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615)

148화 양자택일(兩者擇一) (6)

로만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카이로 왕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첫 화두.

시작부터 예민한 문제였다.

귀족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로만은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헥토르 왕국의 침략 당시, 저는 남부 전선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헥토르 왕국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저는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려는 적의 의도를 알아챘습니다. 하지만 남부 전선의 지휘관들은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겨우 며칠 만에 남부 전선은 헥토르 왕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참담했다.

방심은 재앙을 불렀고, 그 커다란 땅덩어리를 한순간에 잃었다.

약소국의 현실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헥토르 또한 카이로와 다르지 않으나, 헥토르는 적어도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카이로 왕실은 남부 전선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네 개로 찢어진 수뇌부는 결단을 내리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들이 같잖은 권력 다툼을 하는 동안 남부 전선은 그렇게 함락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카이로 왕실에서 곧바로 병력을 보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중앙 정부의 병력은 최소화하고, 남부 일대의 병력을 끌어모아서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만약 저와 병사들이 남부 전선에서 반전을 일으키지 못했다면. 지금도 우리는 헥토르 왕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한 귀족이 물었다.

왕실을 책망하는 발언.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단어가 떠올랐다.

“반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란.

귀족들이 걱정한 부분이었다.

그것을 부정해 주었기에, 마음 편하게 되물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본론을 말씀해 주십시오.”

“카이로 왕국은 중앙 정부가 통제합니다. 이번 사건만 보더라도, 중앙 정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왕실은 병력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당장 남부 전선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남부의 병력’을 최우선으로 차출해, 중앙 정부의 전력은 최대한 아끼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카이로 왕국이 전란(戰亂)에 휩싸이게 된다면. 중앙 정부는 동북쪽 일대의 병력을 차출할 것입니다. 나라의 명운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전쟁에 참전할 의사가 있지만, 그들은 지방의 병력을 화살받이로 세우고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같은 승리라 할지라도. 병력을 모두 잃은 지방의 귀족들과는 다르게,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계속해서 권력의 체계를 굳건하게 이어 나가겠지요.”

왕실은 무능하다.

그들을 뒤엎어 왕좌를 차지할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카이로의 권력에 대항할 세력이 필요했다.

“카이로의 현실은 부당합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세금을 내면서도, 중앙 정부의 귀족들과 우리는 다른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러한 현실을 지켜만 보실 생각입니까? 저는 그간의 일을 경험하며, 동북쪽 일대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침내.

로만이 진정한 목적에 도달했다.

“수도의 귀족들이 중앙 정부라는 이름 아래에서 권력을 누리듯,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도 힘을 합쳐서 서로를 보호하는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제가 여러분들을 소집한 이유입니다.”

* * *

순간.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겉으로는 동북쪽 일대 소속이나, 이 중에는 중앙 정부의 끄나풀이 있을지도 몰랐다.

섣불리 긍정할 수 없었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일이 틀어진다면, 드미트리 가문과 같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들의 반응.

이해했다.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중앙 정부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끄나풀의 존재는 상관없다. 어차피 드미트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중앙 정부로서는 내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속전속결로. 빠르게 동북쪽 일대를 하나로 만들어야만 한다. 만약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동북쪽 일대가 하나로 뭉친다면, 중앙 정부로서는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다. 같은 중앙 정부라 할지라도 파벌이 갈라진 세력. 동북쪽 일대 전체를 처리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로서도 부담이 되는 선택이겠지.’

거취의 문제.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아서지 않는 이상, 카이로의 실세들은 로만의 포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동북쪽 일대를 손아귀에 넣고. 다시 수도로 올라갔을 때가 새로운 계획의 시작이다.’

귀족들을 보았다.

걱정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력을 하나로 뭉치는 것은 좋으나, 그건 치명적인 문제를 낳았다.

“……좋습니다. 동북쪽 일대의 힘을 합친다면, 분명히 중앙 정부를 상대로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겠지요. 문제는 동북쪽 일대의 환경이 척박하다는 겁니다. 로렌스를 비롯한 일부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을 갖추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각 지역은 그곳만의 강점이 있습니다. 드미트리가 광업으로 부흥했듯, 동북쪽 일대의 가문들은 대부분 각자의 생업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업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필요한 것들을 외부에서 들여오는데, 중앙 정부와의 싸움은 이러한 상업이 완전히 막혀 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현실적인 문제였다.

상업의 중심.

카이로는 결국 수도로 직결했다.

수도와의 단절은 현실적인 문제를 일으켰고, 중앙 정부는 그런 이점을 활용해 지금의 권력을 얻었다.

만약 중앙 정부와 전쟁이라도 벌인다면.

당장 식량 문제부터 걱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두 해는 괜찮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무조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이 말했다.

“중앙 정부로 직결되는 상업의 체계. 그 고리를 끊어 내지 않는다면, 지방의 귀족들은 항상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결단을 내리신다면, 적어도 식량 문제만큼은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신호를 주었다.

정보 길드의 마스터.

루카스가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의 개발 계획입니다.”

촤르르륵.

지도를 펼쳤다.

동북쪽 일대를 표시한 지도에는, 루카스의 말처럼 개발 계획이 나와 있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가, 로만의 설명을 바랐다.

“동북쪽 일대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산이 많습니다. 특히 드미트리 뒤쪽으로는, 끝없는 산맥이 있어 대륙의 끝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런 지리적인 특성을 이용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산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 매우 유리한 구조고, 우리는 이 산에 유사시에 사람들을 대비시킬 요새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산을 개간(開墾)해서 앞으로 동북쪽 일대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농작물을 재배할 예정입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산을 개간하는 일은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동북쪽 일대의 산맥을 탐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지방의 귀족들은 수도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과.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예, 가능합니다.”

전생의 삶.

천마신교의 본거지는.

수백 킬로미터의 산맥이 펼쳐진, 십만대산(十萬大山)에 있었다.

* * *

남부 전선으로 떠나기 전.

로만은, 루카스에게 끝없는 산맥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십만대산과 비슷한 유형의 산맥.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새로운 삶.

시간이 지날수록 전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철을 다루었던 전생처럼 대장장이 가문에서 태어났고, 가문의 뒤편에는 십만대산과 같은 산맥이 있었다.

우연일까.

혹은, 필연(必然)일까.

아직은 새로운 삶을 단정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전생은 끝없는 산맥을 활용할 지식을 부여했다.

‘천마신교는 대대로 십만대산에서 터전을 이루었다. 일부 평탄한 땅이나 경사진 땅을 활용해 농사를 짓는 방법에 익숙했고, 정파 무림의 공격에도 수년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요새를 형성했다. 현생에서도 다르지 않다. 주어진 환경을 잘 활용한다면, 동북쪽 일대는 새로운 활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로만이 귀족들에게 말했다.

“자료에 나와 있다시피 개간할 수 있는 땅을 구분했고, 이미 일부는 개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일 것입니다. 하지만 끝없는 산맥을 단순히 가로막고 있는 벽이 아니라 최후의 보루로 활용한다면, 우리는 중앙 정부의 위협에도 물러나지 않을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다들 감탄했다.

개간 계획부터 시작해서 요새의 도면까지.

로만은 철저했다.

단순히 추상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나아갈지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끝없는 산맥의 존재. 그것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만약 끝없는 산맥을 동북쪽 일대의 원천으로 활용한다면, 끝없는 산맥의 위치가 드미트리 뒤편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드미트리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지겠지. 그것이 시작이다. 동북쪽 일대를 완전히 드미트리가 장악하는 순간, 나는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힘을 얻는다.’

동북쪽 연합회.

그들을 살려 준 이유가 있었다.

동북쪽 연합회를 무너트린다면, 그들의 공백으로 생기는 자리를 메우기까지 돈과 인력이 필요하다.

낭비였다.

차라리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드미트리까지 도달하기 위한 ‘벽’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중앙 정부가 드미트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동북쪽 연합회를 비롯한 세력들을 무너트려야만 한다.

단순히 중앙 정부와 드미트리의 싸움이 아니라, 세력 간의 싸움으로 번지는 것이다.

더글라스 백작과의 분쟁.

동북쪽 일대의 살을 깎아 먹지 않는 선에서, 로만은 북부의 세력을 공격해 현실을 직시시켰다.

그래야만 했다.

자신이 동북쪽 연합회를 공격한다면.

후일, 그만큼 중앙 정부에 대항할 세력의 힘이 약해진다는 의미일 테니까.

‘시간이 갈수록 동북쪽 연합회로서는 배신할 여력도 사라진다. 중앙 정부와의 단절은 드미트리에 의존한다는 의미이고,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협조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필요악. 그들의 존재를 허락하되, 그들은 내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서열 정리부터 시작된 계획.

그 사실을 알았다면, 콘라드 자작은 소름이 돋아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귀족들이 눈치를 살폈다.

처음에는 무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의 계획이라면 동조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드미트리 가문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로렌스는, 드미트리가 하는 일이라면 전적으로 도울 생각입니다.”

“콘라드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로렌스와 콘라드.

그들이 먼저 나섰다.

어차피 대세는 기울었다.

드미트리와 같이 가야 한다면, 그들은 남들보다 빨리 충성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로렌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콘라드 자작의 판단은 빨랐다.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였고, 그를 시작으로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이 너도나도 충성을 맹세했다.

의견이 모였다.

동북쪽 일대.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그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기를 바랐다.

로만이 말했다.

“지금부터 동북쪽 일대 연합의 이름을 ‘드미트리 동맹’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이름 하나에도.

드미트리가 군림하기 위한 의미를 부여했다.

마침내.

동북쪽 일대가, 드미트리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쪼르르르.

로메로 남작은 술잔을 기울였다.

맞은 편에는, 조나단 기사단장이 있었다.

“조나단 기사단장. 자네는 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이번 회의.

중대한 사안을 다루는 문제였다.

그런데 로메로 남작은,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진행하기를 바랐다.

조나단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피가 끓어올랐으나, 자신의 주군 앞에서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처음 귀족의 작위를 얻은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귀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끝없는 고민이 들었었지. 태생이 대장장이인 내가, 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교양을 떨면서 살려니까 도저히 적성이 맞지 않았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처음에는 이리 살아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주변을 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알겠어.”

“그런 말 마십시오.”

피식.

로메로 남작이 웃었다.

로메로의 드미트리.

어중간했다.

힘은 있어도 활용하지 못했고,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무시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모두가 드미트리를 우러러보았고, 로만의 말 한마디에 아침 일찍 드미트리에 몰려드는 모습을 보였다.

“드미트리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고,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드미트리를 더는 하찮은 태생이라고 무시하지 않지. 그래서 나는 한발 물러나는 것으로 결정했다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는, 나보다는 로만 드미트리가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옳겠지.”

현실을 인정했다.

자신은 대장장이일 뿐이다.

영주의 자리는 어울리지 않았고, 끝없이 고민하던 후계 문제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그간 고생한 로드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드미트리의 장남은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당장 작위를 물려준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발 물러났다.

적어도 로만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당분간은 대외적인 일을 모두 맡겨 버릴 생각이었다.

술을 마셨다.

뜨겁게 올라오는 취기에, 로메로 남작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참으로 좋구나.”

그날.

드미트리 내부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권력의 이동.

로메로 남작의 다짐뿐만 아니라, 회의의 참석한 귀족들도 로만을 드미트리 가문의 중심으로 여겼다.

드미트리 동맹.

그날의 일은 수도에 알려지지 않았다.

로만의 예상처럼 중앙 정부의 끄나풀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로만의 기세에 압도되어 드미트리 동맹에 가담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확히는 더글라스 백작과 벌인 싸움이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멀리 있는 힘보다는 가까운 주먹이 무서운 법이고, 로만의 계획은 확실히 그럴듯했다.

그렇게 드미트리가 격동(激動)의 시기를 보내는 그때.

드미트리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여기가 대장장이들의 성지인 드미트리인가.”

중년의 사내.

그의 허리춤에는 멋들어진 검이 걸려 있었다.

발렌티노 후작.

그가, 블레이즈의 흔적을 따라 드미트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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