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 (1)
대회 하루 전날.
드미트리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로만은 동북쪽 일대의 이권을 위해 대회를 개최했지만, 그건 그들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너도 대회에 참석해?”
“당연하지! 무려 100골드가 걸린 대회가 있다는 말에, 내가 얼마나 급하게 돌아온 줄 알아? 이런 자리에 내가 빠지면 섭섭하지. 한번 지켜보라고. 최전방에서 갈고닦은 용병의 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지.”
“꼴에 용병이라고 나대기는. 제발 크리스 조에 걸려서, 시작부터 박살이 나 버려라!”
“이 새끼가!”
사람들도 소문을 들었다.
크리스.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상대였다.
대전사 전투에서 3성 검사를 쓰러트린 전적이 있는 데다, 소문에 의하면 검이 너무 빨라서 눈으로 제대로 확인조차 불가능하다고 했다.
6개의 조에서 하필 크리스와 만난다면. 사실상 탈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행히도 유혈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오라 사용을 1성까지로 제한을 걸었지만, 단순히 검술의 차이만으로도 크리스를 이길 그림은 머릿속에서 떠오르질 않았다.
“케빈도 조심해야 해. 걔는 그냥 악귀야. 오라의 제한이 걸려 있는 대회에서는, 어쩌면 크리스보다 위험할지도 몰라.”
“볼칸과 푸키를 실제로 본 적 있어? 떡대 완전 장난 아니야. 그냥 이번 대회의 포인트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 중 딱 네 명만 피하면 돼. 크리스, 케빈, 볼칸, 푸키. 그들을 상대로 괜히 이겨 보겠다고 설쳤다간, 내 장담하는데 팔 하나는 부러지고 말 거야.”
4명의 이름.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간의 소문을 취합해서, 사람들은 피해야 할 상대를 기억해 두었다.
그런데도.
다수의 사람이 대회 참가 의사를 밝힌 이유는, 그 네 명만 피한다면 우승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일확천금의 기회였다.
나머지 두 조는 확정적으로 오합지졸들의 싸움이기에, 사람들은 그 조에 해당하기를 하늘에 간절히 빌었다.
“아아, 제발.”
“꿀조에 걸리게 해 주세요.”
다음 날.
사람들이 기다리던 조가 발표되었다.
그것은,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는 그런 결과였다.
* * *
동북쪽 연합회.
그들 안에서도 희비(喜悲)가 갈렸다.
한 귀족은, 떡하니 쓰여 있는 크리스라는 이름에 암담한 반응을 보였다.
“……하필이면 크리스를 상대해야 한다니.”
지난 한 달.
그들은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최소한 1성의 오라를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검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실력자.
게다가 동북쪽 일대 출신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다 보니, 대부분은 결국 가문의 실력자를 대표로 내보내는 결단을 내렸다.
크리스의 상대로 선정된 롤로 남작도 다르지 않았다. 가문을 대표하는 2성 검사를 내보내겠다는 말을 이미 내뱉었는데, 하필이면 상대로 크리스가 걸리고 말았다.
암담했다.
검술만으로 3성 검사를 이긴 괴물이다.
결과가 뻔한데,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검사를 위험한 곳에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절망하실 필요 없습니다.”
“맞습니다. 롤로 남작님 가문의 검사도 실력이 출중하지 않습니까? 물론 크리스가 만만한 상대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벌써 포기하고 의욕을 잃을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다 같은 사람입니다. 대결이라는 것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뒤 귀족.
그들은 경계 대상을 피한 귀족들이었다.
특히 콘라드 자작은, 자신이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상대가 걸려서 기쁜 기색을 숨기질 못했다.
‘맥버니. 그 병신을 내보낼 줄이야.’
이번 대회를 위해 그도 로만의 사람들을 조사했다.
확실히 대단했다.
겨우 남작 가문 장남에 불과한데, 로만은 크리스를 비롯해 뛰어난 실력자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이번에 데려온 맥버니가 상대로 배정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서부 전선에서 백인장을 했을 정도로 노련한 전사이기는 하나, 팔 하나를 잃은 병신을 상대로 패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신체 하나가 없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주력 팔을 잃으면서 밸런스가 무너졌을 테고, 그것은 검사들의 대결에서 매우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맥버니가 로만의 대표로 나섰다.
그것도 자신의 조에 배정되었다는 사실에, 콘라드 자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자한 반응을 보였다.
“여러분. 이번 대회는 개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 하나라도 대회에서 우승자를 배출해 낸다면, 동북쪽 연합회는 드미트리를 상대로 당당히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자존심만 지켜 주십시오. 크리스를 상대로도 우리가 물러나지 않는 기개를 보여 준다면, 제가 반드시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어 동북쪽 연합회를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맞습니다.”
콘라드를 옹호하는 귀족.
그는 헨더슨의 조에 포함되었다.
이름도 모를 잔챙이를 상대한다는 생각에, 행복회로가 열심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크리스를 제외하고는, 아예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지난 한 달간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본인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겠지만, 그 시간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용하게 작용했습니다. 사실상 맥버니와 헨더슨의 조에서 우승하는 것은 확정적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우승을 위해 전력을 다해 봅시다. 6개의 조에서 절반을 우승해 낸다면, 동북쪽 연합회의 위상이 살지 않겠습니까?”
“옳소.”
“아주 박살을 내 버립시다.”
열의에 들끓는 사람들.
눈빛이 변했다.
크리스를 상대하는 롤로 남작을 제외하고는, 다들 한목소리로 외쳤다.
“타도 드미트리!”
“타도 드미트리!”
이번 대회.
절호의 기회였다.
대회가 끝나고 나면, 드미트리는 더는 동북쪽 일대의 실세로서 목소리를 높일 수 없을 것이다.
* * *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롤로 남작은 절망했다.
크리스의 조인 것도 억울한데, 하필이면 첫 상대로 크리스가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기권할 수도 없는데…….’
백기를 내던지는 순간.
동북쪽 연합회는 롤로 남작을 외면할 것이다.
사실 2성의 검사가 가문의 전력이라고 볼 수 있는 그로서는, 제발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대회를 마치길 바랐다.
마음 같아서는 기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롤로 남작은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고 가문의 기사에게 경고했다.
“맥스. 명심해라. 크리스를 상대로 절대 무리할 필요 없다. 우리의 목표는 ‘동북쪽 연합회’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것뿐이지, 괜히 이겨 보겠다고 설치다가 험한 꼴을 당할 이유는 없다.”
“주군. 절 믿어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대회 출전을 결정한 그 순간부터, 저는 대회 우승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크리스가 대단한 검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동료들을 통해 대전사 전투에서 크리스가 얼마나 대단한 검술을 보여 주었는지를 들었지만, 그는 저와 같은 2성의 검사입니다. 제가 겁을 먹고 물러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동안 혹시라도 크리스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 절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맥스.
그가 가슴을 폈다.
롤로 남작을 바라보며, 기사의 기개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맥스……!”
감격스러웠다.
이 늠름하고 멋진 사내가 자신의 기사라니.
맥스의 얘기를 듣고 보니, 크리스가 어쩌면 무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롤로 남작이 말했다.
“알겠다.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라. 전력을 다해 크리스를 상대하고, 정말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그때는 망설임 없이 기권하거라. 나 또한, 네가 위험하다고 생각된다면 백기 투항을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감격의 도가니였다.
충직한 신하와 그를 아끼는 주인.
기적의 드라마를 떠올렸다.
맥스가 만약에 크리스를 쓰러트린다면, 그건 정말이지 동북쪽 일대 스타로 도약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건 기회야. 주군에게, 그리고 군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는 거야. 후우, 맥스. 넌 할 수 있어.’
무대로 올라갔다.
1라운드.
자신을 믿었다.
그렇게.
퍽!
“크악!”
겨우 3초 만에.
맥스는 피를 흩뿌리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 * *
크리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의 검(劍)처럼, 그는 상대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이번 대회에서 나를 증명한다.’
일반적인 승리로는 부족하다.
압도적인 승리.
그것도 한 번의 승리만을 바라는 게 아니라, 1라운드를 시작으로 모든 상대를 완벽하게 쓰러트릴 생각이었다.
그러한 결과를 위해 그간 악착같이 훈련하지 않았던가.
로만 드미트리를 떠올리며 훈련했던 그간의 나날에, 크리스는 상대가 누구라도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감으로부터 비롯된 확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펄럭.
“시작!”
신호가 떨어졌다.
1초.
맥스가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는, 크리스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1성의 오라를 일으켰다.
콰르르르릉.
2초.
검을 휘둘렀다.
빨랐다.
기습적으로 시도한 공격에, 크리스라 할지라도 반응할 수 없다고 믿었다.
3초.
찰나의 순간.
크리스는 몰아치는 오라 안으로 파고들었다.
로만의 오라에 비하면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고, 크리스는 강철의 심장으로 주변을 난도질하는 오라를 모조리 막아 버렸다.
상대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피한다는 계산은 있었어도, 설마 이렇게 자신의 공격을 모두 막아 버리며 앞으로 전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크리스의 검이 작렬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맥스는 코가 뭉개지며 피를 토해 내고 말았다.
퍽!
“크악!”
압도적인 결과였다.
상대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2성 검사인데도, 크리스는 찰나의 순간에 승부를 결정 지어 버렸다.
펄럭.
“이, 일 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드미트리 가문의 크리스가 승리하며, 이 라운드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롤로 남작.
그가 경악했다.
헛된 희망을 품었기에, 현실의 벽을 확인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대회는 차례로 진행되었는데, 시작과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드미트리 가문의 케빈이 승리하며, 이 라운드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드미트리 가문의 볼칸이…….”
“드미트리 가문의 푸키가…….”
네 번의 대결 모두.
10초를 넘기지 않았다.
분명히 맥스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기세를 보였던 사람들이, 실체를 마주하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처음부터 이렇게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줄 줄은 몰랐다.
“와.”
“이게 드미트리 가문의 클래스인가.”
“남부 전선에서 흘러온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어. 드미트리의 검사들은 아예 차원이 다른 존재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제야 인정했다.
처음에 걱정한 것처럼, 경계 대상이 포함된 조에서의 우승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사는 명백했다.
‘맥버니와 헨더슨.’
병신과 무명의 참가자.
사람들은, 그들이 포함된 조야말로 드미트리를 누르고 우승할 수 있는 희망의 조라고 믿었다.
때마침.
무대로 올라서는 헨더슨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