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615)

131화 서열 정리 (4)

파티장을 나오고.

콘라드 자작의 저택에 모인 동북쪽 연합회의 귀족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터트렸다.

“오만방자한 녀석!”

“한때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놈이, 수도에서 인정을 좀 받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놈이 마지막에 했던 말 기억나십니까? 끝까지 해 보겠답니다. 아주아주,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 녀석입니다. 여러분.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간, 사람들은 동북쪽 연합회가 아무것도 아닌 곳이라 생각할 겁니다.”

다들 생각은 똑같았다.

복수하길 바라지만, 문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콘라드 자작이었다.

굴욕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가라앉질 않았다.

“로렌스 자작을 필두로 친 드미트리파가 로만의 편을 들었습니다. 이건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여러분들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솔직히 동북쪽 연합회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막말로 드미트리 가문의 병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게다가 버틀러를 쓰러트린 로만 드미트리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들을 쓰러트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만만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콘라드 자작은 회의적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심장이 쿵쿵 뛰는 것만 같았다.

연합회의 귀족들.

그들은 말을 잃었다.

분노를 토로하긴 했지만, 사실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바르코가 몰락한 이후로 드미트리를 막을 방법이 사라졌다.’

독보적인 1강.

드미트리의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최근에 카스트로 가문을 상대로도 전쟁을 준비했을 정도로, 드미트리는 어느 순간부터 동북쪽 일대를 넘어서는 전력을 보였다.

그들과의 분쟁은 피해가 만만치 않은 일.

마음 같아서는 제대로 들이받고 싶었지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님을 알기에 귀족들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때였다.

한 귀족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 중앙 정부에 연락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앙 정부의 힘으로 드미트리를 압박하자는 말씀입니까?”

“예. 바르코가 무너진 이후, 저희는 중앙 정부에 연줄을 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 그걸 활용할 타이밍입니다. 아직은 중앙 정부와의 관계가 돈독하지 못해서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문제를 드미트리 가문과 동북쪽 연합회만의 문제로 묶어 버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로렌스 가문을 비롯한 친 드미트리가 참전할 명분만 차단한다면. 드미트리가 제아무리 강할지라도, 머릿수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니다.

명백히 동북쪽 연합회가 유리한 판을 만들고, 그때 협상을 진행해 사과를 받아 낼 생각이었다.

그나마 최선이었다.

그냥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하기에, 콘라드 자작이 의욕을 보였다.

“그럼 당장 연락하겠습니다.”

* * *

통신을 연결했다.

화면 너머.

자신들이 그간 많은 뇌물로 인연을 맺었던 귀족의 모습에, 콘라드 자작이 대표로 목적을 말했다.

“파비우스 백작님. 부탁할 게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콘라드 자작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에 드미트리 가문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일로 로만 드미트리가 저에게 대놓고 굴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파비우스 백작님. 혹시 중앙 정부의 힘을 이용해, 드미트리 가문을 한 번만 압박해 주실 수 없겠…….”

뚝.

통신이 끊겼다.

갑자기 사라진 화면에, 콘라드 자작은 당황한 얼굴로 병사를 다그쳤다.

“통신을 똑바로 연결하지 못하겠느냐! 파비우스 백작님의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니, 얼른 연결하거라!”

“알겠습니다.”

병사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재차 시도되는 통신.

파비우스 백작의 얼굴이 떠오르자, 콘라드 자작은 일단 불안정한 통신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아. 진짜 눈치 더럽게 없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분명히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던 파비우스 백작이,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경멸의 눈빛을 보였다.

[변방에서 살면 귓구멍을 막고 지내는 건가. 뭐? 로만 드미트리를 압박해 달라고? 에라이, 이 새끼들아. 로만 드미트리는 베네딕트 후작님이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인재야. 지금 로만을 자신의 사위로 들이려고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중앙 정부를 움직여서 드미트리를 압박해 달라는 개소리나 지껄이고 있다니. 아니, 동북쪽 소속이면 드미트리 가문과 친해질 연결 고리로 쓸모가 있을까 싶어서 연락을 받아 줬는데, 뭐 이딴 새끼들이 다 있어?]

정신이 멍해졌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상황이, 정말 현실인지 의심이 들었다.

[지금부터 똑똑히 들어. 최근에 카스트로 가문과 드미트리 가문이 부딪힌 일이 있었지? 그때 중앙 정부에서 결론이 어떻게 난 줄 알아? 대세도 파악하지 못하는 카스트로는 중앙 정부에서 발언할 자격이 없다면서, 베네딕트 후작님이 절친한 친우였던 카스트로 가문을 좌천시켜 버렸어. 이제 알겠어? 염병 떨지 말고, 살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잘 보일 생각이나 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툭.

통신이 끊겼다.

동북쪽 연합회는 말을 잃었다.

그동안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파비우스 백작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는데, 한순간에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비우스 백작은 드미트리와 베네딕트 가문의 정략결혼 가능성을 말해 주었다.

바르코가 중앙 정부의 사람을 배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설설 기었던 동북쪽 연합회로서는, 그보다 더한 ‘정략결혼’이라는 단어에 참담한 심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런.”

“우리가 아무래도 단단히 실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이미 강을 건너 버렸는데.

방금까지 복수를 주장하던 한 귀족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콘라드 자작님의 문제부터 사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들 그런 눈빛으로 절 쳐다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괜히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는 이게 현명한 방법입니다.”

동북쪽의 박쥐들.

그들은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 * *

콘라드 가문과의 분쟁.

문제는 해결되었다.

콘라드 가문이 농민들에게 직접 사죄를 했고, 계약서대로 남은 기간에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로만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이 저희를 위해 애써 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도련님을 위한 일이라면, 하찮은 몸뚱이로라도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드미트리의 농민들.

그들이 찾아와 로만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파티장에서 있던 일은 금방 퍼져 나갔다.

보는 눈이 많기도 했고, 음식을 나르던 하인들도 오며 가며 로만이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콘라드 자작님. 당신이 건드린 드미트리의 농민들은 제 사람들입니다. 드미트리에 거주하고, 드미트리에 세금을 내며, 드미트리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무런 언질도 없이 그들을 건드렸습니다.”

제 사람들.

감동적인 말이었다.

드미트리의 충성심이 더 견고해지는 순간이었고, 로만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예상대로 동북쪽 연합회는 꼬리를 말았다. 그들은 드미트리와의 분쟁에 중앙 정부를 끌어들일 생각이었겠지만, 현재의 중앙 정부는 동북쪽 연합회보다는 내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자신은 균형의 추다.

중앙 정부가 카스트로를 외면한 순간부터.

로만은 일시적으로 ‘배경’이 생겼음을 알았다.

그래서 애초에, 콘라드 가문과의 분쟁이 전쟁까지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동북쪽 연합회는 박쥐와도 같은 무리다. 나와의 논쟁에서는 분노하는 감정을 망설임 없이 드러내 놓고는, 상황이 불리해질 때마다 체면을 버리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로렌스 자작을 필두로 친 드미트리가 내 편을 들었을 때는 곧바로 사과했고, 지금은 중앙 정부를 끌어들일 수 없음을 알자 막대한 이득을 포기하고 상단과의 계약을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만약 이대로 일을 마무리 짓는다면. 드미트리는 전보다는 동북쪽 일대에서 강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중앙 정부가 개입하는 순간 때를 기다리던 동북쪽 연합회에 뒤통수를 맞을 확률이 높다.’

위험한 변수.

달라진 사실은 없었다.

그렇기에, 로만은 처음 계획을 구상하는 단계부터 일을 이렇게 흐지부지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번 계획.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 단계가 도발이라면.

‘두 번째는 현실 직시의 단계다.’

아마 지금쯤이면.

정보 길드를 맡은 루카스가, 하나의 사실을 동북쪽 일대에 퍼트리고 있을 것이다.

* * *

하나의 사실.

그건,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이번에 드미트리 가문에서 검술 대회를 개최한다는데? 우승 상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백 골드래.”

“에이. 백 골드가 대단한 돈이기는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버티고 있는데 그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겠어? 이건 드미트리가 로만의 위상을 높이려고 작정하고 깐 판이야. 헥토르 왕국의 랭킹 2위인 버틀러도 쓰러트린 괴물인데, 대체 그 누가 로만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로만이 참여한다면 당연히 대회의 의미가 없겠지. 그런데 이번 대회는 로만 드미트리와 조나단 기사단장은 참여하지 않는대. 그뿐만이 아니라, 대회가 무려 6개의 조로 나누어져 있다는 거야. 6개의 조와 6명의 우승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떤 조든 간에, 그 조에서 승리한 우승자는 백 골드를 차지할 수 있다는 의미야.”

“헉. 정말?!”

난리가 났다.

대회의 조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한 명의 우승자를 가리는 대회라면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데, 드미트리 가문은 무슨 생각인지 이것을 6개로 나누었다.

동북쪽 일대에서 활동하는 검사들로 제한하는 대회.

참가자도 가려서 받다 보니, 생각할수록 우승 확률이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막말로.

정말 재수가 좋아서 약자가 있는 조에 배정받는다면, 그대로 우승할 수도 있는 일이지 않은가.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진실을 확인하고자 했다.

마침 공식적인 자리가 있었고, 사람들의 물음에 로만이 말했다.

“소문처럼 드미트리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회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남부 전선에서 헥토르 왕국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승리했다는 사실만 기억하지만, 그때의 저는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를 통해 저희를 증명할 시간을 가질 생각입니다. 저희는 넓은 세상을 경험했고, 그 경험을 통해 강해졌습니다. 6개의 조. 각 조에는 저를 따르는 수하들이 한 명씩 배정될 예정입니다. 만약 제 수하를 쓰러트리고 우승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저는 백 골드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부탁하는 요청이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무조건 들어줄 생각입니다.”

파격적인 얘기였다.

얘기를 듣던 사람 중.

어떤 사람은, 혹시 귀족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도 출전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가능합니다. 동북쪽 일대에서 활동하는 검사라는 사실만 증명한다면, 다른 조건은 보지 않습니다. 대회는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입니다. 충분히 준비하고, 많은 사람이 도전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끝으로.

로만은 더는 대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밝힌 사실만으로도, 동북쪽 일대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동북쪽 연합회 귀족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정말이지.

복수를 위해,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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