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한 단계 앞으로 (2)
엄청난 폭발이었다.
오라의 폭풍이 일어나며, 가상의 버틀러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 순간.
콰직.
쨍그랑!
검이 부서져 버렸다.
자신이 만든 두 번째 검 블레이즈는 루카스에게 맡긴 상태라, 로만은 드미트리의 명검을 활용해 검술을 펼쳤다.
검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검으로는 로만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강력한 오라의 폭발에 유리가 깨져 나가는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파편이 튀어 손아귀가 찢어졌지만, 로만은 뚝뚝 흘러내리는 피에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즐겁구나.’
현생(現生).
한때는 특별할 것이 없는 삶이라 생각했다.
전생에 이미 경험했던 길을 답습하며, 말년에 느꼈던 무료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를 바랐다.
천마의 말년은 너무나도 따분했었다.
백중혁을 위협하는 강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평생을 약육강식의 삶에서 살았던 백중혁에게 안전하기만 한 삶은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다.
갈망이 일었다.
항상 발전하길 원하지만, 자신을 시험할 적수가 없어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로만은 버틀러를 쓰러트렸다.
그것도 충분히 기쁜 일이지만, 로만을 웃게 만드는 진정한 이유는 버틀러를 쓰러트린 방식이었다.
‘나는 천마의 방식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일 것이다. 전대의 지식을 답습하고 새롭게 창조해 낸 천마검법은 분명 당대 최고의 무공이었지만,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 전혀 다른 방향의 천마검법을 사용했다. 그 말인즉, 로만 드미트리의 천마검법은 발전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들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인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전생과는 다른 삶이었다.
단순하게 정점에 올랐던 삶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천마 백중혁의 삶을 우러러보았지만, 더는 올라갈 길이 없다는 생각은 엄청난 상실감을 부여했었다.
샐러맨더 대륙.
버틀러는 시작일 뿐이다.
그는 고작 대륙 랭킹 끝자락에 있는 인물이고, 그를 능가하는 고수들이 대륙 전역에 퍼져 있었다.
“후우.”
숨을 들이켰다.
보름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폐부 가득히 들이차는 공기만으로도 충만함이 차올랐다.
앞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로만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변수가 많기를 바란다. 버틀러와 같은 강자가 끊임없이 나타나 나를 시험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내 목숨을 위협해다오. 그럴수록 나는 삶의 의미를 찾을 테니까. 천마검법이 수많은 시련을 통해 완전한 무공으로 거듭난 것처럼, 이 세상이 내게 부여하는 시련이 나를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겠지. 로만 드미트리로서의 삶. 정점에서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나는 다시 한번 악착같이 정점의 자리에 올라갈 것이다.’
새로운 강자.
새로운 문물.
앞으로의 미래를 예상할 수 없기에, 이보다 들뜰 수 없었다.
걸음을 돌렸다.
다시 검을 만들 차례였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만큼, 이번에 만들 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타다다닥.
“주군!”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
크리스를 비롯한 로만의 수하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현장에 도착했다.
* * *
현장에 도착한 순간.
그들은 직감했다.
로만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눈앞의 참담한 광경을 그가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경악했다.
대장간 주변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대마법사가 고서클의 마법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주변 일대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버틀러를 쓰러트린 오라 검사라지만, 오라의 폭발력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광경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히 로만을 걱정하는 마음에 달려온 수하들이었지만, 그들은 파괴된 흔적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지?”
메마른 목소리.
로만이 수하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수하들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생기(生氣)로 일렁였다.
크리스가 말했다.
“폭발음이 들려서 달려왔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 아무 일도 없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주군, 저희는 주군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주군이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항상 주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다.”
걸음을 돌렸다.
정말 아무 일도 없기에.
수하들을 보내고, 다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허탈한 순간이었다.
대장간으로 사라지는 로만의 모습을 바라보며, 크리스는 다시 한번 주변 일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는 의미인가.’
심장이 뛰었다.
이상하게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크리스는 그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정말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이번에 로만이 개최하는 대회에 출전하면서도, 어떤 상대가 출전하든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해 봤자. 로만 드미트리보다는 강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렇기에 시간이 나는 대로 수하들의 실력을 점검해 주는 여유를 보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로만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서간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건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수준의 성장이었다.
‘크리스. 넌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회의감이 일었다.
처음 로만을 만났을 때.
크리스는 그보다 강해지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점차 로만이라는 목표를 따라잡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인간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벽을 마주했을 때, 그걸 넘어서겠다는 각오보다는 경외심(敬畏心)에 빠져 멈춰서게 된다.
크리스 또한.
나약한 인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제자리에 섰고, 지금의 발전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주군은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사람이다.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에 5성 검사를 쓰러트린 것은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전무한 업적이지만, 주군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지난 보름. 내가 안일하게 수하들의 상태를 봐주는 동안, 주군은 잔인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혹사하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나는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안일한 태도를 보였단 말인가. 내가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오른 존재도 매일 치열하게 살아가건만, 겨우 나 따위가 벌써 현재에 안주하는 한심한 태도를 보이다니.’
화가 났다.
로만의 앙상한 몰골을 보며.
그가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았기에, 크리스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건 아니었다.
로만이 개최한 대회.
지금의 자신으로도 우승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대회 결과를 떠나서, 크리스 또한 로만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냥 우승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모두가 주군을 감히 올려다볼 수 없도록. 아주 압도적으로 적들을 쓰러트려야만 한다. 이번 대회는 시작일 뿐이다. 나는 다시, 주군을 넘어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가자.”
걸음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누굴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
악착같이 훈련에 매달릴 것이고, 로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대회를 보름 앞두고.
크리스를 필두로, 로만의 수하들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 * *
정확히 한 달의 시간이 지났을 때.
로만은 검을 완성했다.
화르르륵.
불길이 일렁였다.
로만은 검을 들어, 불길에 검을 비추어 보았다.
‘아름답구나.’
지난 한 달.
한순간도 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검을 내리치며 검과 완전히 동화되었고, 처음에는 강철에 불과했던 것이 점점 로만이 바라는 이상적인 형태로 변해 갔다.
현재의 자신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검.
그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검의 위력을 바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가상의 존재들을 불러들였다.
육체의 오감(五感)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존재들은, 지난번과는 다르게 세 명의 버틀러를 만들었다.
타다다닥.
버틀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강함의 척도로 삼은 존재들.
그들은 오라를 일으켰고, 동시에 힘을 합쳐서 로만을 공격했다.
콰르르릉.
콰콰콰콰쾅!
대기가 찢겨 나갔다.
겹겹이 쌓이는 오라.
무려 세 명의 힘을 합친 공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적이었지만, 그것을 올려다보는 로만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만약 버틀러보다도 강한 적을 만난다면.
그 존재는 이에 버금가는 힘을 사용할 테고, 이 정도로 강력한 힘도 이겨 내야만 앞으로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
탁.
걸음을 내디뎠다.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마나를 검을 통해 표출했다.
‘천마검법 중반부 삼초식.’
천마의 검.
검이 번뜩였다.
강한 돌풍을 일으키며,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오라를 동반한 세 명의 버틀러를 그대로 베어 버렸다.
콰콰쾅!
콰콰콰콰콰콰쾅!
세상이 뒤흔들렸다.
검에 닿은 모든 존재가 소멸되었다.
세 명의 버틀러는 분명히 강했지만, 로만의 검은 그 이상의 단계에 도달했다.
파사사삭.
사라지는 적들.
비록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였지만, 로만은 그들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
검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샐러맨더, 블레이즈.
앞선 검들이 새로운 삶을 의미했다면, 세 번째 검은 현재의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너의 이름은 다크니스(darkness)로 하겠다.’
천마의 검.
상대를 절망에 빠트릴 존재.
로만은 검을 거두었다.
폐관 수련도, 이제는 끝이었다.
* * *
성으로 돌아가자.
수하들이 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는 수하들을 도열시킨 뒤에, 로만의 옆을 따라 걸으며 그간의 일을 보고했다.
“지난 한 달. 주군이 명령하신 대로 자체적인 무한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3일 간격으로 기록으로 남길 대결을 진행했고, 그 결과 승률이 높았던 6명의 검사를 선별했습니다. 이게 그 명단입니다.”
슥.
명단을 받았다.
내용을 확인하자,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크리스, 케빈, 볼칸, 푸키, 맥버니, 헨더슨.]
앞의 4명.
예상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로만의 수하 중에 압도적인 성장세를 보였고, 실력만 보았을 때는 무조건 상위권 레벨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의 2명은 의외였다.
맥버니는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고, 헨더슨은 평민 출신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검사들보다 시작점이 뒤떨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맥버니와 헨더슨이 당당히 상위 승률에 이름을 올린 상황에, 로만은 말없이 웃음을 보였다.
크리스가 물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결정은 로만의 몫이다.
로만이 명단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그간 어떤 대결을 펼쳤는지 상관없이, 로만의 수하들은 명령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수긍할 것이다.
그들의 발전.
모두 로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로만이 상위 6명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을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에게 로만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상식과 다른 결론을 말해도, 그것을 따르는 믿음을 갖추었다.
“이대로 진행하겠다. 다만.”
수하들을 보았다.
그들의 결연한 표정에, 로만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명분을 부여했다.
“내 이름을 걸고 개최하는 대회다. 나는 아름다운 패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 이름에 어울리는 그런 존재임을 사람들 앞에 증명하거라.”
“명을 따릅니다.”
명을 따른다는 의미.
필사(必死)의 의지를 표출했다.
처음에는 전사로서의 모습이 부족했던 수하들이, 지금은 제법 멋있게 변해 있었다.
“기대하고 있겠다.”
그 한마디에.
수하들은 목숨을 걸었다.
어떤 상대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패배한다는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그렇게.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