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서열 정리 (1)
수도를 떠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동북쪽 일대 워프 게이트에 도착한 이후, 로만과 그의 병사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해 가며 드미트리로 향했다.
남부 전선에서부터 시작된 고된 여정이다.
수도에서 체력을 조금 회복했다고는 하나, 굳이 병사들을 다그치면서까지 빠르게 드미트리에 도착할 이유는 없었다.
딱 일주일 째.
로만은 콘라드 자작의 영토에 들어섰다.
이제 이곳만 지나면 드미트리가 나오기에, 병사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드미트리와 콘라드의 경계선 부근에 도달했을 때, 이상한 광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이고!”
“올해 농사는 다 망했네!”
“이 개새끼들! 이러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먹고살라는 거야!”
일단의 무리.
아마도 농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얼추 파악되었다.
농작물을 경작하던 넓디넓은 땅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한바탕 싸움이 있었던 모양인지 농민들은 엉망이 된 얼굴로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다.
로만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떤 불이익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만으로서는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이유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크리스가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래도 드미트리의 농민들인 것 같습니다. 광업에 종사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이 콘라드 영지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콘라드로서는 먼 거리에 있는 땅을 관리하기 힘들어서 임대로 돌린다고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우뚝.
로만이 걸음을 멈추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카스트로 가문과의 사건.
로만은 드미트리 자체를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였고, 그렇다면 그들의 일은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로만이 말했다.
“크리스. 저들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들어야겠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크리스.
이윽고, 크리스는 농민들을 로만의 앞으로 대령했다.
* * *
크리스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드미트리에서 흔하지 않은 농사꾼들이었고, 로만의 물음에 봇물이 터지듯 억울함을 토로했다.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드미트리에는 경작할 수 있는 땅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미트리와 콘라드의 경계에 있는 이 땅을 빌려서 경작하는 농민들이 많은데, 저희는 콘라드 가문과 직접 계약서를 체결하고 이곳의 땅을 10년간 빌리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이제 한 달 뒤면 농작물을 수확할 시기인데, 며칠 전에 콘라드 가문에서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통보를 보내왔습니다.”
통보라는 단어에.
농민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콘라드 가문에서 직접 땅을 활용해서 할 일이 있으니, 저희보고 일주일 내로 땅을 비우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아무리 저희가 일개 평민이라고는 하나, 저희는 적합한 가격을 지불하고 이곳을 10년간 임대하겠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아직 계약 기간이 5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그들은 아무런 상의 없이 저희를 일방적으로 쫓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도련님. 정말 억울합니다. 이걸 보십시오. 저희가 못 나가겠다고 버티니까, 콘라드 가문에서 사람들을 보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흑흑, 저희는 이제 살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농작물을 수확하는 것만 바라보고 그간 열심히 일했는데, 이렇게 수확도 못 하게 하면 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농민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들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콘라드 가문은 정당한 계약을 완전히 무시했지만, 세상에는 계약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계급사회.
동북쪽 일대에서 나름대로 세력이 있는 콘라드 가문을 상대로, 일개 농민들의 항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괜히 꼬투리를 잡혔다가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나마 드미트리의 사람들이라 땅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으로 끝났지, 콘라드의 사람들이었다면 항의도 못 했을 것이다.
불합리한 상황이었다.
철저히 짓밟힌 약자의 권리에, 크리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 농민들의 사정은 딱하나,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농민들이 빌린 땅은 엄연히 콘라드 가문의 것입니다. 그들이 본인들의 소유를 환수하겠다는 것을 막았다간, 양 가문 간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콘라드 가문은 동북쪽 일대 귀족들과 그들만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고로 콘라드와의 문제는, 절대 단순하지 않습니다.”
동북쪽 일대.
바르코와 드미트리가 양대산맥이었다면, 그 밑으로는 콘라드와 같은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개개인의 세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의 울타리를 형성했다.
동북쪽 연합회.
박쥐 같은 작자들이었다.
바르코 가문이 한참 세력을 떨칠 때는 그곳에 붙었다가, 바르코 가문이 몰락하자마자 드미트리의 사교 파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평소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본인들이 위험할 때만 뭉치는 성질을 보이기에, 굳이 건드려서 서로 얼굴을 붉힐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것이었다.
동북쪽 일대의 정세는, 로만이 생각하는 앞으로의 계획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크리스.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고 해서 방관한다면, 그 누구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방관은 문제를 키울 뿐. 몸을 더 부풀리기 전에, 문제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려야겠지.”
“……!”
크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로만의 말.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크리스는 한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로만이 결단을 내렸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수하의 몫이었다.
* * *
드디어.
드미트리에 도착했다.
성문은 로만의 귀환을 반기듯이 활짝 열렸고,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나와 열렬한 환호성을 보냈다.
“로만! 로만!”
“로만! 로만!”
“카이로의 영웅! 당신이야말로 드미트리의 자랑입니다!”
난리가 났다.
그들도 소문을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남부 전선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고, 그 사건을 계기로 카이로의 영웅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드미트리의 일원으로서 엄청난 자부심이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한때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던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를 존경의 눈빛으로 보았다.
인파를 뚫고.
로만은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고, 로만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내성(內城)의 입구.
로메로 남작이, 한달음에 달려 나와 로만을 와락 안아 주었다.
“아들아. 정말 고생 많았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다마다. 드미트리와 같은 변방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느냐? 내 너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준비해 두었다. 오늘은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먹고 마시며 거나하게 즐기자꾸나.”
로메로 남작이 앞서 걸었다.
그런데.
로만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사람들의 환호와는 동떨어진 얼굴로, 로메로 남작의 걸음을 붙잡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잠시 따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영주의 집무실.
먹먹했던 귀가 안정을 되찾았다.
로만은 콘라드 가문과 있었던 일을 설명했고, 로메로 남작은 다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아들아. 세상에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예민한 문제들이 있다. 아무리 계약서를 체결했다고는 하나, 콘라드 가문이 자신들의 땅을 환수하겠다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설령 막았다고 할지라도. 드미트리의 농민들이 콘라드의 땅에서 제대로 농사를 할 수 있겠느냐? 차라리 그들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다.”
크리스와 같았다.
로메로 남작은 문제를 키우지 않길 바랐다.
심각하게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해친 것이라면 몰라도, 이번 문제는 모호한 경계선에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아버지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만약에. 드미트리가 아니라 베네딕트 후작의 사람들이었다면. 콘라드 가문은 농민들의 땅을 빼앗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순간.
로메로 남작의 표정이 굳었다.
예민한 문제였다.
의미가 없는 예시였고, 로메로 남작으로서도 로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네딕트 후작은 보통의 귀족이 아니다. 카이로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중앙 정부의 수장.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이 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나름대로 권력의 한 축을 맡고 있다지만, 카이로 왕국에서는 결국 베네딕트 후작이야말로 살아 있는 권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존재의 사람들을 그 누가 건드리겠느냐? 애초에 잘못된 예시고, 우리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딱 선을 그었다.
옳은 말이다.
베네딕트 후작을 전제로 한다면, 어떤 문제도 성사되질 않는다.
애초에 그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대체 어떻게 그의 사람들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맞습니다. 아버지의 말처럼 베네딕트 후작은 살아 있는 권력이고, 그렇기에 아무도 그의 사람들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동북쪽 일대에서 드미트리 가문의 위치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저희는 확실한 입지를 다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바르코 가문을 무너트리면서, 단언컨대 동북쪽 일대에서 저희보다 강한 세력을 갖춘 가문은 없습니다.”
“네 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드미트리가 동북쪽에서 제일 강하다고는 하나, 자신의 힘을 맹신했다가는 주변 연합의 공격으로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모른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문제를 키워서, 드미트리와 다른 세력들의 대립 구도를 만들 필요는 없다.”
“아니요.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강하게 반발했다.
로메로 남작의 말에도, 로만은 한 걸음도 물러나질 않았다.
“우리는 바르코를 무너트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동북쪽 일대는 ‘중앙 정부’의 비호를 받는 바르코 가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바르코의 힘이 중앙 정부로부터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드미트리가 실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콘라드 가문을 비롯한 귀족들은 안일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 드미트리는 바르코처럼 예민하지 않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건드린다고 할지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겠지. 드미트리는 결국 동북쪽 일대의 가문일 뿐이고, 중앙 정부와 같은 거대 세력의 비호를 받지 않으니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북쪽.
작은 세계다.
그곳의 왕은, 카이로라는 전체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아버지. 콘라드 가문은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건드렸습니다. 영지민 간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콘라드 가문이 직접 주관하는 일인데도 그들은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건드려도 된다는 안일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우리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은 드미트리야말로 동북쪽 일대 제일의 가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사납게 변했다.
헥토르와의 전쟁.
로만은 전생의 야성(野性)을 찾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포식자는, 이번 문제를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메로 남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은 동북쪽 일대의 서열 정리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확실히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불꽃이 튀었다.
동북쪽 일대.
로만은, 새로운 야망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