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615)

119화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3)

로렌이 말했다.

“……우연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형이 헥토르 왕국을 물리치고, 남부 전선을 적으로부터 구했다는 소문을요. 처음에는 잘 믿기지 않았어요. 제가 기억하는 로만 형은 검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애초에 국방의 의무를 피하려고 저에게 대신 가 줄 수 없냐고 부탁까지 했었으니까요.”

한 1년 전?

그리 오래된 기억이 아니었다.

로만은 로렌에게 연락했고, 장남을 대신해서 막내가 가문의 짐을 짊어져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때는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사실 다른 귀족 가문들은 장남에게 국방의 의무를 맡기지 않는다.

힘이 있으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든가, 차남과 같은 다른 형제가 대신 의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로메로 남작은 로만 드미트리를 전장으로 밀어 넣었다. 로드웰을 후계자로 낙점한 것도 있었지만, 스물 중반이 되도록 드미트리에서 말썽을 피우는 로만이 군대 입대를 계기로 정신을 차리길 바랐다.

그런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차마 로드웰에게는 연락하지 못하고, 로렌에게 연락해서 하소연을 내뱉었다.

한심한 형이었다.

로드웰처럼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에 로만을 그리 나쁘게만 생각하진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와 로렌 드미트리.

평민 출신 가문에서 태어난 그들은, 하필이면 로드웰 드미트리라는 너무나도 막강한 비교 대상과 함께 컸다.

이해했다.

로만의 이탈을, 로렌은 진심으로 헤아렸다.

“그런데 못 본 사이에 형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저와 비슷한 신세였던 로만 드미트리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이제 형을 보면서 카이로의 영웅이라 부르고 있어요. 대체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거예요? 형이랑 나는 알잖아요. 변방 출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로드웰 형 같은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적어도 형과 나는, 주변의 기대감에 부응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잖아요.”

처음이 힘들 뿐이었다.

속내를 얘기하자.

그간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나는 내가 너무 쪽팔려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보겠다고 로드웰 형을 따라 수도로 올라왔는데, 로드웰 형이 S클래스 반으로 승격할 때까지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솔직히 아직 마나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남들은 마나를 척척 느끼면서 한두 달 만에 승급하기도 하는데, 저는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D클래스로 수업을 받을 뿐, 언제 E클래스로 내려갈지 몰라요.”

울먹거렸다.

집에는 차마 말하지 못한 현실에, 그는 로만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형을 찾아갔어요. 형은 나랑 같은 신세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나와는 다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거예요? 나도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이 되고 싶어요. 항상 괜찮은 척, 잘하고 있는 척. 억지로 웃으며 연락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성과를 보여 주고 싶다고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펑펑 울었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서러움을 쏟아 냈다.

본래의 로만도 모르는 모습이었다.

로렌 드미트리.

가문의 사람들은 그가 로드웰 드미트리와 같이 수도에서 잘 지내는 줄 알았다.

물론 로드웰처럼 대단한 행보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수업을 받으며 망나니라 불리는 로만과는 다르게 속을 썩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로메로 남작이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기에. 로렌 드미트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인도 수도 생활이 힘들고 너무나도 싫었지만, 자식 중에 문제아는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더는 대화를 진행할 수 없었다.

울음이 완전히 터져 버렸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우는 그 모습에, 로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로렌이 진정될 때까지, 로만은 가만히 로렌의 모습을 바라보며 울음이 그치길 기다려 주었다.

* * *

로렌은 한참을 울었다.

여린 아이다.

아직 겨우 18살밖에 되지 않았고,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로렌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나는 로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악감정은 없었다.

로렌에 대한 기억이 나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차남인 로드웰 또한 크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이다.

본래의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지만, 로만은 사람들과의 인연마저도 똑같이 이어 갈 생각은 없었다.

본래의 로만은 많은 업보(業報)를 쌓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렇기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피해를 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로메로 남작.

아들에 대한 반복적인 실망으로 기대감을 버렸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크리스.

그는 로만을 싫어했다.

로메로 남작이 보는 앞에서도 로만을 공격하려던 그는, 지금은 로만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 들어갈 것 같은 충성심을 보였다.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둘 외에도 마스터 블랙스미스와 같은 많은 사람이 로만을 적대했지만, 로만은 그들과 새로운 연을 맺었다.

고로.

반대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자신을 받아 주었듯, 자신도 새로운 인연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나는 로렌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가 내게 거리를 둔다면, 나는 같은 형제라 할지라도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로드웰도 마찬가지다. 장남과 차남의 신분은 복잡한 악연(惡緣)을 만들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로드웰을 적대할 이유로는 적합하지 않다. 로렌이든 로드웰이든. 그들을 평가하는 것은 본래의 기억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할 것이다.’

로만의 방식이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새로운 기준을 내세웠다.

자신의 삶은 오롯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기에, 로만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보였다.

“로렌.”

“……네.”

동생을 불렀다.

아직은.

그에게 특별한 애정은 없었다.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그를 특별히 챙겨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무시를 받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그건 드미트리 가문, 나아가 내 평판을 깎아내리는 일이다. 내가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올라갔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물음의 답을 원한다면 네가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라. 곧 검술 시험이 있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로렌 드미트리라는 사람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똑똑히 보여 주어라.”

한 번쯤은.

기회를 줄 수 있었다.

같은 성을 지녔기에, 형제를 죽여야만 살 수 있었던 전생과는 다르게 로만은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지금부터는 로렌의 몫이다.

자신을 증명한다면.

동생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자신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 * *

날이 밝았다.

로렌의 눈은 퉁퉁 부었다.

하도 운 탓에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밤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생각에 눈빛만큼은 달랐다.

‘물음의 답을 원한다면 자격을 증명하라고 했어.’

이상했다.

그 말에서.

로렌은 왠지 모를 용기를 느꼈다.

그동안은 끝없는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도는 기분이었는데, 자신과 같은 현실을 이겨 낸 존재가 답을 알려 주겠다고 길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 낸다면.

카이로가 찬양하는 자신의 형은 드미트리의 얼간이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말해 줄 것이다.

머리가 맑아졌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초월적인 힘을 얻은 것이 아닌데도, 마음이 평안하게 가라앉았다.

시간이 되었다.

검술 시험을 위해 학생들이 훈련장에 모였고, 교수는 학생들의 면면을 살피더니 시험을 진행했다.

“지금부터 시험을 진행하겠다. 첫 번째 차례는…….”

앞선 시험.

차례로 호명된 학생들이 서로의 실력을 겨루었다.

희비가 갈렸다.

어떤 학생은 승리에 기뻐했고, 어떤 학생은 패배에 슬퍼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교수의 시선이 로렌을 향했다.

“로렌 앞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윌리엄 앞으로.”

이번 대결의 상대.

윌리엄 카스트로가 웃으며 일어나는 모습에도, 로렌은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 *

“하, 진짜. 인생 재밌다니까. 하필이면 왜 나랑 붙냐.”

윌리엄이 이죽거렸다.

이번 시험을 진행하기 전.

친구들끼리 주고받은 말이 있었다.

누가 로렌과 붙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그 사람은 C급으로 직결하는 워프 게이트를 탄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윌리엄은 로렌을 마주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모습에 재미가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번에는 아주 작살을 내주마.’

카스트로 가문.

중앙 정부 소속의 엘리트 출신이다.

윌리엄 카스트로의 아버지는 귀족파를 지지했고, 어렸을 때부터 수도에서 살았던 그는 뼛속까지 엘리트주의로 물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태생의 한계가 있고, 누구 뱃속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그 쓰임새가 정해진다고.

항상 그런 말을 들으며 살아왔기에, 윌리엄 카스트로는 드미트리 가문의 이름을 듣자마자 혐오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

엘리트를 위한 장소다.

그런데 평민 출신 가문의 자제가 자신과 동급생으로 있다니.

로드웰 같은 확실한 실력파면 몰라도, 로렌 같은 떨거지가 가문의 힘을 이용하는 게 참 같잖았다.

그래서 벼르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로렌을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교수가 말했다.

“시험의 평가 기준은 승패가 아니다. 그간의 가르침을 실전에서 얼마나 잘 녹여 냈는지를 평가할 것이며, 극단적인 공격은 삼가도록.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다.”

삐익.

신호가 떨어졌다.

시작과 동시에.

윌리엄 카스트로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시간을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로렌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할 테니, 과감한 움직임으로 기세를 잡았다.

타악!

“크윽.”

공격이 막혔다.

로렌은 다급하게 검을 들었지만, 피지컬적인 차이에 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막았는데도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윌리엄 카스트로는 그에 멈추지 않고 연계 공격을 펼쳤고, 정신없이 내리꽂히는 공격에 로렌이 연신 밀렸다.

탁!

타타탁!

“이런 겁쟁이 새끼!”

압도적인 승부였다.

애초에 탈 D클래스로 평가받는 윌리엄 카스트로의 공격을, 최약체인 로렌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상대를 궁지에 몰아붙인 윌리엄 카스트로는, 순간 로렌이 드러낸 틈을 발견했다.

‘끝이다.’

활짝 드러난 가슴.

그대로 내리찍어 버릴 생각이었다.

어디 뼈라도 하나 부러진다면, 로렌은 더는 아카데미에 남을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훅!

검을 내리꽂았다.

그때였다.

순간.

로렌이 오히려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대로라면 목검이 머리에 꽂힐 텐데도, 결의에 찬 표정으로 윌리엄 카스트로를 올려다보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로렌이 이를 악물었다.

팍!

목검이 스쳐 지나갔다.

살짝 고개를 틀어 피했는데도, 눈가를 스치며 얼얼한 충격과 함께 핏물이 튀었다.

동시에.

빡.

로렌은, 윌리엄 카스트로의 턱을 그대로 후려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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