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서열 정리 (2)
서열 정리.
그 말에, 로메로 남작의 표정이 굳었다.
“……아들아. 네가 하는 말의 무게를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해 주마. 우리 모두에게 불편한 진실이지만,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평민 태생의 드미트리 가문을 우두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마 서열을 정리하겠다고 공격적으로 나갔다간 분명히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겠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동북쪽 일대의 혼란이다. 그 알량한 권력을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킬 순 없다.”
로메로 남작의 생각은 확고했다.
동북쪽 일대의 갑(甲).
이면에 불편한 진실이 있다 할지라도, 겉으로는 모두가 드미트리 가문을 인정하고 따라 주고 있다.
그런데 굳이.
상대의 진심을 끌어내겠다고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었다.
드미트리가 힘이 있기에, 가식이라도 끌어내는 것이지 않은가.
로만이 말했다.
“카이로의 정세가 불안하지 않다면, 저 또한 아버지와 의견이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남부 전선.
그리고 카이로의 네 세력.
그간 여러 일을 경험하며, 로만은 확실한 권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이로 왕국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습니다. 왕실은 세가 약해 수도의 귀족들을 휘어잡지 못하고, 베네딕트 후작은 살아있는 권력이라 불리며 왕실보다 더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국을 따르는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이, 실시간으로 카이로의 중요 정보들을 제국으로 빼돌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하리라 생각하십니까? 크로노스 제국이 국경을 넘어오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카이로가 전략적 요충지(要衝地)고, 분명히 머지않은 미래에 전쟁을 선포할지 모릅니다. 그때가 되면. 동북쪽 일대 귀족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건 다른 귀족들도 다르지 않다.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면, 왕국 전체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맞습니다. 문제는 징집의 권한이, 국왕이 아니라 ‘중앙 정부’에 있다는 겁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책임은 모두가 떠안는다.
그리고 세상사가 그렇듯, 지방의 귀족들은 중앙 정부에 의해 걸레를 쥐어짜듯 착취를 당할 것이다.
“카이로에서 중앙 정부는 막강한 권력을 발휘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전부를 원한다면, 우리는 나라의 위기를 외면한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전부를 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라도 반발의 목소리를 보인다면. 동북쪽 일대에 중앙 정부를 따르는 세력들이, 중앙 정부의 비호를 받아 저희를 찍어 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동북쪽 일대가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저희가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을 완전히 휘어잡아야만 합니다. 어떤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철옹성처럼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중앙 정부의 대항마(對抗馬).
로만은 동북쪽 일대를 손아귀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 시작이, 바로 콘라드 자작과의 문제였다.
“아버지. 카스트로 가문과 일련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저는 드미트리 가문의 힘이 중앙 정부의 실세들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희에게 부족한 것은 세력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왜 영지민들을 위해 나서지 않으시는 겁니까? 우리는 힘이 있고, 영지민들을 도울 명분이 있는데도. 대체 왜 희생을 감수할 용기를 발휘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로만은 아버지를 몰아붙였다.
극단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어중간한 태도를 보일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저는 콘라드 가문 따위가 제 사람들을 건드리는 것이 싫습니다. 제게 칼자루를 쥐여주십시오. 아버지가 결단만 내리신다면,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 말에.
로메로 남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 *
대화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리를 마무리하고.
집무실에 남은 로메로 남작은, 홀로 술을 마시며 상념에 빠졌다.
“……내 아들이 커도 너무 많이 컸구나.”
아들의 말.
옳았다.
드미트리 가문은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머지않은 미래에 문제가 생길 것을 알았지만, 자처해서 전란에 휩싸이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자신의 선택 한 번에 드미트리가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를 알기에, 로메로 남작으로서는 신중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로만의 마지막 말은 엄청난 여운을 남겼다.
자신에게 칼자루를 쥐어달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 제 사람들을 건드리는 것이 싫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드미트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인가.”
카스트로 사건.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로만을 향한 신뢰를 보였다.
그리고 오늘,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향한 신뢰를 강인한 지도력으로 보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사람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평민 태생에 불과한 자신은 드미트리의 힘을 감당할 그릇이 되지 못하지만, 아들 로만은 달랐다.
‘어린 시절, 나와 같이 평민의 신분을 경험한 아픈 손가락. 사람들은 로만을 반쪽짜리 귀족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지금의 로만이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로만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려 하고 있다. 드미트리에게 부족한 것은 힘이 아니라 영주의 결단뿐. 그렇다면, 나는 나를 대신할 사람을 위해 힘을 실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쪼르르르.
술을 따랐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점점 선명해져 갔다.
사람은 가끔.
운명의 순간을 느낀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가슴이, 자신이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갈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후계자 구도는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탁.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거기 아무도 없느냐? 지금 당장 조나단 기사단장을 불러오거라!”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 * *
드미트리에서 일어나는 변화와는 다르게.
동북쪽 일대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며칠 뒤.
드미트리 가문에서 파티를 열었다.
명목은 로만의 귀환을 축하한다는 의미였고, 당연히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이 모두 드미트리로 모였다.
“볼트 가문에서 왔습니다.”
“그리셀 가문의 소피아입니다.”
“헤로스 가문을 대표해, 로만 드미트리 님을 축하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각양각색의 귀족들.
그들이 이른 아침부터 몰려들었다.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드미트리 가문을 ‘우두머리’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실세라는 사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드미트리는 명백히 동북쪽 일대 제일의 가문이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장자가 카이로의 영웅이 되어서 돌아왔으니,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다.
거대한 파티장.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그들은 각자의 파티를 즐기는 것 같으면서도, 틈이 나면 곧바로 로만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그리셀 가문의 소피아. 당연히 기억합니다. 지난 바르코와의 파티에서 한번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어머. 진짜 기억해 주시네요?”
소피아가 까르르 웃었다.
별말을 하지도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의 후광은 사람들을 압도했고,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로서는 로만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귀족 가문의 여식들.
그녀들은 각자 아버지로부터 어떻게든 로만을 유혹하라는 특명을 받았기에, 재미없는 말에도 눈웃음을 보이며 로만에게 착 달라붙었다.
꽃에 벌이 꼬이듯.
로만 주변으로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사람들의 관심에 위축될 법도 한데, 로만의 존재감은 오히려 밝게 빛나며 주변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확실히 과거의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야.’
‘이런 사내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대체 어떻게 로만의 마음에 들지?’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번 파티.
카이로의 영웅이라 불리는 로만 드미트리를 위한, 그리고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는 그런 자리였다.
* * *
파티가 조금 무르익어 갈 즈음.
로만에게 말을 거는 사내가 있었다.
“콘라드 자작이라고 합니다. 헥토르를 물리친 카이로의 영웅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콘라드 자작.
그가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악수를 청했다.
로만을 무시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로만과의 대화에서, 어떻게든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헥토르 왕국과의 전투에서 5성 검사인 버틀러를 쓰러트렸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20대 중반의 나이에 그런 대단한 업적을 이루셨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저도 한때는 검사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로만 님처럼 대단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해서 마나를 느끼지도 못하고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로만 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요. 세상에 그 누가 로만 드미트리 님의 업적을 부정하겠습니까? 곧 랭킹전에 도전하신다는 말이 있던데, 같은 동북쪽 일대의 귀족으로서 기대가 무척 큽니다. 동북쪽 일대는 그간 상위 랭커를 배출하지 못했는데, 로만 드미트리 님이라면 정상의 자리도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생각보다 자신의 대화를 오래 받아 주자, 콘라드 자작은 주변의 눈초리를 뿌리치고 말을 계속 이어 갔다.
그때였다.
뜬금없이, 로만이 이상한 주제를 말했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드미트리의 농민들이 콘라드 자작님의 일방적인 통보로 농지를 빼앗겼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계약 기간이라는 게 있는데, 워낙 갑작스러운 통보여서 농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순간.
콘라드 자작의 표정이 굳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답하기 싫었지만, 그래도 상황을 유하게 넘어가려고 했다.
“사실 더 비싼 값에 주변 일대를 사용하겠다는 상단이 있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이런 의미 없는 얘기는 넘어가시고…….”
“겨우 그런 이유였습니까?”
말을 툭 끊었다.
주제를 돌리려던 콘라드 자작은, 불쾌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로만 님. 우리는 로만 님을 위한 파티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왜 그런 예민한 문제를 계속 거론하시는 겁니까?”
경고였다.
더는 말하지 말하는 의미.
하지만, 로만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대화의 꼬리를 물었다.
“예민한 문제라고 그냥 넘어간다면 드미트리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콘라드 자작님이 드미트리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셨다면, 농민들과의 문제를 상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계약 기간을 준수한다든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적어도 저였다면 그렇게 문제를 해결했을 겁니다.”
그제야.
콘라드 자작은 상대가 시비를 건다는 사실을 알았다.
불쾌했다.
로만 드미트리고 뭐고 간에, 이따위 대화는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로만 님에게 정말 실망했습니다. 저는 좋은 의미로 로만 님의 귀환을 축하하고자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문제를 말해서, 왜 제 체면을 깎아내리려 하시는 겁니까? 카이로의 영웅이라 평가하던 세간의 소문은 다 거짓인가 보군요. 저는 진심으로 로만 님을 존경했으나, 이따위 대우를 받고서는 더 이상 웃는 얼굴로 파티를 즐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귀족의 세계에서는 명분이 중요하다.
콘라드 자작은.
자신이 화를 내도 될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성이 대단하기는 하나, 그는 굳이 불필요한 문제를 거론해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던가.
이로 인해 문제가 커진다고 할지라도.
주변의 공감을 끌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콘라드 자작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홱.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가 나가려는 길을 따라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그때였다.
“콘라드 자작님. 자작님은 아직 제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대화를 끝내고 파티장을 나가신다면. 저는 콘라드 자작님의 행동을 드미트리에 대한 적의(敵意)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건.
지금 나와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콘라드 자작 또한, 놀란 얼굴로 로만을 돌아보았다.
“다시 제 앞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날의 일을 해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실수가 아니었다.
명백한 고의.
방금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파티장이,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