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 (6)
가브리엘의 패배.
콘라드 자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맥버니와 같은 조로 배정될 때만 하더라도 생각지도 않았던 현실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이, 이건 현실이 아니야.”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가브리엘은 3성 검사다.
오라의 차이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리라 생각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맥버니의 오라는 가브리엘의 오라와 부딪쳐도 사그라지질 않았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맥버니가 오라를 사용한다는 사실도, 그 오라가 가브리엘의 오라를 막아 냈다는 사실도, 마지막으로 맥버니와 같은 외팔이 검사가 검술만으로 가브리엘을 쓰러트렸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아.’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번 대회.
동북쪽 연합회의 자존심이 걸렸다.
대놓고 우승하겠다는 포부를 밝히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동북쪽 연합회와 로만의 관계를 알았다.
‘끝났어. 이걸로 동북쪽 연합회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 거야.’
현장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언더독(Underdog)의 승리.
처음에는 동북쪽 연합회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놓고 떠들어 댔다.
“로만 드미트리가 완전히 압도해 버렸네.”
“동북쪽 연합회는 말만 번지르르한 녀석들이었어. 로만은 딱 6명의 검사만 내보냈는데, 동북쪽 연합회는 십수 명의 검사를 내보내 놓고도 로만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잖아.”
“끝났네. 동북쪽 일대는 드미트리 가문의 것이야.”
그들의 목소리가 심장을 쿡쿡 찔렀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크게 지르고 싶었지만, 충격을 받은 마음에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대체 드미트리 가문이 언제부터 이렇게 강했지?’
6인의 검사.
단 한 명도 약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아무리 3성의 오라를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분명히 최약체로 보이는 맥버니를 상대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대체 그 위의 검사들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크리스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케빈을 비롯한 다른 검사들도 쓰러트릴 자신이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들 6명은 드미트리의 전력이 아니고, 아직 출전하지 않은 드미트리 기사단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로만 드미트리 본인은 나서지도 않았다.
최근에 버틀러를 쓰러트린 괴물의 존재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가 체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동북쪽 연합회가 괴물을 건드렸구나. 로만 드미트리와 적대하는 것은 명을 단축하는 길이다. 저런 괴물들과 전쟁을 벌였다간, 중앙 정부의 힘을 빌린다고 할지라도 절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로만의 계획대로였다.
직접 싸우지도 않았건만, 콘라드 자작은 드미트리의 힘을 깨달았다.
“……콘라드 자작님.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귀족의 물음.
콘라드 자작은, 짜증 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 걸 굳이 물어봐야 아는 겁니까? 우리는 끝났습니다. 동북쪽 연합회의 검사들이 모두 탈락한 이상, 우리가 들러리처럼 이 자리에 남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이곳을 벗어납시다.”
완벽한 패배.
콘라드 자작을 필두로, 동북쪽 연합회의 귀족들이 우르르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 * *
대회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드미트리의 압승.
딱 6명의 검사만 출전시킨 로만 드미트리가, 6개의 조에서 6번의 우승을 거두는 결과를 이루어 냈다.
소문이 돌았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를 대표한 검사들.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말하던 사람들이, 하나의 의문에 도달했다.
“그런데 말이야. 생각해 보면 로만 드미트리의 검사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강했던 것은 아니야. 크리스는 드미트리의 천재 검사라고 불리기는 했어도, 케빈을 비롯한 나머지 다섯 명은 오라는커녕 마나조차 느끼지 못하는 녀석들이었어.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추론(推論)에 도달할 수 있어. 그들의 재능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들어 낸 로만 드미트리가 대단한 것이라는 결론을 말이야.”
그럴듯한 얘기였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크리스와 같은 재능의 발전은 모두가 이해하겠지만, 연속적으로 오라를 깨우친 다른 검사들의 발전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푸키와 볼칸은 전장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용병이었고, 케빈은 빈민가 소년에 불과했으며, 헨더슨은 로렌스에서 밭을 일구던 농민이었다.
마지막으로 맥버니.
외팔이 검사는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되었다.
분명히 일 년 전에는 평범했던 사람들이, 로만을 따라 남부 전선으로 가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소문이 부풀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확신하기 시작했다.
“명망 높은 검사 가문에는 항상 최초의 검사가 존재해. 대륙에서 명성을 떨칠 만큼 강한 무력에, 자신을 따르는 검사들을 육성하는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갖춘 인물. 로만 드미트리가 딱 그러한 경우지. 검술의 검 자도 모르는 가문에서 태어나, 로만 드미트리는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랭커의 자리에 올랐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드미트리 가문을 명문 가문으로 이끌 최초의 검사가 바로 로만 드미트리라는 의미야. 그를 따르면 케빈과 같은 빈민가의 소년도 번듯한 검사가 될 수 있고, 최대한 일찍 드미트리에 자리를 잡을수록 미래가 보장되겠지.”
허황한 얘기가 아니었다.
검술로 유명한 가문들.
그곳들은 모두 최초의 검사가 존재했고, 로만 드미트리처럼 명성을 떨치다가 명가(名家)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도 다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다.
그것도 혼자만 잘난 게 아니라, 휘하 검사들을 육성하는 능력도 이번 기회에 증명했다.
“앞으로 동북쪽 출신들의 노선은 확실해지겠네. 검사로서 성공하길 바란다면, 무조건 드미트리 가문에 충성을 맹세해야 해.”
드미트리.
태생이 천한 대장장이 가문.
같은 귀족들조차 인정해 주지 않았던 드미트리의 평판이, 아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 *
대회가 끝나고.
로만은 수하들을 불러들였다.
“다들 고생이 많았다.”
지난 한 달.
다들 힘든 나날을 보냈다.
대회에서 우승하라는 명령은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고, 얼마나 강해야 우승할지 모르는 수하들로서는 한 달 내내 이를 악물고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압도적인 승리였다.
단 한 번의 위기도 없이, 그들은 동북쪽 연합회의 검사들을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희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나를 따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내 힘이 필요해서, 어떤 사람은 나를 동경해서,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충성을 맹세했다. 사실 이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너희들이 어떤 이유로 그런 선택을 내렸든 간에,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인물이라면 나는 애초에 받아들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진실을 말했다.
서로 필요에 의한 관계.
상대가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로만은 그 상대가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였다.
“나는 복잡한 인간관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인 감정은 흔히 말하는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 확실하게 서로에게 줄 것이 있는 관계야말로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너희들은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 그것들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바라기에 우리의 관계는 흔들림 없이 지속될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나는 항상 너희들이 갈망하는 존재로 남을 테니까.”
천마 백중혁.
그때와 같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감정에 기댈 수 없었고, 확실한 이득을 주고받음으로써 관계를 단단하게 형성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겠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후. 본인들의 능력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누구는 빈민가 출신이기에, 누구는 검을 한 번도 휘둘러 보지 않았기에, 누구는 팔이 하나 없기에. 그들은 누가 비난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의 능력을 깎아내렸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을 너희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너희들의 갈망을 높이 평가한다. 너희가 내 사람으로서 조금도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었다면, 설령 오라 검사라 했을지라도 나에게 충성을 맹세할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나 로만 드미트리가, 너희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너희를 받아들였다.”
필요에 의한 관계.
대가가 있을지라도.
로만은 믿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면, 그 사람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부여했다.
“그러니 더는 자신을 의심하지 마라. 오늘의 결과가 너희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너희가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동북쪽 연합회를 상대하는 판을 깔았다. 대회가 처음 거론되었던 한 달 전부터 지금까지, 그 누가 출전하든 나는 너희를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순간.
수하들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남부 전선에서의 전투.
수하들은 그때의 일로 로만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지만, 반대로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만의 힘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의 게릴라 전투에서 로만은 아무도 대동하지 않았다.
본인 외에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고, 그것이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그런데 지금.
신뢰를 말했다.
의심하지 않았다는 그 말이, 자신들이 필요하다는 그 말이, 수하들의 감정을 북받치게 했다.
피식.
로만이 웃었다.
수하들의 표정.
가관이었다.
다들 감정을 억누르려고 달아오른 얼굴을 보자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너희들 전원에게 10골드의 포상과 3일의 휴가를 부여하도록 하겠다. 내 사람이 되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감정적인 것을 떠나 물질적으로도 충분히 즐기기를 바란다.”
그 말에.
수하들은 더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폭발하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며,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감사합니다!”
“주군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수하들이 마음껏 감정을 표출하도록, 로만은 얼굴에 피어오르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 * *
다음 날.
로만은 루카스를 호출했다.
“동북쪽 연합회의 동태를 살핀 결과,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한번 모이기는 했지만, 연합회 사람들끼리 고성이 오고 간 것 외에는 따로 계획을 도모하지는 않았습니다. 주군의 예상대로입니다. 그들은 대회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주군의 힘에 드미트리와 대적하길 포기했습니다. 아마도 기회가 생길 때까지는, 드미트리 가문이 하는 일에 반기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콘라드 자작의 저택.
차를 내오고 음식을 나르던 하인들은, 하오문의 일원으로서 루카스에게 그대로 정보를 전달했다.
동북쪽 연합회.
그들은 백기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임을, 로만은 모르지 않았다.
“세상에 완벽한 통치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성군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한들, 그와 반하는 존재들은 꼭 다른 생각을 품게 되지. 그런 의미에서 동북쪽 연합회는 필요악(惡)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는 다른 행보를 걷는, 내가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동북쪽 연합회에 소속되어 그들만의 세력을 구축하겠지. 만약 너라면 동북쪽 연합회를 어떻게 처리할 것 같나?”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쓸어버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동북쪽 연합회를 대체할 충분한 인재와 자원이 갖추어져 있다면, 나는 그런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없다. 언제 중앙 정부와 마찰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동북쪽 일대의 희생을 최소화해야만 한다.”
처음부터.
로만은 단계적으로 계획을 구상했다.
1단계.
동북쪽 연합회를 도발했다.
2단계.
그들의 현실을 직시시켰다.
그렇다면 3단계는 무엇일까?
“루카스. 3단계를 진행하라.”
“알겠습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의미.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직접 ‘오랑캐’의 포지션으로 움직여 줄 생각이었다.
이번 작전으로.
동북쪽 연합회는, 드미트리 가문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