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학살의 밤 (4)
사람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로만 드미트리가 바르보사를 쓰러트렸으며, 얼마나 경악스러운 행보를 보여 주었는지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경험한 노련한 지휘관으로서도 상식을 벗어나는 판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상식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생각을 거듭할지라도.
일만의 병력이, 단 한 명의 검사에게 당한다는 생각 자체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벤토가 죽었다.
일격에 나가떨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파블로 백작은 드디어 ‘상식의 틀’에서 벗어났다.
‘……이 녀석은 정말, 우리를 전부 도륙할 생각이다.’
소름이 돋았다.
벤토의 생각처럼 불이 어쩌면 퇴로를 막는 용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에 가득했던 여유로움이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시야에는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득실거렸다.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상황에 일부러 마법사들의 개입을 자제시켰지만, 지금부터는 얘기가 달랐다.
“예일!”
“예.”
“지금 당장 공격 마법을 사용해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라!”
“……그랬다가는 아군의 피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네 눈에는 지금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 이대로 있다가는,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린다고 할지라도 상당수의 병력을 잃게 될 거라고! 어차피 적의 손에 죽을 녀석들이라면, 차라리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겠지.”
“알겠습니다.”
파블로 백작의 분노에, 예일이 한발 물러났다.
옳은 말이었다.
병사들에게는 잔인한 현실일지 몰라도, 벤토마저 쓰러진 마당에 아군의 피해를 걱정해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예일의 신호에 블루 아일랜드의 마법사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그들로부터 마력이 일어나더니,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이 발현되었다.
“아쿠아 캐논(aqua cannon).”
“아쿠아 볼(aqua ball).”
“아쿠아 볼.”
콰앙!
콰콰콰콸!
마법의 범위는 특정되지 않았다.
강력한 물의 폭발이 그대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휩쓸었고, 정신없이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물의 압력에 머리가 꺾이고, 허리가 부러져 버렸다.
기도로 차오르는 물은, 순식간에 내부에서 터져서 사람들의 숨을 끊어 버렸다.
잔인한 광경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도 무사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순간, 예일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확.
눈앞에.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찰나의 순간에,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회피하는 판단을 내렸다.
“메모라이즈, 홀드(hold).”
상대를 묶었다.
전사들을 상대하는 마법사들의 전유물을 사용함과 동시에, 블링크로 눈앞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머릿속의 판단으로는 일련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런데 막상 마나를 일으켰을 때는, 시선 위로 튀어 오르는 붉은 핏물에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법이 발현되지 않았다.
‘……?!’
가슴팍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홀드의 효과는 1초도 지속되지 않았고, 5서클에 달하는 마법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해 버렸다.
블루 아일랜드의 마법사들.
그들이 분노하며 마법을 발현했다.
하지만 폭발하는 마법들은 허공에 작렬할 뿐,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는.
“크악.”
“이, 이게 무슨…… 컥!”
단숨에 죽여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빠르게 공간을 이동하다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법사들의 육체를 베어 버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반응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기 위해 마법을 발현하자, 이미 마법의 영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마법사를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악했다.
이게 인간의 무력이란 말인가.
마법이 단번에 파훼되며, 마법사들의 존재 의미가 사라졌다.
“마법사님들을 보호하라!”
“공격해!”
병사들이 밀려들었다.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망스러운 현실이었다.
‘낙뢰(落雷).’
로만 드미트리의 검에서 파괴적인 기운이 휘몰아쳤다.
마교의 무공 중, 다수를 상대로 가장 강력한 힘.
번뜩.
콰콰콰콰콰콰쾅!
하늘에 떠오른 로만 드미트리가 바닥에 내리꽂히며, 마치 한 줄기의 벼락처럼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충격에 휩쓸린 사람들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범위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은, 단순히 기의 압력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혼절해버릴 정도로 일반적인 인간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콰르르르르릉.
먼지구름이 일었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제국의 병사들은 더는 그를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겁에 질렸다.
본능에 억압되듯이.
그들은, 수천의 병력이 남았는데도 전의(戰意)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 * *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의지다.
전의를 잃는 순간.
아무리 많은 병력을 보유했다고 한들, 그들은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저벅저벅.
로만 드미트리가 걸어갔다.
검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고, 제국의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떤 이는 인파에 밀려서 앞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에,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엉덩이로 기어갈 정도였다.
시선의 끝에.
파블로 백작이 있었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당황한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다들 뭣들 하느냐?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라! 저 극악무도한 악마를, 얼른 공격하란 말이다!”
“…….”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제국의 병사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그 누구도 먼저 용기를 발휘해서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벤토와 7기사단. 블루 아일랜드의 마법사들.
일반 병사들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자들조차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압도적으로 쓸려 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병사들의 머릿속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공포로 얼룩지고 말았다.
한 발.
두 발.
점점 다가왔다.
파블로 백작은, 뒤로 물러나며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새끼들아! 명령 불복종은 즉결처형감이다. 너희가 여기에서 살아 나간다고 할지라도, 제국의 법도가 너희를 살려 줄 것 같으냐?! 검을 들어라!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해라! 그 누구라도 먼저 모범을 보이는 자가 있다면, 이 파블로 백작이 그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당근과 채찍을 내밀었다.
점점 간절해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도, 파블로 백작의 명령에 응하는 존재는 한 명도 없었다.
결국.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파블로 백작은, 겁에 질린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로만 드미트리.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네가 적당히 넘어간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드미트리를 상대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라스칼을 공격하고. 나까지 죽인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어차피 드미트리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인데, 왜 제 무덤을 파느냔 말이다!”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죽인다는 확신에, 파블로 백작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래, 이 개새끼야! 죽여라, 죽여! 하지만 명심해라! 겨우 네 녀석 따위가, 크로노스와의 전면전(全面戰)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라스칼의 병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곳에 드미트리를 무너트리기 위해 수십 만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고, 그들은 네가 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드미트리를 단숨에 쓸어버릴 것이다. 그것이, 네가 저지른 이 만행의 대가다!”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 모습은.
로만 드미트리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광마의 죽음.
백중혁은 제사를 치렀다.
먼저 떠난 이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 백중혁은 갑작스럽게 하남성(河南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숭산(嵩山)이 있었다.
구파일방의 수장인 소림사가 위치한 곳이었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천마의 모습에 소림의 무인들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비상이었다.
마교가 무림 정벌의 야욕을 드러낸 지금, 그들로서는 적의 침공에 백팔나한(百八羅漢)과 숭산의 무인들을 동원해 백중혁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날.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백중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소림의 본거지에서 홀로 싸우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정파 무림이 신성하게 여기는 숭산이 피로 물들었을 때,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더미 위에 서 있는 존재는 백중혁이 유일했다.
주변의 광경과는 다르게 백중혁의 모습은 평온했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피로 흠뻑 물들었지만, 이 치열한 혈투에도 그의 몸에는 특별한 상처가 없었다.
압도적이었다.
한때는 소림의 희망이라고 불리던 무승은, 처참한 얼굴로 백중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대체 왜지. 어째서, 네 녀석 혼자서 이곳을 공격한 거지?”
피를 토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백중혁이 이토록 압도적인 무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홀로 소림을 공격한 일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무승은 백중혁을 올려다보았다.
소림은 이렇게 막을 내리겠지만, 그래도 백중혁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행했는지 그 의중이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때.
백중혁은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람
이 죽었다.”
특별한 이유?
없었다.
원하기에 행할 뿐이고, 그렇게 살기 위해 권력이 필요했다.
“이제는 알겠지. 구파일방의 정점이라 할지라도, 내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무승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그제야 알았다.
마교와의 전쟁.
애초에, 정파 무림에는 승산이 없었다는 것을.
* * *
그때와 똑같았다.
절망에 빠진 표정.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응.
로만 드미트리는 쪼그려 앉아, 파블로 백작과 시선을 마주쳤다.
“내가 왜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결심한 줄 아나.”
콱.
“흐읍?!”
하관을 틀어쥐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파블로 백작은 버둥거릴 뿐 로만 드미트리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크로노스가 대륙의 지배자인 것처럼,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 파블로 백작. 너희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크로노스의 역사가 단 한 번의 패배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들, 내게 중요한 것은 너희가 드미트리의 땅에 들어와 내 사람들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파블로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
발언권을 바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손을 풀어 주자, 그는 고통에 기침을 몇 번 내뱉더니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정말, 그게 끝이라고? 크로노스 제국이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이 말도 안 되는 전쟁을 벌였다고? 로만 드미트리! 정말 우습구나! 세간에는 너를 천재라 칭송하며 떠받들지만, 현실은 멋모르고 날뛰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국정(國政)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네 판단 하나에,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냐.”
마지막 발악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답하지 않았다.
파블로 백작의 품을 뒤지더니, 적대적인 그의 시선을 뒤로하고 품에서 마법 통신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콰직.
부숴 버렸다.
당황하는 파블로 백작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는 그 정도 이유면 충분하다.”
그때였다.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으악!”
“사, 살려 줘!”
불길이 일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제국의 병사들이 불길에 휩싸였고, 그들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댔다.
순식간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전의를 잃어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존재들은, 일일이 검으로 처리할 만큼 공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파블로 백작이 앉아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주변의 모든 공간을 불길로 뒤덮어 버렸다.
숨이 막혔다.
파블로 백작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뒤로하고 서 있는 로만 드미트리가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이윽고.
로만 드미트리마저도 불길에 휩싸였다.
사방이 불타오르는 상황에서, 불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네게 기회를 주지. 불에 탈 것을 각오하고 살아남든, 아니면 제국에 라스칼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고하고 죽든. 그것은 너의 선택이다.”
그것을 끝으로.
더는,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