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615)

155화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 (3)

로만의 발언.

처음 들었을 때는 화가 났다.

‘날 명백하게 무시하는 처사다.’

1만 골드.

4만 명의 사람이 일 년간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이다.

사실상 패배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였고, 무엇보다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할 테니 마탑의 마법사들을 불러오라고 말했다.

로만의 의도는 그런 의미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연속되는 발언은 부정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날 펠렉스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펠릭스.

5서클 마법사.

오라 검사로 치면 4성의 경지지만, 마법사의 특별함은 보통 성의 경지를 넘어서는 위력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5성의 오라 검사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이렇게 쉽게 쓰러트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에, 이틀간의 대련을 끊임없이 돌아보았다.

‘지금부터는 자존심의 문제다. 반드시 로만을 무릎 꿇리고, 드미트리의 금고를 탈탈 털어 주마.’

초반 일주일.

패배의 연속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로만 드미트리의 회피 능력을 공략할 방법이 없었고, 일부러 메모라이즈 마법을 쌓아 두면서 로만의 패턴을 익혔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마음으로. 패배를 밑거름 삼아,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다양한 계획을 구상했다.

8번째 대결.

이동을 제약하는 마법들을 활용했다.

슬로우(slow)와 같은 강제적인 마법들로 로만의 발을 묶었는데,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마법의 효과가 사라져 버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첫 번째 대결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홀드의 효과를 뿌리치기는 했지만, 연속되는 마법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마법 학계에 의하면.

체내에 파고드는 마나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효과를 없앨 수는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워낙 난해한 방법이었고,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 속도는 일반적인 속도를 넘어섰다.

첫 번째 작전 실패.

5일 뒤.

두 번째 작전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미스트(mist)와 같은 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숨겼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각적인 정보가 차단되었는데도 펠릭스의 위치를 귀신같이 찾아냈다.

어쭙잖은 시도에 하늘과 땅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강한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며, 펠릭스는 처참하게 땅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일주일 뒤.

세 번째 작전은 체계적이었다.

로만의 공격을 유도했다.

미리 하루 전날에 마법 트랩을 설치해 둔 상태였고, 로만 드미트리가 달려오자마자 마법 트랩을 발동시키면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로만이 땅을 내딛자 강력한 충격이 일며 마법 트랩이 파괴되어 버렸다.

마법 트랩의 존재를 파악한 것도 대단한데, 물리적인 충격으로 마법 트랩을 파괴한다는 말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어 보질 못했다.

멘탈이 나갔다.

세 번째 작전.

다소 치졸한 방법이었다.

즉흥적인 승부가 아니라 하루 전날 준비한 것인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로만은 괴물이었다.

마법사들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

단순히 실력의 차이를 떠나, 로만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능력은 마법 학계의 논문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거지?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악의적인 마음을 품는다면, 6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을 제외하고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다.’

소름이 돋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전장에서 만난다는 상상만으로도, 연속되는 패배를 웃으며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대결.

그야말로 발악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마지막 30일에는 자존심을 버렸다.

최후의 방법.

선공의 기회를 살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오만하게 내어주는 시간을 활용해, 시작부터 강력한 공격으로 끝을 보려고 했다.

그 결과.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의 방어막.

전력을 다한 공격도 허무하게 막혔다.

아련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곧 들이닥칠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퍽!

빙글 돌아가는 세상.

땅바닥에 처박힌 펠릭스는, 한 달 만에 백기를 내걸었다.

* * *

30일.

30번의 대결.

30번의 패배.

이제는 인정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서 이길 수 없는 존재였고, 펠릭스는 이번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다.

‘내 개인적인 자존심에 집착하지 말자. 만약 피닉스 마탑을 이끌고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괴물을 만난다면. 우리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마탑에 연락했다.

피닉스의 마법사들이 드미트리에 도착했고, 펠릭스가 목적을 설명하자 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일대 다수로 싸우자는 말씀입니까?”

“펠릭스 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닙니다. 마법사들은 일반적으로 ‘대련’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마법은 검사들의 검술 대련처럼 위력을 조절하기가 힘든 영역이라, 자칫 잘못했다간 인명 사고로 직결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일대 다수의 대결이라니요. 드미트리의 장남을 다치게라도 했다간,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일대 다수.

상식적이지 않은 대결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못마땅한 부분이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30번의 대결에서 30번을 패배한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펠릭스 님은 이제 엄연히 피닉스 마탑의 마탑주 대행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품격과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머나먼 타지까지 와서 이런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녹스라는 이름의 마법사였다.

마탑주의 실종 직후.

피닉스의 권력 체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펠릭스가 마탑주 대행을 맡았지만, 마법 학계에서 번번이 무시를 당하는 상황에 녹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마탑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도 암담한 미래를 개선할 방법이 없건만, 그들은 무능력한 마탑주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법으로 뛰어날 수 없다면.

정치질이라도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외골수 기질이 있는 펠릭스는, 마법사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마탑주로서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펠릭스가 말했다.

“너희들의 말이 옳다. 30번의 대결에서 30번의 패배는,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결과다. 하지만 이번 대결에 로만 드미트리는 무려 ‘1만 골드’의 보상을 걸었다. 만약 우리가 힘을 합쳐서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린다면. 그중 절반은 너희가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해도 좋다.”

“……그게 정말입니까?”

순간.

마법사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1만 골드의 절반.

5000골드는 인원수로 나눈다고 해도, 군침이 돌 수밖에 없는 거금이었다.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탐욕으로 물든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자, 이번에도 녹스가 대표로 말했다.

“딱 한 번만 이기면 되는 겁니까?”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법사의 천적과도 같은 인물이고, 우리가 방심한다면 머릿수의 우위를 가지고도 패배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전략 회의를 충분히 진행하고…….”

“괜찮습니다.”

말을 툭 끊었다.

녹스.

그 또한 5서클 마법사였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펠릭스에게 마탑주의 자리를 내준 것이 불만이었고, 그렇기에 펠릭스의 말을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펠릭스보다 뛰어난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펠릭스가 쓰러트리지 못한 상대라 할지라도, 자신을 비롯한 다수의 마법사가 나선다면 얘기가 달랐다.

그가 단언했다.

“펠릭스 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

* * *

며칠 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련이 진행되었다.

펠릭스와 녹스, 그리고 3명의 마법사.

5대 1의 대결이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인데도, 로만의 반응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하.”

피식.

녹스가 비웃었다.

그냥 붙어도 자신들이 유리한 싸움이다.

그런데 선공을 양보하다니.

대체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그 말, 후회하지 마십시오.”

힐끗.

눈짓을 주었다.

1만 골드가 걸린 싸움이다.

상대의 방심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번 대결은, 녹스의 마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파이어 랜스.”

화르르르륵.

강력하게 일어난 화염이 창의 형태를 형성하는 순간, 다른 마법사들도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파이어 웨이브.”

“파이어 버스트.”

화염이 폭발했다.

명확한 전략은 없었다.

녹스는 단순하게 화력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고, 사방에서 불타오르는 화염이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그대로 덮쳐 버렸다.

화염 마법은 화력이 모일수록 강해진다.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한 마법이 퇴로를 모두 차단해 버렸기에, 로만이 버틸 방법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확-

“……!”

화염을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간 펠릭스를 무너트린 ‘오라의 방어막’을 활용한 패턴이었기에, 펠릭스가 황급히 외쳤다.

“조심해! 파이어 월.”

화르르르르륵.

불의 벽을 일으켰다.

잠시라도 시간을 벌려는 속셈.

불길이 빠르게 번지기도 전에, 로만 드미트리는 순간적인 틈을 파고들어 마법사 한 명을 공격했다.

빡-

“크억.”

비명이 들렸다.

마법사 하나가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고, 당황한 얼굴로 다음 공격을 시도하려는 사이에 또 다른 마법사가 로만의 공격을 받았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블링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데도 로만은 순식간에 마법사들과의 거리를 좁혔고, 한 번의 공격을 시도한 대가로 두 명의 마법사가 당해 버렸다.

“이런 미친.”

녹스가 당황했다.

예상대로라면.

첫 공격에 끝났어야 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화염을 끌어들였고, 비장의 무기를 사용했다.

“파이어 필드(Fire Field).”

화르르르르르륵.

5서클 화염 마법.

주변의 화염을 컨트롤했다.

빠르게 로만을 덮치며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려고 했지만, 어떤 방향으로 공격하든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장면이었다.

불길이 넘실거리는 상황에서, 로만은 뜨거움을 느끼지 않는지 빠르게 공격을 피하며 또 다른 한 명의 마법사를 공격했다.

그들은 몰랐다.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

웬만한 열기는 로만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퍽!

세 번째 마법사가 당했다.

남은 마법사는 둘.

녹스는 이를 악물며 마나를 끌어올렸으나, 뭘 해보기도 전에 그는 눈앞에 나타난 로만을 발견했다.

“헉?!”

상식을 벗어난 속도.

그제야.

펠릭스의 경고가 떠올랐다.

펠릭스는 수도 없이 조심하라고 말했지만,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이상 로만의 실체를 알 방법은 없었다.

결국.

빠악-

녹스가 비틀거렸다.

강력한 충격에 눈을 뒤집어 까며,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압도적인 승부.

펠릭스는 입을 떡 벌렸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지만,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마.”

애써 외면했던 진실.

그것이 이번 대결로 드러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제껏 자신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전력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 * *

피닉스의 마법사들.

멘탈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

퉁퉁 부은 얼굴로 정신을 차린 그들은, 첫날의 펠릭스처럼 넋을 잃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더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건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

압도적인 패배.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난 이들은 그래도 살아가면서 항상 강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이토록 무력한 패배감은 난생처음 경험해 보았다.

펠릭스의 말은 옳았다.

30번의 대결에서 30번을 패배할 만큼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을 벗어난 괴물이었고, 그를 쓰러트릴 방법은 떠오르질 않았다.

“……펠릭스 님. 그간 대체 무슨 싸움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녹스였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일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하자, 같은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괜히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일대 다수.

마지막 가능성마저도 사라졌다.

더는 로만을 쓰러트릴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펠릭스는 마법사들을 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거라. 로만과 대화를 하고 오겠다.”

궁금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대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을 상대하는 걸까?

회피하는 동작부터 시작해서 오라의 방어막.

하나부터 열까지, 로만 드미트리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로만을 찾아갔다.

방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 펠릭스는 괜히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솔직히 이제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패인(敗因)을 분석할 수 있도록, 저희를 어떻게 쓰러트렸는지 설명이라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로만 드미트리 님처럼 마법을 피하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사람은 존재하질 않습니다. 이게 어려운 부탁이라는 것은 잘 알겠지만, 부디 앞으로를 생각해서…….”

“알겠습니다.”

“예?”

“정확히는 말씀드릴 수 없겠지만, 어떻게 대결을 준비했는지 정도는 알려 드리겠습니다.”

로만의 대답.

예상 밖이었다.

비밀 유출을 걱정해서 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로만은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자리를 옮겼다.

내성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깔끔한 형태의 2층짜리 건물이었다.

“이곳입니다.”

“……이건?”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환경이 보였다.

마치 마탑처럼, 책장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건물 내부에는 수많은 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로만이 말했다.

“이 안에 있는 책들은 전부 마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아마 카이로 시중에 나와 있는 웬만한 마법 서적은 모두 보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대중적인 서적부터 시작해서 비주류 서적까지. 한동안은 이곳에서 살며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석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언뜻 보아도 수천 권의 책.

입을 떡 벌렸다.

눈으로 쏟아지는 책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의 승리가 운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지금부터 제가 펠릭스 님을 어떻게 상대했는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단순히 호의로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오. 제 설명을 모두 들었을 때, 펠릭스 님이 덧붙일 조언이 있길 바랍니다.”

로만이 걸어갔다.

탁.

한 권의 책.

마법의 이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너무나도 기초적인 마법 서적에, 그때만 해도 펠릭스는 의문으로 가득한 표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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