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615)

123화 새로운 삶, 새로운 관계 (1)

툭.

로메로 남작이 통신을 끊었다.

막내의 연락에 환하게 웃었던 얼굴은,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카스트로 이 개새끼들이.”

로렌의 연락.

로만이 동생을 도와주려다가 위험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믿기진 않았다.

블러드 팽 사건을 시작으로 로만이 보여 준 행보는 압도적이었고, 이제는 로만이 어디서 해코지를 당하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로렌이 아니었다면, 이 문제를 이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로렌은 괜한 걱정을 끼칠까 봐 안부 연락도 조심하는 아이다. 리한나의 조심성과 배려심을 빼닮은 로렌이 울면서 연락할 정도라면, 로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에라도 병력을 이끌고 카스트로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메로 남작.

그는 자신의 단점을 알았다.

장인으로서는 정점의 자리에 올랐을지 몰라도,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불같은 성격은 항상 중요한 상황에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한때 정말 많은 고생을 했었다.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문제를 수습하기 일쑤였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가 닥치면 아내의 조언을 구했다.

리한나는 현명하다.

그녀를 만나 로메로 남작은 자신의 단점을 보완했고, 이번 문제의 해결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리한나를 찾아갔다.

정원에 나가 물을 주던 그녀는, 로메로 남작의 말에 표정이 돌변했다.

“다시 한번 말씀해 보세요. 로만이 지금 어떻다고요?”

“방금 내가 말한 대로요.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알다시피 카스트로 가문은 중앙 정부의 소속이고, 베네딕트 후작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오. 그를 건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카스트로와의 싸움만을 의미하지 않소. 최악의 상황에는 중앙 정부에 찍힐 수도 있는 일이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실을 직시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오히려 리한나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중앙 정부와의 관계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예요. 지금 우리의 눈앞에 직면한 문제는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가 위험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드미트리는, 그렇게 약한 가문이 아니잖아요.”

허락이 떨어졌다.

리한나마저도 동의하는 일이라면.

로메로 남작은 더는 분노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회의실로 향한 그는, 하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가문의 가신들을 소집하라! 중요한 문제이니, 그 누구도 불참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 * *

드미트리.

평소에는 영주의 권위를 내세우는 곳이 아니다.

로메로 남작은 일반 평민들과도 술을 어울릴 정도로 벽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벼락같이 내린 명령에는 모두가 군말 없이 따랐다.

모든 업무가 종료되었다.

긴급한 일을 처리하던 사람들도, 로메로 남작이 중요한 문제라고 언급했다는 말에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곧바로 모였다.

드미트리의 회의실.

가문의 가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로메로 남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오는 길에 대략적인 설명은 들었을 것이다.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 로만 드미트리가 지금 카스트로 가문과의 불화로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다. 로렌이 연락한 바에 따르면 카스트로 가문으로 끌려간 것이 마지막 행적이었다. 상대는 중앙 정부의 카스트로다.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만, 나는 내 아들의 위험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다.”

이번 일.

단순히 아들을 위해 나서는 문제가 아니다.

드미트리의 이름을 걸고 병력을 움직이는 순간, 극단적으로는 멸문(滅門)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가신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미 결단을 내렸지만, 드미트리 가문의 문제는 나 혼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네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에 과반수가 반대한다면, 카스트로와의 전면전보다는 다른 방법을 고민해 보도록 하겠다.”

결정은 가주가 내릴지라도.

책임은 모두가 떠안는다.

로메로 남작은 폭군이 아니었고, 지금의 드미트리를 만든 가신들의 동의를 반드시 구하고 싶었다.

‘아마 반발이 심하겠지.’

지금부터는 설득의 문제다.

격한 반발을 예상하고 머릿속으로 대답을 준비하는데, 회의실 한편에서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나왔다.

“저는 동의합니다.”

조나단 기사단장이었다.

드미트리 가문의 군사력(軍事力)을 총괄하고 있는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영주님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습니다. 중앙 정부의 인물과 대척한다는 건 상당한 위험을 의미하지만, 그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이지 않습니까? 이건 머릿속으로 계산할 문제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은 드미트리 가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고, 우리는 그 상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한때.

조나단은 로만을 싫어했다.

검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와서는 대놓고 싫은 티를 내고, 가문의 사람들을 툭툭 건드리는 로만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완전히 달라졌다.

로만.

그는 드미트리의 상징이 되었다.

카이로의 최연소 랭킹 기록을 갈아치우고, 헥토르와의 전쟁에서 활약하며 영웅이라 불리지 않았던가.

조나단은 살면서 항상 평화로운 길만 택할 수 없음을 알았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평화를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한시도 현실에 안주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라도 드미트리의 전력을 영주님 앞에 대령할 수 있습니다.”

한고비를 넘겼다.

전쟁을 위해서는.

적어도 세 핵심 인물의 동의가 필요했다.

한 명은 리한나 드미트리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조나단 기사단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스터 블랙스미스 헨드릭. 후일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의 동의도 필요하다.’

어려운 문제였다.

헨드릭은 평화를 추구했다.

무기를 만들어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대장장이들이 전쟁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관문.

설득이 쉽지만은 않으리라.

하지만, 로만이 위험한 상황에서 회의로 오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먼저 말하려는 그때.

“지금 당장 드미트리의 대장간을 총가동하겠습니다. 조나단 기사단장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말씀해 주십시오.”

황당하게도.

헨드릭이 먼저 분노한 음성을 터트렸다.

* * *

로메로 남작의 생각처럼.

헨드릭은 평화를 추구했다.

무기를 만드는 사람이 전쟁에 직접 관여하면, 그때부터는 철을 두드리면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나단과 마찬가지로 한때 로만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건 과거였다.

만약 지금 드미트리에서 로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드미트리의 백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은 드미트리의 미래입니다.”

남부 전선으로 떠나기 전.

로만은 드미트리의 근간을 뜯어고쳤다.

문제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광산의 문제는 쉽게 고칠 수가 없었는데, 대대적인 투자라는 역발상으로 영지민들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것이 선순환의 시작이었다.

영지민들은 안전한 환경 덕분에 안정을 찾았고, 광산의 작업량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사람들은 더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았고, 그들이 소비하는 돈으로 인해 영지에서의 상업도 발전했다.

단 하나의 변화가.

나비효과처럼 번져 나갔다.

드미트리의 노동자들은 웃는 일이 많아졌고, 그들은 이 변화가 로만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로만 도련님의 선택은 그 누가 강요한 게 아니다. 본인 스스로가 가문의 근간이 되는 철광산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영지민들의 현실을 이해해 준 결단 덕분에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로만 도련님이야말로 드미트리의 미래고, 앞으로 우리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 분이다. 우리는 절대 로만 도련님의 위기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로만에게 선물도 받았다.

아직도 샐러맨더를 볼 때면, 가문의 장남이 이런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헨드릭이 말했다.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음성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카스트로고 뭐고 간에 로만 도련님을 건드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영주님. 대장간의 광부들, 철광산의 인부들, 그리고 나아가 드미트리의 영주민들까지. 저희는 로만 도련님에게 큰 은혜를 받았고, 그런 은혜를 잊어버리는 짐승 새끼들이 아닙니다. 아무도 이 선택에 반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전쟁이라는 결단을 내리신다면 확고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십시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모두의 의견이 모였다.

너도나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반응에, 로메로 남작은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이게 대체.’

그제야 알았다.

드미트리.

동북쪽 일대의 패자는, 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 *

명령이 떨어졌다.

전쟁 준비를 위해.

가능한 인력을 모두 동원했다.

병사들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무장할 최고급 무구와 식량 확보를 위해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뭐?”

“그게 사실이야?”

철광산의 광부들.

그들이 소식을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는 말에, 광부들은 곧바로 마스터 제이콥을 찾아갔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어디서 드미트리의 보물을 건드려? 지금 당장 광부들을 모두 불러모아! 우리가 직접 싸우진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서 전쟁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로메로 남작의 명령에는 광부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은 고된 작업으로 인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고, 특히 야간 작업자들은 한창 자고 있었다.

그런데.

제이콥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군말 없이 움직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야간 작업자들도, 새빨개진 눈으로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씨발럼들이. 로만 도련님을 건드렸다고? 내가 뭘 하면 돼? 죽창을 들고 싸우면 되는 거여?”

“다 깨워! 지금 잘 시간이 아니야!”

그들 중에는.

안전 책임자인 모르칸도 있었다.

순식간에 불길처럼 번지는 열의에, 드미트리가 시끄럽게 들썩였다.

화륵.

화르르륵.

대장간들이 동시에 가동되었다.

화덕에 불이 붙었고, 마스터 블랙스미스 헨드릭의 명령에 대장장이들은 빠르게 무기들을 점검했다.

캉!

카앙!

“너희들 모두 소식을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로만 도련님이 위험하다. 우리가 최대한 작업을 빨리 끝낼수록, 로만 도련님이 안전하게 드미트리로 돌아올 수 있다. 최근에 너희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지. 드미트리에서 사는 게 참으로 행복하다고. 우리는 모두 드미트리 가문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값을 해라. 은혜를 모르는 짐승 새끼가 아니라면, 쉬지 말고 움직이란 말이다!”

헨드릭이 불같은 음성을 토해 냈다.

드미트리.

그 전체가 움직였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드미트리가 빠르게 전열을 갖추어 갔다.

그리고 그건.

로렌이 연락하고서 겨우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로렌이 드미트리에 어떤 폭탄을 떨어트렸는지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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