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615)

112화 벼랑 끝에서 (6)

그곳은 사지였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악에 받친 얼굴로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죽여!”

“저 녀석을 죽이지 못하면 성문이 뚫릴 것이다!”

“모두 공격해!”

헥토르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단 한 명으로 인해.

성문을 올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끌리는 사이에 카이로의 병력이 들이닥치면 그때는 정말 끝이기에, 헥토르의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눈이 팽팽 도는 광경이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전부 살의(殺意)를 가지고 달려드는 것은 압도적인 광경이었으나, 로만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침착했다.

이런 광경.

익숙했다.

무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천마 백중혁은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겪었다.

푸확!

“크악!”

가장 처음으로.

먼저 달려든 병사의 몸뚱이를 베어 버렸다.

검을 타고 흩뿌려지는 핏방울을 맞으며, 그 뒤로 수많은 병사가 들이닥쳤다. 그때부터는 단 한 순간도 숨을 돌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앞에서 달려드는 적을 베어 버리면 양옆에서 적들이 치고 들어왔고, 그들의 공격을 피해 반격을 가하면 머리 위에서 또 다른 적이 떨어져 내렸다.

사방이 적이었다.

로만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전신의 감각이 폭발적으로 확장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의 공격까지 포착했다.

푹!

“크억.”

뒤를 노리던 병사의 턱을 검으로 뚫어 버렸다.

로만은 검을 빼내며 피를 털어 버렸고, 동시에 바로 앞에서 오라를 일으키는 오라 검사의 머리를 날렸다.

2성의 오라. 검사는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 수십 년을 훈련에 매달렸건만, 무심코 짓밟힌 개미처럼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로만은 블랙홀처럼 달려드는 모든 적을 도륙했지만, 벼랑 끝에 몰린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죽을 걸 알면서도 물러설 수 없었다.

마지막 결전이다.

어차피 패배는 헥토르의 몰락을 의미하기에, 그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로만을 막으려 했다.

짧은 시간.

로만의 발밑에 피가 흥건히 흘러내렸다.

그렇게 흘러 나간 핏물이 해자를 붉게 물들이는데도, 로만과 헥토르 왕국은 그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도 결국은 인간이다.

버틀러와의 대결로 체력적인 소모가 적지 않았을 것이고, 다수의 적을 상대하면서 언제고 체력이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인해전술(人海戰術).

목숨을 버리고 체력을 깎았다.

로만이 들이켜는 숨 한 번에, 헥토르의 병사 하나가 처절하게 죽어 갔다.

하지만.

‘시간은 너희들의 편이 아니다.’

그들의 생각처럼.

로만도 체력적인 소모가 대단한 상태였다.

버틀러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로만으로서도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로만이 장기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었다.

무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삼일 밤낮으로 싸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먼저 체력이 고갈되는 자에게는 죽음이 찾아왔다.

단전이 쓰라렸다.

마나가 점점 고갈되는 상황에, 로만은 흡성대법(吸星大法)을 사용했다.

“죽어라!”

헥토르의 기사.

그가 오라를 발현하며 달려들었다.

로만은 일부러 그의 공격을 받아 주면서, 검과 검이 맞닿는 부분을 통해 기사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슈우우욱.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기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자, 로만은 곧바로 그의 머리를 베었다.

‘이건 임기응변에 불과하다.’

흡성대법.

무림을 공포에 빠트렸던 마귀의 무공으로, 상대보다 우월한 무공을 갖춘 자가 기를 강제로 강탈하는 수법이었다.

흡성대법을 자주 사용하면 이지(理智)를 상실하고 여러 기운이 뒤섞인 단전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로만은 흡성대법의 기운을 단전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방금 빨아들인 기운을 곧바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단전의 마나를 아끼고 외부의 힘을 썼다.

적들로서는 알 수 없었다.

로만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아무리 공격해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시간이 갈수록 적들의 표정이 충격과 공포로 물들었다.

산처럼 쌓여 가는 시체.

적들의 가슴에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들은 생각했다.

정말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 이 괴물 때문에 성문이 뚫릴 수도 있겠구나.’

그건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결말이었다.

겨우 한 명의 인간에게 헥토르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헥토르의 병사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헥토르의 병사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로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성벽 위.

에드윈 헥토르는 눈앞의 현실을 보았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카이로의 병력을 보며,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아니, 난 애초에 이리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멍청했다.

한심했다.

지휘관으로서 끝까지 이성을 유지해야 하건만, 버틀러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모습에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로만은 성벽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빠르게 버틀러를 구한다면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판단을 내렸고, 병사들은 또 그걸 따라 주었다.

모두가 똑같았다.

버틀러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다들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성문을 열어 버렸다.

그 대가였다.

성벽 아래에서는 병사들의 비명이 들렸고, 곧 카이로의 병력이 성으로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후우.”

숨을 골랐다.

오늘로써 알았다.

자신이 좋은 지휘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벌써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딱 한 번만 공격을 버텨 낸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

화아아악.

마나를 끌어올렸다.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서클.

그것이 맹렬하게 회전을 일으키며, 에드윈 헥토르의 손길에 따라 강력한 힘을 분출했다.

“룬 플레어.”

콰앙!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작렬했다.

성벽으로 다가오던 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불길에 휩싸였고, 순식간에 십수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새카맣게 타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즉사한 것만 십수 명이었다.

화상을 입고 뒤로 물러난 병력은 무려 수백에 달했고, 그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마법사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증명했다.

마법사.

사람들은 그들을 수성의 황제라고 불렀다.

마법사가 버티고 있는 전장은 피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에드윈 헥토르는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다.

“룬 플레어.”

“파이어 볼(Fire Ball).”

콰앙!

화르르륵.

에드윈 헥토르의 옆으로.

헥토르 왕국의 마법사들도 나섰다.

그들이 일제히 마법을 발현하며 강력한 불길을 일으켰고, 사방에서 작렬하는 화염 마법에 카이로 왕국은 빠르게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카이로의 지휘관. 파비우스 백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로만 드미트리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넓게 퍼져서 돌진하라! 적들은 지금 성문이 열려 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더 많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돌진하라!”

“공격해!”

명령이 빠르게 번져 갔다.

카이로의 병사들이 불길을 뚫고 나아갔다.

이미 타 버린 시체를 불길에 던졌고, 조금이라도 열기가 가라앉으면 화상을 각오하고 앞으로 전진했다.

불길을 피해 돌아가는 병력도 있었다.

어떻게든 성벽에 도달하려는 적들의 목적.

에드윈 헥토르는, 그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파이어 월(Fire Wall).”

화륵.

화르르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차마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불길이었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은 그대로 다가오는 적들을 집어삼켜 버렸다.

에드윈 헥토르가 분발했기 때문일까.

플레어의 공격에도 헥토르의 궁수들이 나서서 화살을 발사했다. 조금이라도 적을 줄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들을 공격했다.

아주 잠깐.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만 처리하고서 성문을 닫으면, 아직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그 순간.

콰앙!

콰르르르르릉.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동시에.

“성문이 열렸다!”

로만의 음성이 들렸다.

그건.

헥토르 왕국을 절망에 빠트리는, 그야말로 사형 선고였다.

* * *

계속되는 전투.

로만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싸우고만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카이로의 병력이 들이닥칠 수 있도록 성문을 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탁.

타닥!

순간적으로 경공술을 발휘하며 벽을 타고 올라갔다.

헥토르의 병사들로서는 어떻게 반응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처음에는 경악한 눈빛으로 로만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그들은, 로만이 도달하는 목적지를 확인하고는 다급한 음성을 외쳤다.

“안 돼!”

“빨리 막아!”

로만의 목표.

성문을 조작하는 레버(lever)였다.

로만은 그곳을 지키는 병사의 목을 단번에 베어 버리더니, 오라를 일으켜 레버를 부숴 버렸다.

퍽!

콰직!

성문이 힘을 잃었다.

크게 철렁이며 흔들리는 모습에, 로만은 성문을 지탱하는 굵은 쇠사슬마저 잘라 버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성문이 무너졌다.

해자 위로 떨어지며 엄청난 굉음을 일으켰고, 로만은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마나를 실은 목소리로 외쳤다.

“성문이 열렸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전장을 관통했다.

선뜻 나아가지 못하던 카이로의 병사들은, 로만의 목소리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돌격하라!”

“헥토르의 잔당들을 처리하라!”

끝났다.

성벽의 의미가 상실되었다.

성문을 통해 카이로의 병사들이 들이닥친다면, 헥토르 왕국으로서는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내 역할은 끝났다.’

이제는.

뒤로 물러나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로만은 성문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는데도, 그대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서 막아서는 적들을 처리했다.

그 모습에.

적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였다.

대체 왜.

이 괴물은 어째서 도망치지 않는단 말인가.

마침내 성벽 위에 도달했을 때, 로만의 시선은 한 사람을 향했다.

‘에드윈 헥토르.’

헥토르의 지휘관.

그가 로만의 또 다른 목표였다.

* * *

시작부터 무너진 성문.

사실상 끝난 전쟁이었다.

패색(敗色)이 짙어진 상황에, 에드윈 헥토르는 복합적인 감정이 일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계획은 완벽했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후방 진지를 점령한 것만으로도,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때였다.

“에드윈 헥토르!”

로만 드미트리.

그가 나타났다.

앞길을 막아서던 병사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주변에 널브러졌고, 그의 검에서는 방금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의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를 바라보는 에드윈 헥토르의 눈빛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래, 로만 드미트리. 모두 다 저 녀석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함락되어야 했을 제5 방어선이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수성에 성공했고, 로만은 그 병력을 이끌고 게릴라 작전을 통해 헥토르 왕국을 괴롭혔다.

그로 인해 천에 달하는 헥토르의 병사들이 죽었다.

처음과는 틀어지는 계획에 뒤늦게 다시 남부 전선의 최전방 방어 진지들을 함락시켰지만, 그때는 귀신같이 몸을 숨기던 로만 드미트리가 이번에는 성문을 열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신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헥토르의 별이라 불리는 자신을 태어나게 만들고, 대체 왜 카이로 왕국에 로만 드미트리를 보냈는지.

완벽한 패배였다.

전략에서도, 무력에서도.

에드윈 헥토르는 로만 드미트리를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이번 전쟁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너라는 변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 순간부터, 어떻게든 너를 죽였어야만 했다.”

화악.

마나를 일으켰다.

적들이 성안으로 들이닥쳤다.

사방에서 들리는 병사들의 비명에, 에드윈 헥토르는 자신 또한 살아서 돌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력하게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로만 드미트리. 네 녀석은 내 저승길의 길동무로 삼을 것이다.”

화르르르르륵.

서클의 개방(開放).

에드윈 헥토르가,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