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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615)

111화 벼랑 끝에서 (5)

첫 번째 방법의 설명을 끝내고.

카이로의 귀족들은 다소 의심쩍다는 반응을 보였다.

버틀러를 쓰러트렸다는 전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한 마음에 한 번 더 물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다음 작전은 무엇입니까?”

대체 어떤 방법일까.

어디 들어나 보자는 그들의 태도에, 로만이 말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산에서 헥토르 왕국을 상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날이 밝고. 헥토르 왕국은 퇴각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밤새 전투를 치렀는데도 동료들의 시체를 챙겨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게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감성적으로는 죽은 동료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만, 그때의 헥토르 왕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남부 전선의 최전방 방어 진지들을 빠르게 함락시키는 것만이 패배로 잃어버린 승기를 회복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감성과 이성.

전장에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였다.

로만은 자신의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부류는 아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망자(亡者)를 위해 산 사람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적어도 에드윈 헥토르의 판단은 그랬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에게 시체를 챙길 것을 명령했고, 그로 인해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야 휴식을 취했다.

과연.

그게 올바른 판단이었을까?

병사들은 동료를 위해 심적으로 옳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때의 판단은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저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에드윈 헥토르는 병사들의 시체를 화장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슬픔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에드윈 헥토르는 좋은 지휘관입니다. 과감한 판단과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순식간에 남부 전선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그는 이성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성을 잃을 만한 상황을 만든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설마.”

“예. 버틀러는 에드윈 헥토르의 판단력을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버틀러와 에드윈 헥토르.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다.

버틀러는 왕실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오랜 시간 에드윈 헥토르를 보필했고, 기사단장의 직함을 달고도 이번 기습 작전에 직접 참여할 정도로 에드윈 헥토르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좋은 기폭제였다.

버틀러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다면, 에드윈 헥토르는 눈앞의 상황에 이성을 찾지 못할 것이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둘의 관계는 특별합니다. 저는 버틀러를 상대로 대전사 전투를 제안할 것이고, 그를 쓰러트린다면 첫 번째 작전의 조건을 충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번째 작전의 시작입니다. 저는 버틀러를 단칼에 죽이지 않고,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정도에서 그를 쓰러트릴 생각입니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던 버틀러.

계산된 작전이었다.

로만은 충분히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었는데도, 에드윈 헥토르에게 보여 주기 위해 가슴팍을 베었다.

그리고.

액션을 보였다.

다음 공격으로 버틀러를 죽여 버릴 것처럼.

곧바로 시도되는 공격은, 에드윈 헥토르의 결단을 끌어내리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에드윈 헥토르가 버틀러를 살리겠다는 판단을 내린다면.”

함정이었다.

버틀러를 쓰러트리기 위한 함정이 아니라,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에드윈 헥토르를 노린 함정.

“우리는 에드윈 헥토르의 선택을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 * *

계획대로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해버렸다.

버틀러를 구하겠다는 일념에,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공격하라!”

“기사단장님을 구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성벽 위.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수백의 화살이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들은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단 한 명이 물러나도록 강요하기 위해. 발악하듯 화살을 발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버틀러를 향해 달려가는 병사들은 필사(必死)의 의지를 보였다.

미리 준비한 방패로 화살을 막아 내며, 지옥으로 들어가 바닥에 쓰러진 버틀러를 구하고자 했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감동의 드라마였고, 헥토르 왕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조금도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버틀러라는 존재.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다.

헥토르 왕국을 위해 대결에 나섰듯, 그들은 반대로 버틀러를 위해 나섰다.

‘에드윈 헥토르. 너는 좋은 지휘관임에는 분명하다.’

로만이 성벽 위를 보았다.

에드윈 헥토르.

마나를 일으켜서 자신을 공격하려는 그의 모습에, 로만은 씰룩 웃어 보더니 그대로 땅을 박찼다.

타닥.

“……이런!”

“막아!”

“저 괴물을 공격해!”

성벽 위가 발칵 뒤집혔다.

계획과는 달랐다.

원래는 화살 공격에 로만 드미트리가 물러나야 정상이건만, 로만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그대로 맞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그림은 연출되지 않았다.

얇게 형성된 마나의 막이 실드(shield)처럼 화살을 막아 주었고, 어느새 병사들 앞에 들이닥쳤다.

서걱!

“크악!”

전투가 시작되었다.

선두에서 달려드는 기사를 일격에 베어 버린 로만은, 앞으로 우악스럽게 나아가며 다른 병사들을 빠르게 베어 버렸다.

두세 번 이어지는 공방은 없었다.

헥토르의 기사들이 오라를 일으키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드는데도, 몇 번 검을 주고받으면 어김없이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학살.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도, 로만은 혼자서 그 파도를 양옆으로 갈라 버렸다.

“일단 버틀러님을 구해!”

“시간을 벌어 줘!”

그들의 목적.

버틀러의 구출이었다.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일부 병력은 버틀러에게 다가가 축 늘어진 그의 몸을 빠르게 짊어졌다.

로만은 일부러 그들의 의도를 내버려 두었다.

가슴팍을 베어 버린 공격으로 버틀러는 전력 외의 존재가 되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버틀러를 죽이겠다고 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될 존재를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다른 이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직 버틀러가 살아 있기에.

로만을 막아서는 적들은 도망치지 못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앞을 막아설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로만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갔다.

“빌어먹을.”

“아군과 뒤섞여서 공격할 수가 없어!”

성벽 위.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거리가 떨어졌을 때는 로만을 공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뒤얽혀서 자칫 잘못했다간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건 에드윈 헥토르도 다르지 않았다.

마법은 범위 대미지가 상당한 공격이었고, 이미 캐스팅을 끝냈는데도 불구하고 로만을 향해 마법을 발사하지 못했다.

자충수(自充手)였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성문을 열고 병력을 내보낸 그 순간부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카이로의 귀족들.

먼발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들은, 로만의 말처럼 진행되는 상황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치 마법과도 같구나.”

첫 번째 방법.

버틀러를 쓰러트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두 번째 방법.

어떻게 버틀러를 쓰러트린다고 할지라도, 에드윈 헥토르가 설마 버틀러를 구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는 일국의 왕자다.

대결의 규율을 어긴 그의 선택은 헥토르 왕국의 명예를 바닥에 떨어트릴 텐데도, 버틀러의 목을 베어 버리려는 로만의 모습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문을 열었다.

그리고 로만의 돌진.

과감했다.

하늘에서 화살이 우수수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로만은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려 일방적으로 도륙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을 알기에 더욱 경악스러웠다.

범인(凡人)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고, 왜 카이로의 실세들이 그에게 목을 매다는지 알 것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가 낳은 역대 최고의 재능이다. 왜 베네딕트 후작님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하는지를 알겠어. 로만 드미트리의 충성심을 얻는 순간. 나약한 국왕은 물론이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두 제국의 끄나풀도 모두 정리할 수 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일단 지금은.

현재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정신을 차린 파비우스 백작은, 로만과 약속했던 대로 명령을 내렸다.

“플레어를 발사하라!”

“발사하라!”

명령이 떨어졌다.

병사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플레어를 앞 열에 배치했고, 이윽고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발사되었다.

펑펑!

콰르르르르릉!

성벽에 작렬했다.

일부러 로만이 없는 주변으로 발사했고, 강력한 충격에 불길이 일었다.

수차례 시도되는 공격에도 후방 진지의 성벽은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헥토르 왕국은 후방 진지를 확보한 이후부터 마법 방어에 전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플레어가 작렬해도 성벽은 견고함을 자랑했다.

하지만.

애초에 성벽을 무너트릴 생각이 없었다.

플레어는 견제의 의미가 강했고, 의도했던 판이 깔리자 파비우스 백작이 벼락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전군 돌격!”

“돌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

앞으로 달려 나가는 카이로의 병사들.

로만과 버틀러의 대결은 전초전(前哨戰)에 불과했다.

지금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콰앙.

콰르르르르릉.

플레어가 작렬했다.

성벽에서 일어나는 마법의 기운이 충격을 완화시켜 주었지만,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로서는 고개를 내밀고 화살을 발사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카이로의 병사들은 빠르게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만약 저들이 활짝 열린 성문으로 들이닥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수적으로 열세인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버틸 방법이 없었다.

“빌어먹을!”

헥토르의 기사.

후방 진지의 수성을 맡은 켈란은,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분노를 표출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마음 같아서는 빠르게 성문을 닫아 버리고 싶었지만, 밖에 있는 병사들이 로만에게 꼬리를 붙잡혔다.

‘이대로 있다가는 성문이 뚫린다.’

다급했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헥토르 왕국 전체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켈란으로서는 버틀러가 에드윈 헥토르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그에게 수문장의 역할이 부여되었다.

마음이 타들어 갔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앞을 바라보던 그는, 버틀러를 업은 병사가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발악하듯 소리쳤다.

“성문을 올려!”

“성문을 올려라!”

밖에 있는 병사들.

그들을 포기했다.

수백의 병사들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들을 구하겠다고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끼리리릭.

성문을 연결한 쇠사슬이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다리처럼 해자(垓子) 위를 연결해 주던 성문이 천천히 올라갔다.

이대로 성문을 닫는다면.

헥토르 왕국은 성의 이점을 살려서, 카이로 왕국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였다.

확.

거의 다 올라간 성문 위로.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순간.

켈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의 악마.

눈앞의 존재에, 켈란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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