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공개 랭킹전 (1)
발할라 신전.
카이로 지부의 사제 윌라스는, 시들어 가는 꽃들에 물을 주며 푸념을 내뱉었다.
“참으로 따분하구나.”
최근 1년.
발할라 신전은 따분한 나날을 보냈다.
평소라면 자주는 아니더라도 무료할 즈음에는 랭킹전 신청이 들어왔는데,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도 랭킹전을 희망하지 않았다.
윌라스로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남부 전선에서 귀환한 로만 드미트리가 랭킹전을 언급한 순간, 랭커들은 서로 간의 경쟁을 멈추었다.
“정확히 1년 뒤. 로만 드미트리가 본격적으로 카이로 왕국 랭킹 순위에 대격변(大激變)을 일으킬 것이다.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1년간 자신을 갈고닦고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실력을 증명하면 된다.”
엄청난 이벤트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륙이 주목하는 인재.
승패를 떠나서 로만을 상대로 좋은 실력을 보여 준다면, 단번에 검사로서의 입지가 달라질 수 있다.
랭킹이란 무엇인가?
결국, 명예욕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를 증명하고자 치열하게 싸우는 대결의 무대다.
이왕이면 많은 관중과 확실한 보상이 있는 무대가 끌릴 수밖에 없었고, 카이로의 랭커들은 너도나도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폐관 수련에 돌입했다.
카이로 왕국 역사상 유례없는 현상이었다.
20대 중반의 검사가 대륙을 발칵 뒤집어 놓았기에, 사람들은 그동안 보여 주지 않았던 집단행동을 보였다.
윌라스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대결 상대가 특정되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랭킹전이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참으로 묘한 경계선에 있다. 호메로스와의 대결로 공식적인 순위는 100위지만, 헥토르 왕국의 랭킹 2위인 버틀러를 쓰러트리면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그게 바로 문제의 시발점이다. 상식적으로는 100위의 랭커가 가장 밑바닥인 99위를 상대로 한 단계씩 본인을 증명하는 것이 옳지만, 그의 실력은 이미 카이로 최상위 실력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1위부터 99위.
모두가 로만의 먹잇감이었다.
어떤 방식을 택할지 모르기에, 검사들은 혹시 모를 로만의 대결 신청을 경계했다.
게다가.
‘20대 중반의 나이가 로만 드미트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어린 나이.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로만이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혹시라도 버틀러를 쓰러트린 업적에 거품이 껴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이건 엄청난 기회일 수도 있었다.
20대의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에, 카이로의 검사들을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업적을 차지하길 바랐다.
애매한 경계선.
카이로가 침묵에 물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돌연변이의 출현에, 랭커들은 자신을 숨기고 최대한 실력을 갈고닦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로만 드미트리가 움직인 순간부터 카이로의 랭킹은 순차적으로 밀릴 것이 분명하다.’
확신이었다.
발할라 정보통에 따르면.
버틀러와의 승부는 진짜였다.
로만이 상위부터 도전하든, 최하위부터 도전하든.
로만 드미트리 하나로 인해서, 카이로의 랭커들이 전부 밀려 나갈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사제님, 사제님!”
발할라의 신도.
그가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드디어 사제님이 기다리던, 공개 랭킹전을 시작하겠답니다!”
그 말에.
윌라스는, 어린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보였다.
* * *
그 시각.
베네딕트 후작도 같은 내용의 보고를 받았다.
“……드디어 움직이는 건가.”
지난 1년.
그는 로만을 영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1년이라는 정확한 기한을 두었지만, 베네딕트 후작은 노력하는 자만이 미인을 쟁취할 수 있다는 말을 믿었다.
주기적으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선물을 보냈고, 드미트리 가문의 경조사를 챙겼으며, 어느 날에는 자신의 딸을 보내 로만의 호감을 사도록 했다.
그런 노력에도.
로만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보다 호감을 얻었을진 몰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확고한 대답을 내뱉진 않았다.
‘최근 국제 사회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크로노스 제국.
그들은 활화산과도 같았다.
내부에서 대륙 정벌을 주장하는 이들로 인해서 언제 폭발할지 몰랐고, 무엇보다도 최근에는 크로노스 제국에 있는 마탑들의 주요 인물들이 실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 시작은 프랑크 왕국의 피닉스였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한 마탑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치부했는데, 연달아서 마탑주들이 실종하는 사건이 발발하자 사람들은 그 이면에 모종의 음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가장 큰 피해를 받은 크로노스 제국은 분노를 표출했다.
다른 국가들의 수작질이라고 확신하며, 지금이야말로 대륙을 정벌할 좋은 기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크로노스의 세는 대단했다.
그들이 어떤 야망을 지녔는지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게 혹시라도 ‘현실’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집을 자극하지 못했다.
그건 같은 제국인 발할라도 마찬가지였다.
발할라는 열대 우림이라는 지리적인 특성과 크로노스와 국경을 마주하지 않았다는 이점 덕분에 빠르게 세력을 성장시키기는 했지만, 아직 크로노스와의 정면 대결에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럴 때일수록 불안한 것은 약소국들이었다.
특히나 크로노스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카이로는, 언제 공격을 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크로노스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이 국경을 넘어 본격적으로 야망을 드러냈을 때, 카이로가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권력 체계가 필요하다. 이미 남부 전선에서의 전투로 카이로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때. 만약 귀족파가 로만 드미트리만 영입한다면, 그때는 현재의 권력 체계를 더 이상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로열 나이트.
그들을 쓰러트릴 베네딕트가 바라는 마지막 퍼즐이었고, 그래서 상대가 애를 타게 만들어도 참고 기다려 주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카이로 제일의 재능을 확보한다면, 귀족파가 나라를 뒤엎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나약한 국왕으로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버텨 낼 수 없다. 만약에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말하지 않는다면.’
퍽.
콰직.
컵을 부숴 버렸다.
호의는 희망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
일말의 희망마저 허락되지 않는 순간, 베네딕트 후작은 로만이라는 변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손에서 피가 흘렀다.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낸 그는, 가신을 불러 물었다.
“그래, 로만 드미트리가 어디에 있지?”
아마도.
수도로 올라왔을 확률이 높았다.
상위 랭커들이 대부분 수도에 있기 때문인데, 가신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그게, 로만 드미트리가 지금 북부에 있습니다.”
북부.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방법을 택했다.
* * *
랭킹 99위.
제이든은, 며칠 전에 받은 편지에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로의 랭커 자격으로, 랭킹 99위의 제이든을 상대로 랭킹전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소문만 무성하던 로만 드미트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상위권에서부터 도전하리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제이든을 첫 상대로 지목했다.
사실 객관적인 사실만 보았을 때는 로만 드미트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승부였다.
애초에 버틀러와의 승부를 논할 필요도 없이, 호메로스를 쓰러트렸다는 업적만으로도 카이로의 중하위권 랭커들은 모두 압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이든은 로만과의 대결을 기회로 여겼다.
‘로만 드미트리는 최상위 랭킹을 노리는 인물. 그가 정말 소문에 부합하는 실력자라면, 괜히 하위 랭커들을 상대로 힘을 빼는 소모전을 원할 리가 없겠지.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의 소문은 과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제고 상위 랭커들에게 패배하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일부러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의도겠지.’
일리 있는 가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이 진짜라면.
의미 없는 소모전을 생략하고, 곧바로 랭킹 1위에게 도전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이득일 수밖에 없다.
괜한 소모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일 승리뿐이고, 만약에라도 그 과정에서 피로가 쌓인다면 다른 승부들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게 노림수일지도 몰랐다.
피로가 쌓이고 부상을 당한다면, 적당한 핑계로 말을 무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제이든은 대결을 피하지 않았다.
명시된 날짜에 모습을 드러냈고,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했다.
‘소문처럼 정말 어린 녀석이군.’
20대 중반의 나이.
외모에서부터 드러났다.
듣기로는 이미 다음 상대와의 일정도 잡았다는 소문에, 제이든의 호승심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시작부터 전력을 다한다.’
이번 승부.
승리를 바라진 않았다.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이든이라는 검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하길 바랐다.
대결의 심판.
윌라스가 맡았다.
랭킹전 신청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그는, 둘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대결의 신호를 알렸다.
팔락.
“시작-!”
벼락처럼 떨어지는 신호.
그 순간.
퍽.
제이든의 정신이,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 *
지켜보는 사람들이 경악했다.
단 1초.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로만이 빠르게 쇄도하는가 싶다니, 제이든이 뭘 해 보기도 전에 상대의 급소를 강하게 강타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명불허전.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로만이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들도 제이든과 마찬가지로 ‘혹시’라는 의문이 들었다.
윌라스가 제이든의 상태를 살폈다.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에, 로만을 보았다.
“정말 의미가 없을 정도로 일방적인 승부군요. 굳이 이런 번거로운 대결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로만 드미트리 님의 실력이라면 곧바로 상위 랭커들에게 도전해도 될 텐데, 차라리 이후 대결 일정을 생략하고 한 30위 정도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만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대결이, 최정상을 노리는 로만 님에게 그리 이득이 아니라는 사실을.”
윌라스도 소문을 들었다.
99위와의 대결.
로만이 도망칠 핑계를 찾는 것이라고.
적당히 상위 레벨까지만 쓰러트리고 피로 누적으로 물러난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 상대해야 할 강자들을 피하고 명예를 확보할 수 있다.
정말 영리한 작전이었다.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다면, 의문이 따라붙더라도 ‘희망’을 남기는 결과가 본인에게는 이득이었다.
로만이 말했다.
“윌라스 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세간의 소문.
로만 드미트리의 삶이 명분을 내주었다.
만약 어렸을 때부터 검술의 천재라고 불렸다면, 사람들은 한 점의 의구심도 없이 로만의 행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백중혁이 빙의하기 전에 로만 드미트리는 얼간이라고 불리던 인물이었고, 카이로의 영웅보다는 악명(惡名)의 기간이 길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매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의 영웅으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실력이 소문만큼 대단할까에 대한 의심.
99위와의 대결은 의심에 불을 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정상을 바란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이렇게 무리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 대결로 어떤 소문이 떠도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 선택을 의심하는 이유는, 저라는 존재가 카이로 왕국의 정상을 차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내렸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최정상의 자리까지. 멈추지 않고 모든 강자를 쓰러트린다면, 제가 어떤 삶을 살았든 한 치의 의심도 남을 수 없겠지요.”
그 말을 끝으로.
로만은 걸음을 돌렸다.
다음 차례와의 대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먼저 길을 떠나는 로만의 뒷모습에, 윌라스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거지.’
99위부터 1위까지.
로만은 모조리 상대하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의심하든 말든, 실력으로 증명하겠다는 발언에 윌라스로서는 진심으로 기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카이로 생활.
로만과도 같은 사람을 기다렸다.
로만의 도전이 어디서 막힐지는 모르겠지만, 윌라스는 로만이 최대한 오래 버티길 바랐다.
허무하게 끝난 승부.
그 소식은, 곧바로 카이로 왕국을 강타했다.
* * *
첫 번째 승리.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아직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도전이기는 한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로만 드미트리는 일정을 굉장히 타이트하게 잡고 있어.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고 해도, 매일 같이 오라를 발현하는 날이 반복되면 피로가 중첩될 수밖에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상위 랭커들을 상대로 승리하려는 거지?”
“그러게. 그렇다고 늦장을 부릴 수도 없어. 제이든을 쓰러트리고 1위까지 도전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며. 일정을 차일피일 미루면, 자신이 내뱉은 말을 구차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어.”
이번 랭킹전.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하던 사람들도, 99위부터 1위까지 도달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한 명.
최소 99일이다.
그 모든 일정을 승리로 끝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겨우 일주일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