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615)

147화 양자택일(兩者擇一) (5)

북부의 맹수.

그 별명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주변 일대의 귀족과 마찰이 있었는데, 남들이 명분을 따질 때 그는 앞뒤를 재지 않고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그리고 단번에 목을 날려 버렸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부터 더글라스 백작의 다혈질 성격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관한 소문이 퍼졌다.

참으로 편리한 별명이었다.

표정을 쪼금만 찡그려도, 약간 화를 내는 기색만 보여도, 상대는 화들짝 놀라며 비위를 맞추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갈수록, 더글라스 백작은 다혈질 성격의 편리함을 누렸다.

실제로 무력도 갖추었기에, 적어도 북부에서는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번 사건도 다르지 않았다.

동북쪽 연합회.

바르코의 몰락으로 중앙 정부의 비호가 사라지다 보니, 동북쪽 일대를 상대로 굳이 성격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다.

드미트리의 존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과 트러블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동북쪽 연합회를 공격하는 일에 그들이 상관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언제나처럼.

자신은 화를 내고, 상대는 벌벌 떨며 용서를 구하리라 생각했다.

주르륵.

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더글라스 가문이 자랑하는 쌍둥이 검사는 미동조차 없었고, 그들에게서 흐르는 피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혀 버렸다.

분명히 그들이 달려들 때만 하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다음 장면은 충격적일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단 일격.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해 쌍둥이 검사는 죽어 버렸다.

그들의 협공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알기에, 더글라스 백작으로서는 충격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륙 랭커를 쓰러트린 실력이란 말인가.’

천외(天外).

하늘을 보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이라도 대전사 전투를 무를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기껏 중앙 정부에 참관인을 요청하면서까지 치른 전쟁이라기에는 너무 싱겁게 끝난 것 같으니, 특별히 백병전으로 다시 승부를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만의 말.

황당한 제안이었다.

대전사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없는 일로 무르고 백병전을 해 주겠다니.

소름이 돋았다.

로만은 지금 자신의 무력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감히 동북쪽 일대를 함부로 넘어온 북부의 영주들을 벌하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얼마나 강한 가문인지를.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들이밀며, 어떤 방법으로든 상대해 주겠다고 말했다.

평소 평판대로라면. 더글라스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야 했지만, 진짜 강자를 만나자 그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백병전을 벌였다간 수많은 병사가 죽는다. 차라리, 딱 5명을 잃는 것이 나은 장사다.’

눈앞의 시체.

그리고 벌벌 떠는 3명의 검사.

그들을 외면했다.

그들은 살려 달라고 간절한 눈빛을 보였지만, 더글라스 백작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말했다.

“룰은 룰입니다. 대전사 전투로 승부를 보기로 했으니, 이대로 마무리를 하시지요.”

피식.

로만이 웃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더글라스 백작의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싸울 기회를 주었는데도 백기를 내건 것이었고, 그건 앞으로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드미트리가.

북부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로만은 시선을 거두고는, 겁에 질린 3명의 검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예정대로 대전사 전투를 진행하겠습니다.”

* * *

사형 선고.

죽음이 떨어졌다.

북부를 대표하는 검사들은, 죽음의 공포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이미 승부는 끝났습니다. 대결은 이대로 끝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기를 내걸었다.

검을 섞어 보지도 않았는데 투항한다는 것은, 북부의 명예를 땅에 떨어트리는 치욕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북부의 영주들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승부임을 눈앞의 시체가 증명했기에, 대전사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로만이 말했다.

“서로의 목숨을 걸고 마주한 순간부터,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적정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기에. 결과는 잔인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너희가 정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북부의 전사들이 겁쟁이처럼 백기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선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내 말에 반발하는 감정이 든다면.”

툭.

검을 옆으로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검에, 북부의 검사들이 동요하는 반응을 보였다.

“지금부터는 핸디캡으로 검을 사용하지 않겠다. 그런 나를 상대로도 겁에 질려서 싸우지 않겠다면, 개처럼 기면서 살아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겠다. 선택하라. 명예롭게 목숨을 걸고 승리를 도모할 것이냐, 아니면 비루한 목숨을 연명하고자 검사로서의 자존심을 땅바닥에 버릴 것이냐.”

순간.

지켜보던 사람들이 당황했다.

대전사 전투를 무르는 제안에 이어 검을 사용하지 않겠다니.

상식을 완전히 벗어났다.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나, 반발심이 일어날 정도로 로만은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였다.

‘희망을 품어라. 그래야,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겠지.’

양자택일(兩者擇一).

북부에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로만은 지금, 북부를 상대로 동북쪽 연합회에 현실을 보여 주고자 했다.

너희들이 상대하려던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들은 북부의 검사들을 통해 투영할 것이다.

“……어떻게 하지?”

“씨발, 나도 모르겠어.”

북부의 검사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로만은 강하다.

하지만 개처럼 기라는 말에, 그리고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에. 그들의 상식이 흔들렸다.

분명히 로만은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이나,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막말로.

검이 없는 검사는 상대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이판사판이다.”

“방금 그 선택. 후회하지 마십시오.”

결국.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이대로 물러나면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택했다.

모두가 참관인을 보았다.

중앙 정부의 귀족.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북부의 검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죽여!”

타다다닥.

콰르르르르르릉.

전략은 없었다.

상대는 검이 없다.

어떻게 공격해도 막을 방법이 없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로만을 공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오라에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눈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는 분명히 로만이 처한 상황이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로만의 흔들림 없는 표정은 상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했다.

타닥.

코앞에 도달했다.

세 명의 검사.

그들이 각기 다른 부위를 공략했다.

오라가 일렁이는 검이 머리, 몸통, 다리를 동시에 공격하며, 이번만큼은 끝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 순간.

확.

로만의 머리카락이 팔락였다.

경악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옆으로 빠지는 걸음은 다리를 향한 공격을 피했고, 몸통을 틀자 검 하나가 스쳐 지나갔으며, 머리를 노리는 공격은 손을 들어 잡아 버렸다.

오라를 일으킨 검과 맨손.

분명히 로만의 손은 처참하게 찢겨 나가야 정상이건만, 얇게 피어오른 오라는 검날을 붙잡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는.

콰직.

검날을 부숴 버렸다.

충격을 받은 눈동자가 로만을 향한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빠악!

얼굴이 뭉개졌다.

이빨과 핏물이 튀어 오르며 머리를 공격하던 검사가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져 버렸고, 다리를 들어서는 하단을 공격하던 검사의 머리를 찍어 버렸다.

오라로 몸을 보호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인간의 연약한 육체가 단번에 박살이 나며, 한순간에 두 명의 검사가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 한 명.

그는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입을 열어, 항복을 말하려 했다.

“네게 악감정은 없다. 다만, 네가 서 있는 자리가 문제였을 뿐이다.”

확.

머리칼을 잡았다.

머리를 끌고 와, 그대로 얼굴을 가격했다.

콰직.

잔인한 소리가 들렸다.

손을 떼자 진득한 피가 딸려왔고,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며 영혼을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끝났다.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을 잃었고,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로만은 더글라스 백작을 보았다.

“이번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그 말에.

더글라스 백작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 *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더글라스 백작은 패배를 시인했고, 처음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초라한 행색으로 걸음을 돌렸다.

기쁜 일이다.

동북쪽 연합회는 승리에 환호해야 하건만, 그들은 마치 패잔병처럼 창백해진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끄윽.”

콘라드 자작이었다.

그가 딸꾹질을 내뱉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로만의 모습에, 아까부터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끄윽. 끄윽.”

손발이 벌벌 떨렸다.

더글라스 백작과의 문제.

드미트리 가문을 끌어들인 선택에, 동북쪽 연합회는 이보다 이상적인 결과는 없다고 확신했다.

그야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적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는 상황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이득을 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압도적이어도 너무 압도적이었다.

북부의 전사들을 도륙한 저 검이, 자신의 목을 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딸꾹질이 멈추질 않았다.

“끄윽, 끄윽.”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이었어. 헥토르 왕국을 물리친 것은 요행이 따른 결과가 아니라, 저런 괴물이 남부 전선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거겠지. 만약 우리가 드미트리 가문과의 전면전을 택했다면. 북부의 전사들이 도륙을 당한 것처럼 우리는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겠지.’

가설이 아니다.

팩트였다.

북부의 영주들도 감당할 수 없어서 드미트리를 끌어들였는데, 그들은 그보다 더한 괴물이었다.

동북쪽 연합회의 귀족들.

그들도 콘라드 자작과 다르지 않았다.

로만의 눈을 함부로 쳐다보지 못했고, 벌벌 떠는 손을 억지로 붙잡으며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드미트리와 동북쪽 연합회.

그들은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간접적인 신경전을 벌였을 뿐, 그들의 분쟁에는 실질적인 피해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콘라드 자작은 고개를 숙였다.

한발 빠른 그의 모습에, 다른 귀족들도 한달음에 달려와 로만에게 예를 표했다.

동북쪽 일대.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서열이 확실하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 * *

며칠 뒤.

로만은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을 소집했다.

옛날이었다면 대부분이 불참 의사를 밝혔겠지만, 아침 일찍부터 몰려드는 귀족들의 행차로 난리가 났다.

“콘라드 자작님이 입성하셨습니다!”

“롤로 남작님이 입성하셨습니다!”

동북쪽 연합회.

그들이 새벽같이 달려왔다.

바르코가 건재할 때는 드미트리의 말에 콧방귀를 끼던 사람들이,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드미트리의 경비병들에게도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특별히 성문의 통제를 맡은 조나단 기사단장은, 예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귀족들의 태도에 진심으로 놀랐다.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이 빠짐없이 참석한 것도 모자라 이런 태도라니. 대세가 변하고 있다는 건가.’

확실했다.

동북쪽 일대.

근방의 세력들이 드미트리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그 모든 것이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된 업적임을 알기에, 조나단 기사단장은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드미트리로 내려오며. 로메로 남작에게 충성을 맹세한 선택에 후회는 없었지만, 검사로서 살아가며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바라지 않는 검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깨를 폈다.

목소리를 높이며, 당당한 얼굴로 귀족들을 받아들였다.

해가 아직 중천에도 떠오르지 않은 시각.

귀족들이 모두 모였다.

넓은 회의실이 귀족들로 가득했는데, 귀족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다음부터는 저도 초대해 주십시오. 기쁨은 나눠야 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드미트리를 따르던 귀족들.

그들은 화기애애했다.

드미트리에 배팅한 그들의 선택은 옳았고, 드미트리의 안방에서도 웃는 얼굴로 떠들 수 있었다.

그에 반해.

“…….”

콘라드 자작을 비롯한 동북쪽 연합회는 죄인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필 뿐, 예전처럼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목소리를 높일 담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이 입장하십니다.”

모두가 행동을 멈추었다.

친 드미트리 세력도.

방금까지 떠들던 대화를 멈추고는, 로만을 향한 예의를 표했다.

로만 드미트리.

드미트리의 위상을 끌어올린 존재는, 단순히 귀족 가문의 도련님으로 대할 수 없었다.

끼익.

저벅저벅.

로만이 걸음을 옮겼다.

귀족들의 뒤를 지나.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하나뿐인 상석(上席)에 앉았다.

“이번 회의를 위해서 특별히 아버지에게 전권을 일임받았습니다. 혹시라도 불편한 분이 있습니까?”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암묵적으로 로만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럼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새로운 동북쪽 일대의 전달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왕이 왕좌에 앉았다면.

지금부터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룰을 도입할 때였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