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615)

152화 탐욕의 수집가 (4)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명백한 거절.

다소 공격적인 대답에, 맥킨은 살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 적의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카이로 왕국.

결국, 약소국에 불과하다.

이 안에서는 네 파벌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지만, 대륙의 기준에서 카이로 왕국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로만 드미트리도 마찬가지다. 그가 엄청난 고평가를 받는 이유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버틀러를 쓰러트렸기 때문이지, 현재의 기준에서 대륙의 강자들을 압도할 만큼은 아니다.

고로.

로만의 대답이 중요했다.

발할라 제국은, 로만과 같은 존재를 개미처럼 짓밟을 힘이 있었다.

“말은 똑바로 하십시오. 날 협박하는 순간부터, 나는 당신들에게 좋은 말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호한 음성.

로만은 맥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대가 살벌한 기세를 보이는데도,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발할라 제국. 당신들이 강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강제로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적의로 받아들여도 되겠냐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중앙 정부를 부추겨서 드미트리를 공격하든, 발할라의 그 대단한 전사들을 불러들여 나를 암살하든. 그 어떤 위협에도 내 대답을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발할라.

그들은 강하다.

하지만, 로만은 발할라의 한계를 알았다.

‘카이로 왕국은 크로노스 제국이 수년간 공들인 먹잇감이다. 발할라가 카이로를 공격하려 한다면, 크로노스 제국이 가만히 방관하지만은 않겠지. 결국, 카이로에서의 싸움은 내부의 세력들로 끝을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드미트리가 갖춘 힘은, 중앙 정부의 압박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드미트리 동맹.

그것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중앙 정부가 벌할 때는 주변 영지들의 힘을 빌리는데, 동북쪽 일대의 세력들은 모두 드미트리를 따르는 것으로 결정했다.

발할라 제국을 따르는 덴버 백작.

그가 목소리를 높여 드미트리를 벌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라도, 중앙 정부로서는 전쟁을 행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국경 바깥의 위협.

크로노스 제국이 버티고 있는데, 내란(內亂)이 벌어진다면 카이로는 나락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카이로의 몰락은, 크로노스 제국의 득세를 의미했다.

절묘한 포인트였다.

로만은 드미트리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자신이 절묘한 포인트를 선점할 수 있음을 알았다.

‘발할라 제국은 나를 공격할 방법이 없다. 딱 하나. 발할라의 실력자들을 동원해 나를 암살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따위 위협은 내게 먹히지 않는다.’

백중혁으로 살아가던 시절.

수많은 암살 위협을 받았다.

어떤 방식으로 암살을 시도하든, 로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나를 적대할 생각이 아니라면. 발할라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다리십시오. 나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히 누군가의 권력에 기생하는 존재가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선택을 내리는 순간 그 세력은 반드시 카이로의 정점에 오를 것이고, 사람들은 드미트리 가문을 킹 메이커(kingmaker)라 부르겠지요. 그게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타협안을 주었다.

입을 다물고.

자신의 선택을 기다리라고.

발할라 제국의 협박에도, 로만은 오히려 강하게 나갔다.

아직 세상은 드미트리와 발렌티노의 연합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드러난 전력만으로도, 발할라 제국을 상대로 대담하게 나갈 충분한 힘을 갖추었다.

“……일을 참 대담하게 처리하시는군요.”

맥킨의 표정이 굳었다.

기분은 상했다.

로만의 태도는 선을 넘었으나, 그렇다고 로만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헥토르와의 전쟁.

동북쪽 일대의 통합.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드미트리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폭탄이 되었다.

‘지금은 한발 물러난다. 하지만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면, 그때는 결단을 내려야겠지.’

맥킨이 말했다.

“목을 뻣뻣하게 세우면 언제고 부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내 말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한발 물러나는 이유는 당신이 강해서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주어도 발할라 제국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륙은 넓습니다. 당신이 힘겹게 쓰러트린 버틀러가 발할라 제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부디 신중한 선택을 내리길 바랍니다. 우리가 결단을 내린다면. 그때는 당신이 쌓은 모래성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경고이자 회유였다.

맥킨은 서늘한 여운을 남긴 채,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발할라 제국을 시작으로.

카이로의 네 파벌에서 연락이 왔다.

그들은 드미트리 동맹의 존재를 알고, 모두가 이만 결정을 내려 달라고 독촉했다.

어떤 세력은 회유를.

어떤 세력은 협박을 강행했다.

카이로의 권력 체계가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현재 드미트리에서 정리할 일들이 있습니다. 정확히 1년 뒤. 드미트리의 일을 마무리하고, 수도로 올라가 공개 랭킹전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마무리된다면. 그때는 제 거취를 확실하게 밝히겠습니다.”

1년.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결정을 내릴 것 같았던 로만의 변화에, 네 세력은 모두 배신감을 느꼈다.

귀족파의 수장.

베네딕트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로만의 일방적인 통보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발할라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드미트리를 그냥 내버려 두실 생각입니까?”

수하의 물음이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우리에게는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헥토르와의 전쟁이 끝난 직후라면 몰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동북쪽 일대를 휘어잡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참으로 영악한 녀석이지. 그간 드미트리에 반기를 들었던 동북쪽 연합회가 굴복한 순간부터. 드미트리 가문은 중앙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정확히는 그들을 건드렸다가 힘의 균형이 무너질 바에는, 차라리 그들을 방관하는 것이 현재의 체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겠지.”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드미트리에게 시간을 준다면, 그들은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할 것입니다.”

“알고 있다.”

탁.

서류를 덮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수하를 보았다.

귀족파를 이끌면서, 그는 운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라. 우리가 드미트리를 적대한다고 해서 확실한 이득을 취할 수 없다면, 차라리 긍정적인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것이 맞다. 분명히 제국의 끄나풀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반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로만 드미트리를 지지하며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가 나라는 사람을 신뢰하도록. 그 대가가 드미트리의 배신일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그만한 희생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카이로의 영웅.

탐이 나는 상대였다.

그를 어떻게든 가지고 싶었고, 대담한 행보에 오히려 욕구가 들끓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날 선택해 준다면.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문제로 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끝을 흐렸다.

맹목적인 구애.

격렬한 감정만큼이나, 배반의 대가는 확실할 것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노선을 택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딱 1년.

그것이, 기다림의 마지노선이었다.

* * *

그 시각.

로만은 서재에서 한 통의 편지를 읽었다.

[형. 나는 그동안 아카데미 생활이 즐겁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 형을 만난 이후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어. 카스트로 가문을 무서워하던 애들이 친구로서 다가오기 시작했고, 형이 가르친 기술들을 열심히 연마하니까 검술 실력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 얼마 전에는 검술 교수님에게 내가 어쩌면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칭찬까지 들었어. 진심으로 고마워. 나는 동생으로서 형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형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 내가 지금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앞으로 차차 살아가며 형에게 받은 은혜를 꼭 보답할게.]

로렌 드미트리였다.

진심이 담긴 편지에, 로만은 웃음이 나왔다.

‘형제가 형제로서 존재한다는 것. 나쁘지 않구나.’

이번 생.

전생과는 다르다.

동생과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일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따듯한 감정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로만의 삶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앞으로 1년. 나는 더 강해져야만 한다.’

로만의 울타리.

그 안에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자신은 더는 혼자가 아니었고, 패배는 용납할 수 없었다.

‘권력의 체계를 이용하는 것도 이제는 한계다. 국왕파, 귀족파, 크로노스 제국파, 발할라 제국파. 카이로 왕국을 사분하는 네 개의 세력은 이제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1년. 이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들과의 전쟁에서 무언가를 잃을 수밖에 없다.’

무언가.

그것은 단정할 수 없다.

자신의 가족일 수도, 수하들일 수도,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로서의 삶이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었다.

어떤 것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로만은 많은 것을 바랐다.

전생처럼.

정점의 자리에 오르길 바랐다.

그리고, 아무것도 잃지 않기를 바랐다.

전생의 자신과는 다르게, 백중혁으로서 한번 살아 본 로만 드미트리의 삶은 욕심을 부릴 힘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때는 나를 되돌아볼 시간이 없다.’

천마 검법 중반부.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버틀러를 압도하는 힘이라고는 하나, 로만은 그보다 더 압도적이길 바랐다.

1년.

발전을 위한 시간이다.

자신을 더욱 채찍질할 것이고, 앞으로를 위해 하나 더 준비할 것이 있었다.

‘에드윈 헥토르. 그와 같은 마법사를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어떤 변수가 생기든. 그것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1년 동안 마법사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에드윈 헥토르 그 이상의 마법사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목적을 이룰 것이다.’

잃을 것이 없던 시절.

백중혁은 살아남고자 처절하게 발악했다.

그리고 잃을 것이 많은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한 의지를 보였다.

* * *

그로부터 3개월이 흘렀다.

대륙에 존재하는 13개의 마탑.

그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는 피닉스(phoenix)에는, 항상 그들을 괴롭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에휴.”

피닉스의 후계자.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마법 학회가 있었다.

제일의 마탑이라고 불리는 천공의 마탑에서 주최한 것이었는데, 각 마탑의 대표들이 나가서 그들의 성과를 증명하는 자리였다.

문제는 피닉스의 차례였다. 펠릭스는 30대의 나이에 5서클의 경지에 오르면서 강력한 마법을 선보였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펠릭스의 마법.

흔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법들이었고, 피닉스 마탑만의 정체성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피닉스 마탑이 대대로 내려오던 마법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사실이었군요.”

3년 전.

펠릭스의 스승이자 피닉스의 마탑주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로 인해서 펠릭스는 얼떨결에 마탑주 대행을 맡았는데, 문제는 피닉스의 비기인 버닝(burning)의 마법서를 물려받지 못하면서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마탑의 세력이 약했던 피닉스다.

몰락하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지금도 매일 같이 마법사들이 이탈했다.

마법사의 세계.

냉혹했다.

천공의 마탑은 세상 모든 마법을 보유했다고 알려져 있기에, 비기도 없는 피닉스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

“……이러다 망하는 건 순식간이겠군.”

막막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 마탑들은 나라에 후원을 받으며 일부 토지를 빌리는데, 지금 그들이 있는 프랑크는 마탑주의 실종 이후로 소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었다.

황당한 태도였다. 처음에 피닉스를 들이기 위해서 간과 쓸개를 전부 빼줄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피닉스의 존재를 애물단지처럼 여겼다.

마탑과 왕국.

상부상조하는 관계다.

마탑은 생활할 여건을, 왕국은 유사시에 마탑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은가.

날이 갈수록 고민이 무르익어 갈 즈음.

펠릭스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앞으로 육 개월 동안. 제 대련 상대가 되어 주신다면, 매달 1000골드의 보상을 지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특이한 제안이었다.

대련 상대가 되어 주는 대가로 무려 1000골드라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 않아도 마탑의 사정이 좋지 않은데, 이런 제안이라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프랑크는 대륙을 기준으로 남서쪽에 있다.

편지를 보낸 곳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동북쪽에서도 가장 끝이라니. 정말 멀기도 하구나.’

그날.

펠릭스는 짐을 꾸렸다.

그의 목적지.

그곳은 바로 카이로 왕국의 드미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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