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615)

159화 양방통행 (2)

해리슨은 아내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여보!”

아내가 반색했다.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는 슬쩍 옆을 보았다.

“아침부터 딸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바로 저기 있는 남자가 사람들을 이끌고 왔어요. 나도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로만 드미트리 님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해서 일단은 알겠다고 했는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어느새 이런 파티를 준비하게 됐어요.”

“로만 드리트리 님의 사람들이라고?”

아내의 시선을 따라갔다.

한 사내.

그가 사람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로만을 모시기에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로만 도련님이 왜 사람들을 보내셨지?’

딸의 생일 파티다.

이유를 알아야 했기에, 해리슨은 사건의 주도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혹시 로만 도련님이 보내셨습니까?”

“아?! 해리슨 씨?”

“예. 제가 해리슨이 맞습니다만, 왜 제 딸 아이의 생일 파티를 준비해 주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아델리안 가문을 상대하듯.

드미트리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해리슨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사내가 말했다.

“저는 로만 도련님을 모시고 있는 루카스라고 합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절 보실 필요 없습니다.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만 도련님이 한스 씨에게 보답하고자 이렇게 저를 비롯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생일 준비는 저희에게 전적으로 맡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 파티는 따님을 위한 축하의 자리일 뿐만 아니라, 해리슨 씨가 앞으로 아델리안 영지에서 지내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로만과 한스.

귀족과 하인의 관계다.

귀족이 하인의 손자를 챙기는 일은 없기에, 설명을 듣고도 해리슨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로만 도련님, 그러니까 제 주군은 한스 씨를 정말 귀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아마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감정이겠지요. 그렇기에 어떤 특별한 목적을 바라고 저희를 보낸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따님의 생일을 축하하려는 의도로 이런 일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에게 주군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지 못하셨습니까? 한스 씨는, 이만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얼떨떨했다.

가치가 있는 사람.

머릿속에 박히는 단어에, 해리슨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 아버지를 귀중하게 생각한다니.’

의외였다.

사람들은 최근에 로만 드미트리가 변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만, 한스의 아들인 해리슨은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망나니였는지를 잊지 못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쓰레기.

해리슨의 친구들은 한스가 망나니의 하인이라면서 놀렸었다.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아 부족하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던 해리슨이지만, 길거리에서 로만을 따라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은 달갑지 않았다.

술에 취해 고성방가를 내지르는 로만 드미트리.

아버지가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성공하고 싶었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자신의 사업을 차리면서 인생을 변화시켰다.

예전에는 하인의 아들이라 불렸던 사람이.

지금은 어엿한 사장이 되었다.

아직도 남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똑같았지만, 지금의 위치는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로만의 호의를 마주했다.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던 추억이, 그의 현실에 나타나 당혹스러움을 선사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망나니라고 불리던 시절. 아버지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겪어서 삐뚤어졌을 뿐이지, 심성은 착한 아이라고 했었어. 나는 그 사실을 부정했어. 로만 드미트리는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고, 아무리 평판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노력은 아무런 의미 없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위해 내게 사람을 보내 주었어.’

울컥했다.

아버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직접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는 사실에, 해리슨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보였다.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말. 그것참, 좋은 말이네요.”

심성이 착한 아이.

이제는.

아버지의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해리슨은 파티 준비를 허락했다.

루카스는 모든 것을 맡겨달라고 말했고, 그의 명령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파티를 꾸몄다.

아직 파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런데 일부 부지런한 사람들이,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우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우리 장소 제대로 찾아온 거 맞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외 파티장.

귀족 가문의 파티라고 해도 믿을 만큼 멋들어지게 준비된 상황에, 사람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약에 해리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장소를 잘못 찾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해리슨은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사람을 보내 준비해 주었다고 말이다.

그 말에.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해리슨의 아버님을 위해 사람을 보냈다니.’

‘대체 언제부터 해리슨 뒤에 이런 든든한 백이 있었던 거지?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해리슨의 딸을 위해 멋들어지는 선물을 준비하는 건데. 아니, 로만 드미트리와 돈독한 관계였다는 것을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그들은 예전에 해리슨이 로만의 험담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리 좋은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파티까지 준비해 줄 정도라면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나도 집에 선물을 두고 왔네.”

사람들이 슬그머니 걸음을 돌렸다.

선물이 필요했다.

해리슨에게 엄청난 인맥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지금, 그의 위치는 예전처럼 평범하지 않았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놀란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평민에 불과했기에, 로만의 호의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이제 시간이 거의 되었다.

파티 준비가 막바지에 달했을 즈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척척-

일정하게 걸음을 내딛는 소리.

아델리안 가문의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파티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그들뿐이었다면.

해리슨은 이토록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그들의 중심에는.

바로 한스.

해리슨의 아버지가, 아델리안 가문 병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 * *

마차를 타고.

한스는 아델리안 영지에 도착했다.

그것만으로도 과분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아델리안의 경비대장이 반겨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비대장.

그는 아델리안 백작으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한스가 도착하는 대로 그를 에스코트하라고.

로만이 특별히 부탁한 것이 아닌데도, 아델리안 백작은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을 보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스는 당연히 거절했다.

손녀의 생일 파티다.

주인공이 따로 있는데, 요란하게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제발,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스 님을 에스코트하지 못한다면, 아델리안 백작님이 어떤 불호령을 내릴지 모릅니다. 과한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파티장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저희가 길을 안내하게 해 주십시오.”

경비대장이 간절한 얼굴로 매달렸다.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까.

명령을 따르는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한스는 차마 경비대장의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스는 파티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그를 보며 놀란 만큼, 한스도 파티장의 풍경에 말을 잃어버렸다.

“허.”

눈앞의 광경.

호화스러웠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조촐한 파티는 존재하지 않았고, 화려한 장식품들과 산해진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때마침 귓속으로는 은은한 클래식 노래가 들렸다.

전문적으로 연주를 배운 연주자들이 손녀의 파티를 위해서 연주를 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한스는 순간 뭉클한 마음이 일었다.

‘……도련님.’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소행이었다.

손녀의 파티를 위해 하루 전날 가라던 로만 드미트리는, 마차를 미리 준비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성대한 파티까지 마련해 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화려하고 멋들어진 파티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개 하인을 위해서 로만이 마음을 써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참.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로만이 변하면서 다소 차가워졌다고도 말했지만, 한스는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드미트리 가문의 아픈 손가락.

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한스의 눈에 항상 밟히던 아이가, 자신에게 보답하겠답시고 벌인 일들이 진심으로 고맙기만 했다.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낸 한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아버지!”

하나뿐인 외동아들.

해리슨이었다.

그가 다가오는 모습에.

“아들아!”

한스는 활짝 웃으며, 해리슨을 와락 안아 주었다.

* * *

파티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맛있는 음식.

좋은 음악.

좋은 사람들.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평소에 즐길 수 없었던 환경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지금부터 선물을 개봉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해리슨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은 딸을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

처음 계획은 선물을 4~5개 정도 개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보냈는지, 선물 테이블에는 수십 개의 선물 상자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첫 번째 선물은 제 아버지가 준비해 주신 선물입니다.”

아직 어린 딸을 대신해.

해리슨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드러난 어여쁜 관절 인형에, 손녀는 까르르 웃음을 보이며 인형을 안았다.

“정말 예쁜 관절 인형이네요. 딸 아이가 매일 같이 관절 인형을 사 달라고 졸랐는데, 아버지가 그걸 알았는지 준비해 주신 모양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아버지 덕분에 특별한 날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아들의 말에.

한스가 웃음을 보였다.

선물 개봉은 카이로의 전통이었다.

한스에 이어 차례로 선물을 개봉했고, 조촐하지만 마음이 담긴 선물들이 속속들이 공개되었다.

그런데.

한 선물을 공개하려던 해리슨은, 순간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이건…….”

상자는 작았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그 어느 것보다도 충격적이었다.

“콘라드 자작님이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루비…… 가 박혀 있는 반지라네요.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웅성웅성.

“콘라드 자작님이라고?”

“평민의 생일 파티에 귀족이 왜 선물을 보내?”

사람들이 당황했다.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파티를 준비해 준 로만 드미트리라면 몰라도, 뜬금없이 콘라드 자작의 존재는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델리안 백작님이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로렌스 자작님이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연속해서 개봉되는 선물들.

예상치 못한 이름들이 호명되었다.

선물의 면면은 화려했다.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귀족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화려한 선물을 보냈고, 루비 반지와 같은 고가의 선물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상 손녀의 선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해리슨을 위한 선물이었고, 정확히는 한스를 향한 애정 공세였다.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성대한 파티만으로도 충분히 놀랐는데, 귀족들이 축하해 주는 파티라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일련의 상황.

눈으로 보고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잘난 귀족들이 왜 해리슨에게 선물을 보내는 거지?’

사람들은 몰랐다.

지금으로부터 6시간 전.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하나의 소식으로 인해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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