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양방통행 (4)
정마대전(正魔大戰).
매일같이 피와 살육이 난무하던 그 시절.
파도처럼 밀려드는 정파의 고수들을 모두 도륙한 백중혁은, 피로 흠뻑 물들어 있는 광마를 보았다.
“……후욱, 후욱.”
광마는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폐에 이상이 생겼는지 숨소리는 안정적이지 못했고, 얼굴에서는 자신의 피인지 적의 피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광마는 소매로 피를 벅벅 닦았다.
힘을 잃은 몸은 자꾸만 비틀거렸지만, 짐승처럼 살아 있는 눈빛으로 정파인들의 시체에 일일이 검을 박아 넣었다.
“컥!”
그중 간혹.
생존자가 있었다.
혹시 모를 변수를 완전히 차단하고 나서야, 광마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힘겨운 얼굴을 보였다.
“괜찮느냐?”
“……괜찮습니다.”
광마가 자세를 바로 했다.
백중혁이 몸 상태를 물었을 뿐인데, 광마는 최대한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전신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아무리 초인적인 회복 능력을 지닌 광마라지만, 시도 때도 없이 멀어져 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던 아이는,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조금 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백중혁이 말했다.
“무인의 삶은 죽는 그 날까지 평화로울 수 없다.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하고, 살기 위해서 발악을 해야만, 죽음의 경계선에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너는 나를 따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운명의 굴레에 따라 우리는 무림 정벌에 나섰다. 누구 하나가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면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권모술수(權謀術數)는 끊이질 않고, 나는 천마신교의 교주로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너는 아니다. 만약 지금에라도 일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주겠다. 평생을 먹고살 만큼의 금은보화와 너를 안락하게 해 줄 보금자리, 그리고 그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지난 과거도 지워 주겠다.”
광마를 보았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들 말하지만, 백중혁의 눈에는 아직도 처음 만난 날과 겹쳐서 보였다.
그때의 광마는.
선택지가 없었다.
백중혁을 따르는 것만이 그의 전부였고, 매일 투쟁하다 보니 어느새 광마라고 불렸다.
광마는 고개를 저었다.
“주군의 말처럼 제게는 의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마대전이 일어난 명분, 그리고 그 과정에 뒤얽혀 있는 이권은 제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주군은 제게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주군이 바라는 일이기에 행할 뿐이고, 주군을 위협하는 자들이라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환하게 웃었다.
피로 물든 이빨이, 광마의 현재를 보여 주었다.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군이 저를 믿어 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평생 주군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때.
백중혁은 생각했다.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들.
그들이 자신을 향해 맹목적인 믿음을 보여 주듯,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믿음을 보여 주겠노라고.
그 끝에 배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상관하지 않았다.
현재가 중요하기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인의 삶에서, 백중혁은 지금 보고 느끼는 것들에 충실했다.
그뿐이었다.
백중혁.
아니, 로만 드미트리는.
전생을 기억하기에,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들의 진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 * *
한스가 숙소로 돌아왔다.
작은 공간.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드미트리 부자는 한스에게 더 넓은 공간을 제공해 주겠다고 수도 없이 말했지만, 한스는 한사코 필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좁고 초라해 보이는 공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드미트리 가문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내 온 이곳이, 한스를 심적으로 평안하게 했다.
털썩.
바닥에 앉았다.
침대 하나 없는 실내를 둘러보자, 곳곳에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흔적들이 보였다.
벽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빗자루.
로만은 아침부터 산책하는 일이 많기에, 한스는 그보다 일찍 일어나서 빗자루로 산책로를 쓸었다.
누가 명령한 것이 아니다.
로만이 다른 업무로 산책을 빼먹는 날이 있더라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항상 산책로를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면 빗자루 옆 수납장에 있는 물건들을 챙겼다.
로만이 땀을 많이 흘렸다면 수건을, 혹시 샤워를 원한다면 그와 관련한 물품을. 본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수납장을 가득 메웠다.
바닥에는 이불이 깔렸다.
푹신한 침대는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머리맡에는 로만의 스케줄을 빼곡히 정리한 달력이 있었다.
‘내일은 정기 회의가 있는 날이네.’
로만의 일정.
모든 것을 기록했다.
회의가 있는 날에는 자료를 정리해 대령했고, 혹시 집무실에 잉크와 종이가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품을 챙겼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하는 인물들의 근황을 확인해서 혹시 모를 변동 사항이 있는지를 체크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로만이 알아볼 수 없는 세세한 것들이지만, 한스는 로만이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관리하려고 노력했다.
한스의 후임.
머피가 곡소리를 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잡무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한스의 하루는 숨을 돌릴 틈이 없었다.
우뚝.
시선이 멈추었다.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다 낡아 버린 장난감이었다.
어린 시절의 로만은, 매일 자신을 챙겨 주는 한스의 정성에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아마도 기억하진 못할 것이다.
귀족의 자제들은 수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그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한스는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도련님.”
드미트리의 아픈 손가락.
로만의 유년 시절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로메로 남작은 권력 욕심이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평민이던 시절에는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밤낮으로 노력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챙길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매일 철광산과 대장간, 거래처를 오가는 일이 반복되었고, 리한나는 로메로 남작을 챙기기 위해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로만은 자연스레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관심이 필요한 나이에 로만은 홀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귀족이 되었다.
로메로 남작은 그간 챙기지 못했던 아들을 위해 많은 것을 선물했지만,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가 삐뚤어진 뒤였다.
권력과 돈. 일탈의 밑거름이 되었다.
평민과 귀족의 경계선에서 살았던 한 아이는, 가슴 속에 뻥 뚫린 구멍을 메우고자 술을 마시고 목소리를 높이며 존재감을 표출했다.
한스는 그 사실을 알았다.
자신도 아들을 키우는 입장이었기에, 로만이 아무리 얼간이처럼 굴어도 그를 끝까지 챙겨 주었다.
사람들이 로만을 비난해도.
자신에게 장난감을 건네며 방긋 웃어 보이던 로만을, 한스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흐윽.”
뚝, 뚝.
눈물이 흘렀다.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자신은 하인이다.
일반적인 귀족들은 하인이라는 존재를 천대하기에, 로만이 자신의 노고를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과분한 대우였다.
다른 가문 하인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로만 드미트리처럼 알아주기는커녕 조금만 실수해도 눈에 불을 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로만은 오늘 진심을 말했다.
자신은 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는 만큼 되돌려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흐윽, 흐으윽.”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하인.
태생이 천하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존재를.
로만은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 주었다.
어쩌면 돌려받을 수 없기에 맹목적으로 퍼 주었던 감정을, 이렇듯 돌려받는 날이 있다는 사실에 한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을 데려다주었던 마차, 에스코트를 해 주는 아델리안의 경비병들, 동북쪽 일대 귀족들의 선물 세례, 손녀를 위한 글로리 아카데미 입학 추천서.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안에 담긴 감정.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었다는 사실에, 한스는 그간 참았던 감정이 터지고 말았다.
전혀 슬프지 않았다.
정말 슬프지 않은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엉엉 울었다.
평소라면 바깥에 들릴까 숨죽이며 지내던 하인이.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감정을 쏟아 냈다.
그날, 늦은 밤까지.
한스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으로, 그 누구도 한스의 기나긴 밤을 방해하지 않았다.
* * *
생일 파티 사건.
소문이 퍼졌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사건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사람을 얼마나 아끼는지 재차 증명되었다.
피닉스 마탑.
회의를 위해 모인 수뇌부들은, 생일 파티 사건을 언급했다.
“……참,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드미트리에 발을 들였을 때는 마탑주님의 행보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왜 이런 변방의 영지까지 돈을 벌겠다고 온 걸까, 피닉스 마탑의 위상이 아무리 추락했다고 할지라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제 안목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녹스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그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우리들의 새로운 주군은 피닉스 마탑을 위해 많은 것을 해 주었습니다. 이주 과정을 세심하게 챙겨 주고, 거액의 예산을 배정해 주었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마탑의 부지 또한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주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습니다. 정말 속물적이게도, 저는 어쩌면 그게 미래에 돌려받을 것들을 위한 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랑크 왕국도 똑같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간과 쓸개를 빼 줄 것처럼 굴었던 그들은, 마탑주님이 행방불명이 되자마자 우리를 돈만 빨아먹는 쓸모없는 쓰레기 취급을 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은.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모든 호의에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던 50대 사내는, 생일 파티 사건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다릅니다. 귀족 가문의 장자는 하인을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잔인할지라도 그게 현실이건만, 주군은 자신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한스를 위한 성대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주군을 따를 가치가 있습니다.”
지난 3년.
피닉스 마탑은 안에서부터 곪았다.
마탑주는 행방불명되었고, 펠릭스는 대행으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였으며, 피닉스의 미래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드미트리에 도착한 이후로, 녹스는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었다.
“마탑주님. 그동안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간.
녹스는 펠릭스를 이름으로 불렀다.
존칭은 해 주었지만, 마탑주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마탑주님의 안목이 옳았습니다. 마탑주님은 무너져 가는 피닉스 마탑을 올바른 길로 인도했고, 우리는 결국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았습니다. 지금부터는 마탑주님을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마탑주님에게, 그리고 주군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간의 잘못은 잊어 주시고, 앞으로 저를 비롯한 마법사들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고개를 숙였다.
녹스는 마법사들의 중심이다.
그가 내뱉는 충성 맹세는, 피닉스 마탑이 온전히 펠릭스의 통제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펠릭스가 웃었다.
녹스의 행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또한 피닉스를 생각하는 인물임을 알기에, 펠릭스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알겠다. 우리는 이곳 드미트리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날.
피닉스 마탑은 하나로 뭉쳤다.
사람들은 피닉스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지만, 그들에게는 이전에는 없었던 중심이 생겼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렇게, 피닉스 마탑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 * *
시간이 흘렀다.
1년 뒤.
마침내, 로만이 예고했던 순간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