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615)

146화 양자택일(兩者擇一) (4)

더글라스 백작은 당황스러웠다.

로만 드미트리가 개입한 것도 그렇고, 상대가 제시한 선택지에 섣불리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다.

‘제길. 드미트리가 참전하다니.’

피가 차갑게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드미트리의 참전으로, 북부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을 선포한 이상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백병전과 대전사 전투 중 하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둘 중 어떤 것이 북부의 승리를 위한 선택일까.’

대전사 전투?

절대 불가능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헥토르와의 전쟁에서 대륙 랭킹에 오른 버틀러를 쓰러트렸다.

사실상 카이로 왕국에서는 왕실 기사단장을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는 괴물이고, 그렇다고 다른 검사들이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더글라스 백작은 최근에 로만이 대회를 개최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휘하에 있는 6명의 수하를 내보냈고, 그들이 모두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고 말이다.

3번의 전투.

로만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나머지 2번의 대결에서조차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 로만과 같이 명성을 떨치고 있는 크리스의 존재는, 대전사 전투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조건 필패다. 이 많은 병력을 끌고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잔병의 신세가 되어 버리겠지. 문제는 그렇다고 백병전을 선택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북부의 병력으로는 동북쪽 연합회의 전력을 충분히 압도하겠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참전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헥토르와의 전쟁.

수도에서부터 내려온 소문은 카이로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남부에 고립되었을 때 수백의 적을 도륙했고, 후방 진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는 홀로 성문을 열었다.

그건 인간의 활약이 아니었다.

아무리 전장에서의 소문이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지만, 더글라스 백작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다.

확실했다.

남부 전선의 영웅은 로만 드미트리다.

그런 괴물이 버티고 있는데, 백병전을 벌였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이를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북부의 맹수.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일단 들이받고 보는 성향의 그로서도, 로만 드미트리의 명성은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딜레마에 빠졌다.

동북쪽 연합회에 드미트리 가문 하나가 참전했을 뿐인데, 상황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북부의 영주들도 다르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선택을 부추겼을 텐데, 지금은 더글라스 백작의 눈치만 살필 뿐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카이로 전체가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떠들었던 말들이 있다 보니, 자신들이 영웅적인 업적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자.

“제가 하나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로만이 침묵을 깨 버렸다.

* * *

로만은 상대의 고민을 알았다.

만약 적당히 그들의 체면을 살려 주는 타협안을 제시한다면, 그들은 못 이기는 척 물러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더글라스 가문과 북부의 영주들.

좋은 먹잇감이었다.

동북쪽 연합회를 위협하는 오랑캐들이었고, 자신은 그 오랑캐들을 무찔러 줄 존재였다.

이번 사건.

동북쪽 연합회는 고민 끝에 드미트리의 손을 잡았다.

아마도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의미보다는, 당장 눈앞의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화가 통하는 적과의 타협을 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마지막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한순간이지만 동북쪽 연합회는 드미트리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고, 로만은 지금부터 그들에게 드미트리와 손을 잡는 것이 얼마나 달콤하고 안락한지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 상대로.

더글라스 가문이 낙점되었다.

그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북쪽 일대에 발을 들인 순간, 그들은 피할 수 없는 덫에 걸려 버렸다.

로만이 말했다.

“제안은 간단합니다. 대전사 전투를 진행하되, 제가 3명의 검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순간.

다들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로만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런 허무맹랑한 제안을 해 올 줄은 몰랐다.

‘이번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겠지.’

함정을 팠다.

너무나도 유혹적인 제안.

그냥 백병전과 대전사 전투를 치르는 것보다는, 3대 1의 핸디캡 매치가 아무리 생각해도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더글라스 백작은 북부에서 명성을 떨친 쌍둥이 검사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

형과 동생은 각각 3성과 2성의 경지인데, 둘의 완벽한 협공으로 수많은 강자를 쓰러트리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로만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3명을 상대하겠다는 발언을 내뱉었다.

의도적이었다.

일부러 상대가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판을 깔아 주었고, 적절한 침묵으로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더글라스 백작.

아마도 화가 날 것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것이다.

제 성질을 마음껏 부리며 살았던 사람이, 어디 가서 이런 대우를 받아 보았겠는가.

그런데도 입을 열지 않았다.

로만이 버틀러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은, 대전사 전투로 상대하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선사했다.

그런 그에게.

“정 망설여지신다면 5명으로 인원을 늘리셔도 좋습니다. 저는 최대한 깔끔하게 이번 전쟁을 마무리하기를 바랍니다.”

로만은 의도적으로.

더글라스 백작의 심기를 건드리는, 오만방자한 발언을 내뱉었다.

* * *

잠시 시간을 가졌다.

더글라스 백작은 북부의 영주들과 따로 걸음을 옮기더니, 분노를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입시다.”

로만의 의도?

알았다.

자신을 도발해서 대전사 전투를 끌어내려 한다는 사실을.

웬만해서는 감정을 꾹꾹 억눌러 보려고 했지만, 5명을 언급한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는 사실은 잘 압니다. 호메로스를 쓰러트렸고, 버틀러마저 이겼으니 그의 무력은 사실상 증명된 것이나 다름이 없겠지요. 하지만 5명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고 한들, 두 다리와 두 팔로는 상대할 수 있는 머릿수에 한계가 있습니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각 가문의 실력자들을 내보낸다면, 설마 로만 한 명을 쓰러트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버틀러를 쓰러트렸다는 의미는, 5성의 가능성을 뜻합니다.”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대전사 전투를 치르든, 백병전을 벌이든. 우리는 저 괴물을 상대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유리한 상황에서 적을 상대하는 것만이, 승산을 조금이라도 높일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얘기인데, 제 휘하에 있는 쌍둥이 검사가 4성 검사를 협공으로 쓰러트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상대는 이제 막 4성의 경지에 오른 존재였지만, 그만큼 협공의 완성도가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다들 동요했다.

4성 검사를 쓰러트렸다는 말.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승산이 있었다.

더글라스 백작이 말했다.

“쌍둥이 검사 둘을 대전사 전투에 내보내겠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제가 이런 결정을 내릴 이유는 없겠지요. 딱 세 분만 제 선택에 동조해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는 세간의 소문처럼 강할 겁니다. 하지만 그는 겨우 20대 중반에 불과합니다. 젊은 나이에 강한 힘을 얻으면 피가 끓기 마련이고, 그는 상황을 굳이 어렵게 만들면서까지 본인의 무력을 자랑하려는 무모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이때가 기회입니다. 아직 멋모르고 날뛰고 있을 때. 이 자리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숨통을 끊어 버린다면, 우리는 동북쪽 일대를 완전히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건 틀리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로만은 선을 넘었고, 더글라스 백작은 그에 관한 보복을 하지 않는다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알겠습니다.”

“백작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저도 백작님과 마찬가지로, 로만 드미트리가 실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나, 한 번에 5명의 검사를 상대하겠다는 것은 오만방자한 선택입니다.”

의견이 모였다.

하나둘씩 나서는 귀족들.

그들은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오만함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 * *

중앙 정부의 귀족.

그가 참관인으로 나섰다.

룰은 간단했다.

더글라스 백작과 북부의 영주들은 5명의 검사를 내보내고, 로만은 홀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대결의 룰이었다.

“후우.”

“다들 긴장하지 마. 상대도 결국 인간이야.”

북부를 대표하는 5명의 검사.

그들이 앞으로 나섰다.

로만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로만과 시선을 마주하자 다들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명성은 대단했다.

카이로의 검사들에게는 거의 전설처럼 떠받들어지는 존재기에, 그를 상대한다는 사실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대결을 시작하기 전에 쌍둥이 검사의 형인 벤톤이 작전을 말해 주었고, 그건 정말이지 일대 다수에 특화된 작전이었다.

벤톤이 말했다.

“다들 내 말을 명심해.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나와 벤텔이 양옆으로 찢어지면서 로만 드미트리의 사각을 노릴 거야. 왼쪽과 오른쪽. 양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로만의 손은 반드시 꼬일 수밖에 없겠지. 협공은 기세를 빼앗아 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우리가 상대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너희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로만을 공격한다면 상대는 시작부터 정신없이 밀릴 수밖에 없어.”

“그때부터는 우리가 유리한 싸움이야. 상대가 공격을 시도하면, 다른 반대편에서 상대의 허점을 공격해서 제대로 공격할 수 없게 만들면 돼. 머릿수가 많다는 것. 그걸 최대한 활용하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무조건 이길 수 있어.”

동생인 벤텔이었다.

쌍둥이 검사.

그들이 그간 보여 준 행보가 있기에, 다른 검사들은 신뢰를 얻었다.

“모두 위치로.”

마침내.

때가 되었다.

서로 마주 보는 상황에, 벤톤과 벤텔은 마나를 끌어올렸다.

‘우리가 유리한 싸움이다.’

‘상대는 오만한 선택을 내렸다. 만약 여기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렸다는 명성을 얻을 수 있다.’

절호의 기회였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는 괴물을, 지금은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검을 강하게 움켜쥐며, 대결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펄럭.

신호가 떨어졌다.

벤톤과 벤텔.

그들은 곧바로 땅을 박찼다.

콰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다리에서 일어나는 폭발력에, 둘은 계획했던 대로 양옆으로 찢어지면서 로만의 사각을 노렸다.

어느 하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둘은 똑같은 외모만큼이나 정확한 타이밍에 로만을 공격했다.

뒤이어 달려드는 3명의 검사도, 이런 타이밍이라면 공격이 먹힐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번뜩.

“……!”

푸확.

피가 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지도 못했다.

동시에 달려들던 두 검사.

둘이 똑같이 피를 뿜어 냈다.

오라를 일으킨 검과 같이 가슴팍이 쩍 갈라지며,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대로 무너졌다.

털썩.

끝이었다.

둘은 다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상황에, 뒤늦게 달려들던 검사들은 황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미친.”

“일격에 쌍둥이 검사를 죽여 버리다니!”

당혹스러웠다.

눈앞의 결과.

침을 꼴깍 삼켰다.

로만은 다른 적들은 내버려 둔 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더글라스 백작님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말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북쪽 일대를 넘어오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르코 가문이 건재했을 때는 항상 대화로 해결하려던 사람들이, 왜 우리에게는 한마디의 말도 없는 것일까.”

뚝뚝.

검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넓은 평야에.

로만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결국, 간단한 문제입니다. 드미트리 가문의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더글라스 백작님을 비롯한 북부의 영주님들이 이런 선택을 내릴 이유가 없겠지요. 그리고 그 사실이, 저로서는 매우 거슬립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이.

우뚝.

한 사람을 향해 멈추었다.

더글라스 백작이었다.

너무 놀라서 넋을 잃어버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로만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대전사 전투를 무를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기껏 중앙 정부에 참관인을 요청하면서까지 치른 전쟁이라기에는 너무 싱겁게 끝난 것 같으니, 특별히 백병전으로 다시 승부를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툭 내뱉은 말.

어투와는 다르게 파격적인 발언에, 더글라스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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