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615)

125화 새로운 삶, 새로운 관계 (3)

오해는 금방 풀렸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설명 들은 로메로 남작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사과를 했다니 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하십시오. 드미트리 가문은 제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로만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로렌을 건드리는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그때는 각오하셔도 좋습니다. 드미트리가 멸문의 길을 걷는다고 할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카스트로를 나락으로 빠트릴 것입니다.]

툭.

통신을 끊었다.

아직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런데 화면 속의 카스트로 백작이 사라지자, 로메로 남작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크하하하, 내 아들이 정말 다 컸구나.”

로만 드미트리.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아이가, 동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겠다고 카스트로 가문을 찾아갔단다.

아비로서 뭉클한 마음이 일었다.

드미트리의 삼남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모습을 보였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게다가.

집무실 밖.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그들의 모습에, 새삼 로만의 위상이 다르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지도자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짧은 시간이지만, 로만은 드미트리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휘어잡았구나. 드미트리의 수뇌부부터 시작해서 대장간의 장인들, 철광산의 광부들까지. 드미트리의 근본이 이제는 로만 드미트리를 지도자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의 신뢰.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로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들의 반응에, 한 아이의 아비로서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민이었던 시절을 같이 경험했던 아픈 손가락.

로만의 변화는 로메로 남작을 들뜨게 했다.

쾅!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뇌부들을 향해, 로메로 남작은 호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당장 파티를 준비하라! 내 아들을 위해, 드미트리의 미래를 위해 큰 결심을 한 모든 사람에게 내가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대장간, 철광산, 음식점 할 것 없이 모두 문 닫아! 오늘 하루는 마음껏 먹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거나하게 취하자꾸나.”

그날의 해프닝.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불타오르게 했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사건은 소문을 낳는다.

드미트리와 카스트로의 사건.

소문의 시작은, 아카데미 학생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내가 직접 봤다니까.”

“정말이야?”

“그래. 그 기세등등하던 윌리엄 카스트로가, 자기 아버지를 대동하고 왔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오히려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니까 카스트로 백작이 얼른 사과하라면서 화까지 냈다니까? 진짜 카이로의 영웅이 대단하기는 한가 보다. 카스트로 백작이면 그래도 수도의 권력자 중 한 명인데, 그가 가문의 장남이 사과하는 꼴을 그냥 지켜만 보다니. 카이로의 권력 체계가 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무릎을 꿇고 사과하던 윌리엄의 모습.

학생들로서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자랑하던 윌리엄 카스트로가, 제대로 박살이 나 버린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드미트리에서 넘어온 상인들은 새로운 말을 퍼트렸다.

“겨우 몇 시간이었지만, 드미트리 상단과 거래를 하는 상인들에게 이런 말이 돌았었어. 카스트로 가문과 관련한 모든 거래를 끊고, 그들에게 불이익이 되는 방법을 제안한다면 드미트리가 크게 보상한다고 말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최근에 카스트로와 로만 드미트리의 사건이 터졌을 때, 드미트리 가문은 카스트로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했다는 거야.”

“와. 변방의 가문이 카스트로를 상대하겠다는 건가.”

“그렇지. 그런데 더 소름이 돋는 건,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거대 자본들이 드미트리 쪽으로 확 기울었다는 거야. 카스트로와 드미트리. 수도의 실세와 변방의 가문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충격적이게도 거대 자본들은 드미트리의 승산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의미지. 내가 옛날부터 드미트리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카이로의 영웅을 배출하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졌어.”

이번 사건.

하나의 사실을 알렸다.

그동안 드미트리 가문은 출신으로 인해 상당한 저평가를 받았지만, 막대한 재력과 더불어 로만 드미트리라는 무력을 갖추면서 그들의 평가가 단번에 반전되었다.

중앙 정부라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변방의 강자.

드미트리는 이제 변방에 있다고 무시할 수 있는 그런 가문이 아니었다.

소문은 퍼질수록 몸을 크게 부풀렸다.

로만과 드미트리가 카스트로를 완전히 짓밟았다는 소문에, 카스트로의 평판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런 상황에도.

카스트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실이 소문보다도 더 최악이었기에.

차라리 드미트리가 생각보다 강했다고 끝나는 것이, 카스트로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혹시 카스트로의 일로 베네딕트 후작이 분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소문에 의하면 오히려 카스트로에게 화를 냈다는 말이 돌았다.

카이로의 영웅을 건드린 것은 명백히 카스트로 가문이 잘못한 일.

살아 있는 권력인 베네딕트 후작조차도 로만 드미트리의 편을 들어주면서, 드미트리는 중앙 정부의 비호(庇護)를 받는 신흥 세력으로 단번에 급부상하였다.

단 한 번의 사건.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이번 사건을 전후로 드미트리 가문의 위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 * *

세간의 소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로만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특히 정말 전쟁을 준비하고 행동에 옮겼다는 소문에, 로만으로서는 다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드미트리는 전쟁에 부정적인 가문이다. 그런 그들이, 나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

이번 삶.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었다.

죽음 이후에 로만 드미트리로서 눈을 떴고, 언제나 그렇듯 눈앞에 닥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았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로만 드미트리의 삶에 빠르게 적응했지만, 이번 드미트리 가문의 결단은 로만으로서도 의외였다.

로메로 남작.

자신의 아버지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장인은 장인으로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되도록 평화적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그런 이유로.

드미트리는 가진 힘에 비해 큰 권력을 얻지 못했다.

‘로메로 남작의 선택은 그만의 결정이 아니다. 그가 전쟁이라는 결단을 내리고, 드미트리를 구성하는 핵심 인물들이 찬성표를 던졌기에 드미트리가 전쟁을 실천에 옮겼을 것이다. 변방에 안주하던 드미트리라는 작은 사회가. 나 하나를 위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전생.

천마로서의 삶은 모든 것이 계산적이었다.

약육강식이라는 이름 아래에 어떤 일이든 허용되었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다.

자연스레 백중혁의 인격은 극단적으로 변해 갔다.

울타리 안과 밖의 명확한 경계선.

사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어중간한 경계.

로만에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로만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희생하는 판단을 내렸다.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다는 건가.’

새로운 삶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사람들이 편견을 잊고 자신을 바라봐 주었듯이, 로만도 그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드미트리의 결단이었다.

특별한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닌데도, 누가 그렇게 행동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로만에게 보답하고자 순수한 호의를 보였다.

“도련님. 요새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삶에 충실한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지는 마십시오.”

한스였다.

상념에 빠진 로만의 모습을 보며, 한스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물론.

전생의 자신에게도 한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지나 정점의 오른 자신을 오로지 ‘한 명의 사람’으로 봐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렇기에 한스의 이 배려심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았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감정.

한스를 바라보는 로만의 눈빛이 포근하게 변해 갔다.

웃었다.

드미트리의 소식에.

눈앞에 보이는 한스의 모습에.

로만은 차츰, 주어진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 * *

-크리스-

카스트로 사건.

한참 훈련에 몰두하던 크리스는, 헐레벌떡 달려온 병사를 통해 사건의 소식을 들었다.

“크리스 님! 지금 주군이 위험합니다!”

“……주군이 위험하다고?”

우뚝.

검을 멈추었다.

크리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병사는 황급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드미트리 가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주군이 로렌 도련님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카스트로 가문에 붙잡힌 것 같은데,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할까요?”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주군이 위험하다는 말.

말 같지도 않았다.

“넌 아직도 주군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나 보군. 주군이 어떤 행보를 보인다면, 그것은 철저한 계산 아래 진행되는 일일 것이다. 카스트로는 중앙 정부의 귀족. 드미트리 가문에서는 걱정할 만한 상대이지만, 장담컨대 지금 위험한 쪽은 주군이 아니라 카스트로 가문일 것이다.”

“……그럼 그냥 기다리자는 말씀입니까?”

“아니.”

검을 챙겼다.

주군을 믿는다.

하지만.

믿는 것과는 별개로, 만일의 가능성도 대비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지금 당장 병력을 불러모아라. 주군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명령을 수행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케빈-

케빈은 크리스보다 먼저 사건에 대해 알았다.

그는 동료에게 이 사실을 크리스에게 전달해 달라고 말한 뒤, 곧바로 카스트로 가문을 향해 달렸다.

‘감히 주군을 건드리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로만이 위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헥토르 왕국의 강자들을 상대로도 압도했던 로만인데, 겨우 카스트로 가문 녀석들에게 당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화가 치밀었다.

자신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사람인데, 이따위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카스트로 가문을 향한 분노가 들끓었다.

겨우 10분.

카스트로의 대저택에 도달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누구냐?”

경비병이 나와 물었다.

수상한 존재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케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문 바로 앞에 털썩 앉았다.

척.

‘주군을 기다린다.’

아직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

섣부른 선택은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일.

케빈은 기다렸다.

만약에라도 안에서 비명이 들리는 순간, 케빈은 주저하지 않고 경비병을 베고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너 정체가…… 흐읍.”

따져 물으려던 경비병이 흠칫 놀랐다.

케빈의 눈빛.

살기(殺氣)가 번들거렸다.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경비병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더니 정문의 자물쇠를 확실히 채웠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로만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케빈은, 방해되지 않는 곳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헥토르 왕국-

카이로와의 전쟁.

헥토르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었다.

사활을 걸었고, 에드윈 헥토르가 나선 이상 반드시 승리하리란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카이로의 악마에 의해 헥토르의 별이 떨어졌다.”

패잔병들이 수도에 들이닥친 그 날.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진 것도 문제였지만, 그들이 믿고 따르는 에드윈 헥토르의 생사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이 궁금했다.

패잔병들은 넋을 잃고 카이로의 악마에게 당했다는 말만 반복했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전쟁의 관련자들.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가 제발 정신을 차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쟁에서 입던 복장 그대로 에드윈 헥토르를 위해 기도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이냐?”

에드윈 헥토르.

마침내 그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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