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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116/615)

116화 금의환향(錦衣還鄕) (3)

사람의 감정이란 참 묘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단순하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카이로의 실세들은, 아무리 대단한 인재라고는 하나 자신들을 만만하게 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 랭킹전은 얘기가 달랐다.

“……공개 랭킹전이라고?”

“예.”

“공개 랭킹전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끝없는 도전을 의미한다. 패배할 때까지 부딪치고, 무릎을 꿇은 그 자리가 본인의 랭킹으로 남게 되지. 문제는 공개 랭킹전이 가볍게 논할 만큼 만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계를 시험하는 자리일수록 대결은 격렬해질 수밖에 없고, 눈먼 검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랭킹전은 예민한 문제다.

강자들의 대결이니만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고, 공개 랭킹전은 다른 때보다 그 정도가 심하다.

일회성 대결이 아니다.

100위의 로만 드미트리가 99위를 쓰러트린다면.

곧바로 다음 상대에게 도전한다.

확실하게 한계에 부닥칠 때까지 싸우는 방식이다 보니, 도전을 받아들이는 랭커들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단순히 자신을 지목해서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밟고 위로 올라가겠다는 건데, 대체 그 누가 랭킹의 희생양으로 남고 싶겠는가.

끝없는 도전.

되도록 삼가는 방식이다.

그런데도 로만 드미트리가 의사를 밝힌 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로만 드미트리는 헥토르 왕국의 버틀러를 쓰러트렸다. 그 결과만으로도 이미 상위 랭킹에 오를 자격이 있는 존재가 공개 랭킹전을 도전하겠다는 것은, 자신을 시험하는 의도가 다분하다.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지금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이용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니.’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

다니엘 카이로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아직 세상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않았을 나이인데, 로만 드미트리는 일반적이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

“역시 카이로의 영웅이군요.”

“대단한 결단을 하셨습니다. 이로써 카이로 왕국의 랭킹이 한번 크게 요동치겠군요. 헥토르 왕국의 버틀러를 쓰러트린 실력자인데, 누가 로만 드미트리 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벌써 기대가 됩니다.”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로만은 로열 나이트 제안을 거절했다.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데, 그들로서는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리가 되겠지. 소문만으로는 버틀러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로만은 아직 20대 중반의 나이. 공개 랭킹전을 통해 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겠어.’

나쁘지 않았다.

공개 랭킹전은 평가의 자리가 될 것이다.

로만은 시간을 끄는 방식으로, 남들이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주제를 던져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랭킹전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그 시간은, 자신을 회유할 충분한 시간을 부여하는 의도도 있었다.

공개 경쟁.

로만은 상황을 이용했다.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며, 자신을 원하는 이들의 경쟁심에 불을 붙였다.

로만이 말했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 자신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앞으로의 거취를 결정하겠습니다.”

그 말을.

모두가 제멋대로 받아들였다.

다니엘 카이로는 로열 나이트의 입단을.

나머지 세 귀족은, 앞으로의 거취라는 애매한 대답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진실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랭킹전을 끝냈을 때.

‘그때는 새로운 판도를 만든다.’

로만 드미트리는.

누군가의 검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로서 이 판도를 뒤엎어 버릴 것이다.

* * *

파티가 끝나고.

로만은 베네딕트 후작의 부름을 받았다.

이미 살짝 술기운이 올라온 베네딕트 후작은, 손수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쪼르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참 재밌어. 나는 너를 배려해 줄 생각으로 남부 전선에 보낸 것인데, 하필이면 헥토르 왕국이 전쟁을 선포하다니. 그리고 너는 그걸 막아서 카이로의 영웅이 되었고.”

술잔 가득 술이 차올랐다.

눈짓을 주는 베네딕트 후작의 모습에, 로만은 덤덤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탁.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좋은 경험이라고?”

“예. 헥토르 왕국과의 전쟁을 통해, 제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개 랭킹전을 결심했습니다. 카이로 왕국에서 제가 얼마나 강한지를 시험하고. 마침내 위에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대륙으로 나아가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대륙 최고라. 딱 네 나이에 맞는 꿈이네.”

그도 술을 들이켰다.

한때.

베네딕트 후작도 최고가 되리라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대륙은 상상 이상의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었고, 자신의 초라한 한계를 마주한 날 그는 카이로 왕국에서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조카를 핍박하고 이룬 중앙 정부의 세력.

그리 떳떳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그렇기에 그는 카이로에서 살아 있는 권력이라 불렸다.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나에게는 자식이라고는 딸이 한 명 있다. 아들을 낳으려고 열심히 노력해 보았지만, 딸의 어미가 일찍 죽는 바람에 더는 시도할 수가 없었지. 사람들은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군. 다른 귀족들처럼 새로운 아내를 맞이해 아들을 낳으라고. 그런데 내가 참, 이상하게 그런 건 싫단 말이지.”

유명한 얘기였다.

베네딕트 후작.

그와 관련한 흉흉한 소문과는 다르게, 그는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도 여색을 크게 밝히지 않았다.

밖에서 어떻게 불리는지는 상관없었다.

적어도 집에서는, 금지옥엽(金枝玉葉)의 딸만 바라보는 아버지일 뿐이었다.

“내 딸을 너에게 주지.”

탁.

술잔을 내려놓았다.

베네딕트 후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의 의미가 가볍지 않음을 알았다.

“파비우스에게 네가 그리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했다지. 그때의 이야기와 오늘 사람들 앞에서 공개 랭킹전을 하겠다고 말하는 네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젊은 시절에 만났던 대륙의 괴물들이 떠올랐다. 확실해. 내가 그 녀석들처럼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내가 그들과 견줄 만큼 성장할 존재라는 걸 알아볼 능력 정도는 있다.”

“……저는 파혼을 했었습니다.”

“알고 있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혼인을 제안했겠나. 나도 내 딸에게 너를 강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둘이 만나는 자리를 주선해 주고,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면 그 결과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는 의미지.”

술을 들이켰다.

썼다.

버틀러를 쓰러트렸다는 그 말에, 공개 랭킹전을 도전하는 로만의 모습에.

베네딕트 후작은 본능적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보통의 대가로는 품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방법은 하나였다.

혈연(血緣).

귀족파는 다른 그 어떤 세력보다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는데도, 베네딕트 후작은 드미트리 가문을 받아들였다.

“지금 당장 내 딸을 만나라고 하지는 않겠다. 사람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너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테지. 하지만 이 사실만큼은 명심해라. 예나 지금이나, 이 베네딕트 후작이 너의 뒤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네가 내 손을 잡고 앞으로의 미래를 같이해 주겠다고 말한다면, 너는 이 카이로 왕국에서만큼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베네딕트 가문과의 결혼.

그것은 베네딕트 후작의 권력을 모두 물려받는다는 의미고, 그만큼 로만에 대한 그의 욕망은 강했다.

그렇게.

그날의 술자리는 마무리되었다.

베네딕트 후작의 제안은 하나의 사실을 명확히 밝혔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차지하는 자가 카이로 왕국을 집어삼킬 것이다.’

힘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존재.

다른 세력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모양인지, 로만은 차례로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의 연락을 받았다.

* * *

카이로를 사분하는 세력들.

그들의 구애는 대단했다.

다니엘 카이로는 로열 나이트의 부기사단장직을.

베네딕트 후작은 혼인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결코 모자라지 않은 제안을 말했다.

“내가 단언하지. 언제고 크로노스 제국은 대륙을 통일할 거다. 다니엘 국왕이든, 베네딕트 후작이든. 결국, 카이로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네게 많은 걸 줄 수 없다. 크로노스 제국의 권력을 약속해 주지.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크로노스 제국은 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줄 거다.”

“발할라의 제안은 전과 같다. 귀족의 작위와 영토를 주는 것과 더불어, 전사의 무덤에 들어갈 기회를 주겠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겠지. 전사의 무덤은 역대 발할라를 빛낸 전사들을 묻어 둔 장소고, 그곳에는 그들의 무기와 평생 쌓은 지식이 남겨져 있다. 네가 만약 대륙 제일의 검이 되기를 바란다면, 발할라 제국은 너의 길을 인도해 줄 능력이 있다.”

둘 다.

파격적이었다.

사람들은 다니엘 카이로의 제안이 충격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판을 까 보니 다른 세 귀족은 사활을 걸었다.

그만큼 로만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이 강했다.

버틀러가 아무리 대륙 랭킹에서 끝자락에 있다지만, 20대의 나이에 버틀러를 쓰러트릴 사람은 로만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20대 중반의 나이.

찬란한 미래를 의미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성장은 확정적이기에, 카이로의 실세들이 이례적으로 파격적인 제안을 내밀었다.

안락한 삶을 바란다면.

어떤 것을 택하든 부와 권력이 따라올 것이다.

정확히는 다니엘 카이로의 제안은 제외해야겠지만, 다른 세 세력은 완벽한 미래를 제안했다.

그런데도.

로만은 조금도 혹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밑에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지난 인생.

삶의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부터, 머리 위에 있는 존재를 짓밟아 가며 한 단계 한 단계 위로 올라갔다.

그때마다.

달콤한 제안을 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내줄 것처럼 말했지만, 그건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결국, 내 존재 가치가 다하거나 본인의 욕망과 반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태도가 달라지겠지. 내가 바라는 정점의 자리는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하는 것이다. 타인의 결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내 자체가 올곧게 존재하는 것.’

다른 의미의 안락함이었다.

지금은.

그들을 이용할 뿐이었다.

그들이 주는 호의는 대가를 바라고, 그에 현혹되기에는 천마 백중혁으로서 살아온 길이 험난했다.

목이 탔다.

갈증이 일었다.

공개 랭킹전이 끝난 뒤.

그때부터 벌어질 일이, 벌써부터 로만의 피를 끓게 했다.

* * *

수도에 마련된 로만의 숙소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왕실에서 특별히 배려해 준 것이었고, 중앙 정부의 귀족들도 거들어서 좋은 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로만을 반긴 것은 바로 한스였다.

“도련님!”

언제나 한결같았다.

한스는 짧은 다리로 쪼르르 따라오더니, 로만의 겉옷을 챙겨 주고는 세심하게 이것저것을 살폈다.

“남부 전선에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이 한스, 도련님의 소식을 듣고 심장이 얼마나 떨렸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별일 없었다.”

“그렇습니까?”

방긋 웃는 한스.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날, 로만은 오랜만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한스가 미리 몸을 풀어 줄 욕조의 따뜻한 물과 향긋한 향초, 그리고 드미트리에서 즐겨 먹었던 음식들을 준비해 두었기에 안락한 시간을 보냈다.

휴식은 훈련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휴식을 취할 때만큼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 냈고, 로만은 전장에서 얻은 상처를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며칠 뒤.

로만은, 한스로부터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

“……도련님.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로렌 도련님을 만나봐 주실 수 없겠습니까?”

로렌 드미트리.

로만으로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혈연의 존재가 눈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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