시 전세가 바뀌었다.

버틀러가 로만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로만을 궁지로 몰아넣은 순간, 버틀러의 검에서 휘몰아치던 오라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버틀러의 비기.

‘끝났다.’

확신했다.

이건 막을 방법이 없다.

대륙의 강자들도, 버틀러의 비기에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순간.

콰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쾅!

“……!”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에드윈 헥토르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 * *

백중혁의 아버지.

아들들을 사지로 밀어 넣기 전에, 그는 열두 아들을 앞에 앉히고 이런 말을 했었다.

“천마라는 존재는 맹목적인 신뢰의 상징이다. 너희는 그 어느 순간에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뒷걸음을 칠 바에는 목숨을 버리는 것이 옳고, 같잖은 수비 초식으로 초라한 승리를 얻는 것보다는 팔 한 짝을 내주더라도 압도적으로 적의 목숨을 취해야만 한다. 명심하라. 천마라는 별호는 절대자(絕對者)에게만 허락되는 칭호다. 너희가 정녕 나의 뒤를 이어 마교의 정점에 오르길 바란다면, 너희들이 지나온 걸음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어야 한다.”

그 시절.

천마의 말은 크나큰 충격을 남겼다.

당연하게도 열두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수비적인 초식을 배우기보다는 공격적인 초식으로 상대를 압박했고, 가장 좋은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을 뼈에 새겼다.

그 과정에서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존재가 속출했다.

아버지의 말처럼 수비 대신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다가 머리가 날아가 버렸고, 조금 더 발전할 수 있었던 마교의 인재는 덧없이 생명이 사그라지고 말았다.

딱 한 명.

백중혁은 달랐다.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그는 수비 초식을 배우는 것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하는 같잖은 수비 초식의 의미는 수비에만 치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수(攻守) 양면에서 모두 완벽해야만 한다. 적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되, 언제든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도록. 그런 존재로 성장해야 천마가 될 수 있다.’

눈앞에.

태양이 떨어졌다.

활활 타오르는 오라가 시야를 가득 메우는 모습에, 로만은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없음을 알았다.

‘비장의 무기라는 건가.’

만약.

딱 반년의 시간이 더 허락되어 천마검법 중반부 초식을 개방했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과 힘의 대결에 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겨우 전생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으로 자신이 전생과 같다고 믿는다면, 이 자리에서 목이 날아가는 것은 자신일 것이다.

그렇기에.

태도를 바꾸었다.

공격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했다.

오로지 ‘방어’라는 하나의 목적에 치중하며, 자신의 오라를 발현했다.

천마검법.

그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라면.

철괴(鐵塊)는, 천마 백중혁이 보유한 가장 단단한 방패였다.

‘철괴.’

콰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쾅!

오라가 작렬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집어삼킬 것 같은 강력한 힘에, 로만은 오라를 극한으로 응축하며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했다.

엄청난 반발력에 팔이 덜덜 떨렸다.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핏물이 입에서 흘러내렸지만, 철괴의 강력한 힘은 단 한 걸음도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그 순간.

버틀러와 눈이 마주쳤다.

승리를 확신했던 그의 눈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경악으로 얼룩졌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방어는, 버틀러의 멘탈을 완전히 부서트렸다.

* * *

검법은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방어한다고 해서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 뒤에 반격할 것을 대비해 근육과 기를 분배하는 것이 옳다.

철괴.

그것은 아예 공격적인 요소가 배제되었다.

티끌의 힘마저 방어에 몰두하는 것이고, 만약 버틀러가 그대로 계속 밀어붙였다면 로만은 방어에만 급급했을 것이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시간.

고수들의 대결에서 그 시간은 찰나라 할지라도 매우 치명적이건만, 버틀러는 멍청하게도 그 시간을 허비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떻게!”

경악했다.

말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

같은 5성의 검사도 막아 내지 못한 공격을,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막아 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감정을 표출하는 짧은 시간에.

로만은 내부를 빠르게 안정화시켰다.

철괴를 사용함으로써 끓어오르는 마나를 억눌렀고, 태세를 변환하면서 수비에만 치중된 마나와 근육을 전체적으로 재분배했다.

단 한 번의 방어를 위해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 버릴 수도 있었던 상황.

대결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몰랐다.

실제로는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고, 로만은 상황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타닥.

땅을 박찼다.

로만은 그대로 버틀러를 공격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나가 공격적으로 폭발하며, 버틀러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강하게 몰아붙였다.

콰앙!

콰콰콰쾅!

반발력이 약했다.

로만과 버틀러의 차이점.

철괴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리스크를 최소화했다면, 버틀러는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많은 힘을 소진해 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그의 오라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마나가 충분할 때는 폭발적인 분출로 강한 힘을 발휘했다면, 지금은 바닥을 드러내는 마나에 버거운 표정을 보였다.

그에 반해.

로만은 달랐다.

무공.

일말의 힘으로도 극한의 위력을 발휘하는 기술.

주도권이 넘어갔다.

완전히 끝내 버리겠다는 듯이 미친 듯이 몰아붙이는 공격에, 버틀러도 이를 악물며 반격을 시도했다.

훅!

눈앞에서.

버틀러의 검이 스쳐 지나갔다.

로만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상대의 반격에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기 위해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공격을 흘려 버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알지 못했다.

천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공격적이어야만 했고, 지금부터는 천마 백중혁의 세계였다.

압도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

미친 듯이 밀어붙였다.

오라가 폭발하며 뒤로 밀려나는 상황에, 버틀러의 안색이 점점 창백하게 변해 갔다.

어떤 수비에도.

어떤 반격에도.

로만은 앞으로 치고 들어왔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 모양인지, 검 끝에 서고도 버틀러에게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현기증이 돌았다.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면서 잃어버린 호흡.

그것을 회복할 시간이 없었다.

창백해진 얼굴의 버틀러가 힘겹게 공격을 쳐 내는 순간, 로만의 싸늘한 시선이 그의 눈에 꽂혔다.

‘끝이다.’

그 순간.

“크아아아아악!”

버틀러.

그가,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를 택했다.

* * *

끝났다.

그 사실을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맹수와도 같은 인물이고, 한번 포착한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 말인가.’

대결을 돌아보면.

자신이 유리한 것은 명백했다.

로만은 힘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속절없이 밀려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경험의 차이였다.

전장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모두 경험한 노련한 50대의 검사가, 아직 세상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혈기왕성한 20대의 상대에게 경험에서 밀리고 있었다.

경악스러웠다.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헥토르 왕국이 그를 감당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헥토르 왕국은 뒤로 물러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벼랑 끝에 몰렸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끝까지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이 괴물은. 어떻게든 왕자님의 눈앞에 나타나 목숨을 앗아 갈 녀석이다. 그렇기에 나는 죽더라도 이 녀석을 데리고 가야만 한다.’

판단이 섰다.

헥토르 왕실 기사단의 단장.

버틀러는 자신의 머리 위로 검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이를 악물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로만의 검이.

자신의 머리를 베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도 로만의 팔 한 짝 정도는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버틀러. 너의 의지를 기억하겠다.”

소름이 돋았다.

로만은 상대의 수를 예상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허수로 적의 결단을 끌어냈고, 달려드는 모습에 한 발 뒤로 빠져 버렸다.

훅!

버틀러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다.

끝이었다.

벼락같이 내리꽂히는 검에, 버틀러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푸확!

“크악!”

단말마의 비명.

치열했던 대결의 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버틀러는 초점을 잃어버린 눈으로 무릎을 꿇었고, 그대로 쓰러지는 그의 머리 위로 다시 한번 검이 내리꽂혔다.

그때였다.

“멈춰라! 룬 플레어(Rune flare).”

콰앙!

화르르르르륵!

성벽 위에서.

화염의 불길이 작렬했다.

로만이 공격을 피해 한 발 물러나자, 후방 진지의 성문이 열리며 일단의 병력이 튀어나왔다.

“버틀러 기사단장님을 구하라!”

“이런 개새끼야! 우리 기사단장님을 건드리지 마라!”

악에 받친 병사들.

헥토르는 신의를 저버렸다.

국제사회에서의 평판을 포기하고.

버틀러를 구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에드윈 헥토르가 인간미(人間味)를 보여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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