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2)
대화를 길게 끌 이유가 없었다.
파비우스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목적을 밝혔다.
“크리스 님을 영입하고 싶습니다. 일단 조건부터 말씀드리죠. 저희는 크리스 님을 위해…….”
“필요 없습니다.”
말을 툭 끊었다.
아예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훈련에 몰두하는 크리스의 모습에, 파비우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니, 조건도 들어 보지 않고 필요 없다니요. 저는 베네딕트 후작님의 사람입니다. 귀족파의 수장이자 중앙 정부의 실세. 카이로 왕국에서 살면서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는 모를 리가 없겠지요. 인생을 뒤바꿀 기회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돈? 크리스 님이 평생 먹고살 만큼의 돈을 지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명예? 카이로에서 베네딕트 후작님을 모시는 것만큼의 명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앞으로 귀족이 되기를 바란다면, 베네딕트 후작님은 친히 당신에게 귀족의 작위를 내려 주실 겁니다. 무엇이든 말하십시오. 카이로 왕국에서 저희가 드리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목소리에 자부심이 넘쳤다.
그의 말.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사람들은 허수아비 왕을 제외하고 세 개의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가진다고 말하지만, 카이로 왕국에서만큼은 베네딕트 후작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다.
앞으로 카이로에서 살아갈 생각이라면.
베네딕트 후작을 따른다는 사실은, 인생을 편리하게 해 줄 많은 혜택을 부여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파비우스 백작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혹시라도 로만 드미트리 님을 배반하는 행위라는 걱정이 든다면,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도 언제고 베네딕트 후작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가 될 사이인데, 그 시기를 일찍 앞당긴다고 해서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건 선후(先後)의 문제입니다. 나중에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라 우리와 함께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조금 일찍 우리의 손을 맞잡고 신임을 받을 것이냐. 그 차이입니다.”
피식.
크리스가 웃었다.
파비우스 백작의 제안.
반년 전이라면 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제안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주군이 베네딕트 후작님의 사람이 되리라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야 당연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헥토르 왕국에서, 살아 있는 권력을 거부할 사람은 없습니다.”
웃겼다.
파비우스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잘 몰랐다.
크리스가 곁에서 지켜본 그는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적당한 타협으로 손을 맞잡을 수는 있어도, 자신의 머리 위에 서겠다고 말한다면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인물이다.
언제고 대륙 최고로 올라서겠다던 로만의 발언. 크리스는 그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파비우스 백작의 말은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크리스가 말했다.
“그 어떤 조건을 제안해도 저는 주군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은 베네딕트 후작님이 제게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단언컨대 그 누구도 주군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로만의 가르침.
새로운 세상의 지식.
이미 받은 것만으로도 값어치를 따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리스는 로만을 실망시킬 그 어떤 선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바르코와 헥토르.
그때는 다들 그들이 무조건 승리한다고 말했지만, 로만의 반대편에 선 그들은 압도적인 차이로 당해 버렸다.
만약에 로만이 베네딕트 후작을 택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로만의 반대편에 설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한 확신을 부여했다.
너무나도 단호한 태도에.
파비우스 백작은 말을 잃었다.
크리스를 영입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토록 강한 반발에 부딪힐 줄은 몰랐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습니다.”
걸음을 돌렸다.
한바탕 난리라도 피우고 싶었지만, 로만의 사람을 공격할 만큼 그는 대책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파비우스 백작의 뒤로.
크리스의 음성이 들렸다.
“혹시라도 다른 동료들을 회유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누구도, 주군의 뜻에 반하는 선택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때까지는.
파비우스 백작은, 크리스의 말을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 * *
크리스의 말은 옳았다.
다음 상대.
케빈이었다.
전장의 귀신처럼 싸우는 그의 모습에, 크리스와 똑같은 제안을 말했다.
그런데.
“다시는 제게 그런 제안은 하지 마십시오. 제게 주군은 인생의 전부입니다. 주군이 베네딕트 후작님을 따른다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지만, 주군을 등지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라고 강요한다면 저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부디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상당히 공격적인 발언이었다.
로만을 생각해 분노를 억누를 뿐, 케빈은 파비우스 백작의 제안에 상당히 화가 난 기색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상대.
오라를 사용하며 대단한 활약을 보여 주었던 용병 출신 푸키와 볼칸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주군과 얘기가 된 사항입니까? 저는 절대 독단적으로 주군에 반하는 선택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신 얘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파비우스 백작님. 그게 얼마나 좋은 조건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하실 생각이라면, 저희에게 주군의 의미가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를 좋게 봐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주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고, 그렇기에 그분을 배반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배반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선후의 문제라고 말했는데도, 파비우스 백작의 제안에 군침 한번 흘리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평민 출신인 헨더슨만큼은 혹하는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아예 귀를 막고 시선을 피했다.
명백한 무시.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감히 카이로의 귀족을 상대로, 그들은 조금도 타협해 주지 않았다.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인복(人福)이 있어서 대단한 인재들을 거느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로만의 수하들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로만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물론 크리스는 애초에 재능을 타고났다.
하지만 평민 출신의 케빈과 헨더슨, 그리고 전쟁 용병으로 살았던 볼칸과 푸키는 로만의 도움으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크리스 또한, 로만으로 인해 베네딕트 후작이 탐낼 만한 인재로 성장한 것이기도 했다.
파비우스 백작.
그가 넋을 잃은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대체 이렇게까지 충성하는 이유가 뭐야?”
문득.
로만이라는 사람이 더욱 궁금해지는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 * *
그 시각.
로렌 드미트리는 시험을 앞두고 훈련에 임했다.
“흐읍!”
타닥!
이를 악물고 허수아비를 강타했다.
움직이지 않는 허수아비의 모습에서 윌리엄 카스트로를 투영했고, 연습 대련 때와는 다르게 과감한 공격으로 허수아비의 급소를 노렸다.
깔끔한 공격이었다.
실전에서는 정말 한심할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가상의 대련에서 로렌 드미트리는 제법 위력적인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얼마나 훈련에 몰두했을까.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는데도, 로렌 드미트리는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후욱, 후욱.”
숨이 차올랐다.
팔과 다리는 떨렸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한스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자, 도저히 훈련을 끝낼 수가 없었다.
“예. 제가 어찌 도련님에게 거짓을 고하겠습니다. 로만 도련님이 달라진 행보를 보여 주신 덕분에, 최근에 로메로 영주님께서 정말 행복해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저녁에는 숙소로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만나면, 로만 도련님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
그중 아버지가 행복해한다는 말이 뇌리에 남았다.
커 가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치부가 되는 것만 같았는데, 망나니라 불리던 형은 다른 존재로 거듭났다.
‘대체 로만 형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로렌은 한스를 믿었다.
한스는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고, 로만 드미트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기에 세간의 소문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식의 한계가 있다.
로렌 드미트리가 기억하는 로만은 회생불능의 망나니였는데, 괴리감이 생길 정도로 평판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카이로의 영웅.
최연소 랭커이자, 버틀러를 쓰러트린 천재 검사.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로드웰 드미트리가 그랬다면 덤덤히 받아들였겠지만, 상대가 로만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로만 형도 달라졌어. 그런데 나는 대체 왜. 아직도 옛날이랑 똑같이 한심하기만 한 걸까.’
어쩌면.
로렌은 자신이 로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비교 대상이 있기에 뒤처져도 괜찮았었지만, 지금은 자신 혼자만 한심한 낙오자가 되었다.
“으아아아아!”
타타탁!
검을 휘둘렀다.
경련을 일으키는 팔을 억지로 휘두르며, 허수아비를 미친 듯이 가격했다.
그러다.
휘청.
균형을 잃고 땅바닥을 굴렀다.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로렌 드미트리는,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보며 울음을 삼켰다.
“……진짜 이건 아니잖아.”
드미트리의 삼남.
윌리엄 카스트로가 말하던 쓰레기는 자신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데, 자신 하나로 인해 드미트리 가문이 무시를 받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팔로 얼굴을 가렸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만, 우는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고개를 들자, 로렌 드미트리는 자신의 기억과는 달라진 형을 발견했다.
* * *
주변의 상황.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낙오자의 전형적인 모습.
로만은,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한스로부터 네 얘기를 들었다. 나를 찾아왔었다고. 할 말이 있다면 지금 말해도 좋다.”
로렌을 찾아온 이유.
로만은 그 과정을 생략했다.
한스가 걱정이 되는 마음에 부탁했고, 왕실 아카데미에서 괴롭힘을 당한 정황을 알고 있는데도,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언급하지 않았다.
가만히 로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기다릴 뿐이었다.
먼저 상대가 바라는 대답을 해 주는 게 아니라, 직접 말하기를 원했다.
“……별일 아니에요.”
로렌이 시선을 피했다.
이 상황.
그로서는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현실을 이기지 못해 발악하고 있는 모습을, 로만이 지켜보았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만약.
조금만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면.
로렌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형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고, 자신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해질 수 없었다. 그냥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괜히 얼룩처럼 남겨진 눈물 자국이 로만에게 보일까 봐, 로렌은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한심한 녀석.”
툭 내뱉은 말.
로만은 걸음을 돌렸다.
굳이 로렌을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려는 로만의 모습에, 순간 로렌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로만 형!”
한심하다는 말.
비수처럼 박혔다.
로만 또한 자신과 같은 신세였기에.
“말할게요. 제가 왜 형을 찾아갔는지. 전부 말하겠다고요!”
용기를 냈다.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로만은 걸음을 멈추고는, 로렌의 모습을 바라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