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공개 랭킹전 (3)
페르난도와 로만 드미트리의 대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간 30위권의 실력자들은 모두 랭킹전을 거절했기에, 30위의 수문장이라고 불리는 페르난도가 어떤 대결을 보여 줄지 기대감이 팽배하게 차올랐다.
“페르난도가 1분은 버틸 수 있으려나.”
“내가 보기엔 불가능할 것 같은데. 페르난도는 4성 이상의 오라를 발현하는 검사들을 상대로는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여 주었잖아. 로만 드미트리가 오라를 적극적으로 발현한다면 10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 반대라면 그래도 제법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겠지.”
“내 생각도 같아. 페르난도가 다른 것은 몰라도, 탄탄한 기본기와 검술은 인정을 받는 편이잖아.”
사람들의 예상은 부정적이었다.
페르난도.
사람들은 그를 ‘노력의 한계’라고 불렀다.
분명히 4성의 경지에 오른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은 수년간 제자리를 걷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답답할 정도였다.
분명히 검술은 상위권의 실력자들을 압도하는데, 오라의 위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항상 30위에 만족해야만 했다.
1년 전.
베르토프와의 대결이 페르난도의 한계를 보여 주는 예였다.
당시 99위였던 베르토프는, 검술과 노련미에서 완전히 압도당했는데도 페르난도를 쓰러트리는 것에 성공했다.
오라의 폭발. 강력한 한 방이, 대결의 구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할 페르난도의 모습에, 사람들은 다소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였다.
탁-
무대에 올랐다.
페르난도는 숨을 깊게 고르며, 자신의 상대를 마주 보았다.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입맛이 씁쓸했다.
로만의 외형.
너무나도 어렸다.
겉모습만 보면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저 사내가 바로 카이로 왕국 랭킹 구도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였다.
99위부터 시작해서 30위까지.
겨우 일주일 만에 자신의 앞에 나타난 괴물은, 나이를 무시하는 재능의 영역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열등감이 일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사람들은 잘 몰랐다.
매일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죽을 것처럼 노력하는데, 해가 바뀔 때마다 자신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앞질러 가는 기분을.
페르난도는 만년 30위였다.
단순히 재능의 벽에 막혀서 무너질 때면,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들끓었다.
구차한 감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된 독기가 아니었다면, 페르난도는 진즉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날 희생양으로 삼아라. 대신,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갈 수 있도록. 이번 대결로 네가 사는 세상을 보여다오.’
꽉.
검을 움켜쥐었다.
방심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자신은 명백한 약체.
오만함은 버렸고, 현실을 직시했다.
펄럭-
깃발이 바람에 날렸다.
그 순간.
콰르르르르르릉.
페르난도의 오라가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 * *
시작부터 전력을 다했다.
페르난도는 오라를 끌어올리더니, 양쪽 다리에 폭발시켜서 스피드를 극대화시켰다.
타다닥-
‘시작은 정면’
지난 대결.
로만의 방식을 연구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단히 오만한 검사였다.
상대가 어떤 공격을 펼치든, 세 걸음 이상 물러나는 경우가 없었다.
훅.
검을 찔렀다.
오라로 일렁이는 검에 바람이 휘몰아쳤고, 로만은 머리카락이 팔락이는 얼굴로 페르난도의 공격을 피해 버렸다.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겨우 한 걸음 물러났을 뿐이었고, 페르난도는 준비해 두었던 연계 공격을 펼쳤다.
펑-
검의 한 면.
오라가 폭발했다.
공격하는 방향이 강제적으로 틀어졌고, 직선으로 나아가던 검이 옆으로 꺾이며 로만의 목을 노렸다.
변칙적인 공격이었다.
동시에, 페르난도는 상대가 피할 것을 대비해 오라를 끌어올렸다.
훅.
로만이 몸을 젖혔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유연한 움직임이었고, 페르난도는 놀란 감정을 억누르며 곧바로 로만의 몸을 내리찍어 버렸다.
상식적으로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연속되는 공격에 로만 드미트리는 극한에 달한 동작을 보였고, 몸을 완전히 젖혀 버린 상황에서 내리찍는 검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홱.
고개를 틀었다.
페르난도를 똑바로 바라본 채로, 이번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공격을 흘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치고 올라왔다.
스프링이 튀듯, 로만은 중력의 힘을 거스르고 페르난도를 공격했다.
콰앙-
팔이 튕겨 나갔다.
오라의 격돌.
이번에도 힘에서부터 차이를 보였다.
페르난도가 후속 공격에 이를 악무는 순간, 이상하게도 로만 드미트리는 마무리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탁탁-
뒤로 물러났다.
거리를 벌리는 모습.
사람들은 박진감이 넘치는 대결에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페르난도는 상대가 자신을 일부러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체 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페르난도는 초반부터 승부를 보려는 속셈이었고, 상대의 거리 안을 과감하게 파고들면서 연계 공격을 펼쳤다.
그에 대항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은 완벽했다.
팔이 벌어지는 순간 공격을 시도했으면 피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것을 공략하지 않은 것은 로만의 의도라고 봐도 무방했다.
실수?
절대 아니다.
앞선 움직임만 보아도, 로만 드미트리는 그런 실수를 범할 존재가 아니다.
‘내가 만만하다 이건가.’
빠득.
이를 악물었다.
로만의 행보.
항상 상대를 빠르게 끝내 버렸다.
40위의 실력자도 30초를 버티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을 상대로는 의도적으로 승부를 끝내지 않는 것 같았다.
왜일까? 30위의 수문장이라서?
이제 본격적으로 30위 이상의 단계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상위 실력자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일까.
무엇이 되었든.
자존심이 상했다.
이따위 대결은 집어치우고 싶었지만, 페르난도는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내 자존심 따위는 아무리 짓밟아도 좋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내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보여다오.’
만년 30위로 남으며.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였다.
페르난도가 다시 치고 들어갔다.
오라가 폭발하며 시도되는 공격은 체계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단순히 검술만 보았을 때는 그간 상대했던 검사 중에 가장 압도적이었지만, 오라의 힘이 검술을 제대로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본인도 알았다.
대결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이 비웃는다는 사실을.
페르난도는 두 귀를 막고,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최선을 택했다.
콰앙!
이번에도 공격이 막혔다.
타이밍은 좋았다.
상식적으로는 먹혀야 했을 공격인데, 오라의 힘이 부족해서 로만 드미트리의 수비를 뚫지 못했다.
울컥했다.
짜증이 일었고, 화가 났다.
그런데 그때.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대로 마나를 움직여라. 그럼 한결 편해질 것이다.]
귓속을 파고드는 음성.
그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에, 페르난도는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 * *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게 대체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머리는 저딴 개소리를 무시하라고 말했지만, 페르난도는 자신도 모르게 몰아치던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4성의 오라 검사 페르난도. 네가 가진 실력에 비해 약한 이유는, 오라의 분출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오라는 강력한 분출로 파괴력을 발휘하는 힘이다. 네 신체적인 한계를 알고도 똑같은 방식을 고수한다면, 너는 평생 발전할 수 없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로만이 치고 들어왔다.
분명히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자신에게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앙-
카카카캉!
공방을 주고받았다.
페르난도는 일방적으로 밀리며, 로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일반적인 오라의 분출은 그간 마나를 받아들이고 분출하던 통로를 통해 마나를 폭발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마나의 통로는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샐러맨더 대륙의 검사들은 모두가 획일화된 체계를 따라 똑같은 마나의 통로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다. 네가 사용하는 마나의 통로가 태생부터 비좁았다면. 너는 왜 다른 통로를 개통할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거지?]
마나 심법.
어릴 때부터 갈고닦았던 기술은, 세월이 쌓일수록 오라의 분출에 적합한 통로를 형성했다.
체내에 퍼져 있는 마나는 일정한 길목에 따라 움직였고, 그래서 높은 경지의 검사들은 탄탄하고 넓은 통로로 인해 강력한 오라와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페르난도도 남들과 똑같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체계를 통해 통로를 형성한 그는, 미약하게 분출되는 오라를 보며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과 달랐다.
세상이 말하는 체계는, 페르난도의 창의성을 억압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새로운 통로를 개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번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
달콤한 말이었다.
완전히 현혹되었다.
사람들의 시선?
자신의 명예?
그따위는 상관없었다.
페르난도는 로만의 말에 집중했고, 본인이 일방적으로 농락을 당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수십 년을 기존의 체계를 따라 악착같이 노력했으면서도, 잘 알지도 못하는 로만의 말 하나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만큼 간절했다.
로만을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본능이 로만의 말을 따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였다.
지도 대련이 시작되었다.
로만은 페르난도를 밀어붙이며 전음으로 방법을 말해 주었고, 페르난도는 그에 따라 마나를 운용했다.
일방적인 승부.
1분 안에 결판이 날 것 같았던 대결은, 어느덧 10분에 달했다.
사람들이 지루함을 표출할 즈음.
확-
마나가 일었다.
새로운 통로를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느낌에, 페르난도는 눈을 부릅떴다.
‘……정말 가능한 일이었어?’
일말의 변화일 뿐이다.
아직 제대로 오라 분출의 단계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변화의 시작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았다.
피식.
로만이 웃었다.
그 순간.
[이만 마무리하도록 하지.]
번뜩.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검.
페르난도는 검을 들어서 막았지만, 강력한 충격이 그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퍽-
* * *
얼마나 기절해 있었을까.
정신을 차린 페르난도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왜 다른 통로를 개척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멍청했다.
발전의 여지가 있었는데도, 그걸 알아보지 못해 수십 년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마나는 잘못 다루었다가는 주화입마(走火入魔)로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몰랐다.
위험한 도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존의 체계를 답습할 수밖에 없었고, 페르난도는 방식의 문제보다는 당연히 태생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이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는데, 본인만 문제가 발생한다면 방식을 탓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기존의 체계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것이지 않던가.
“쯧쯧, 처참하게 깨졌네.”
“30위의 수문장이라더니. 로만이 얼마나 대단한지만 증명해 주는 꼴이네.”
“로만 드미트리는 확실히 괴물 같은 존재야. 그래도 30위의 랭커인데, 어떻게 10분이 되도록 농락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있지? 페르난도가 완전히 어린애처럼 일방적으로 밀렸잖아. 그간 오라의 폭발력에서 밀리는 모습은 보였어도, 이렇게 무력한 페르난도는 처음 보는 것 같아.”
“그게 바로 클래스의 차이지, 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페르난도 주변으로.
아직 떠나지 않은 관중들이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페르난도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사람들의 조롱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 준 존재.
어떻게든 새로운 가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가야만 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만은 멀리 떠나지 않았다.
인파에 휩싸인 채로.
로만 드미트리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밀고 지나가는 페르난도를 보며, 이게 무슨 일인지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로만 님!”
털썩.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만의 시선에, 페르난도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가르침을 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페르난도,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웅성웅성.
“이게 무슨 일이지?”
“가르침이라니?”
사람들이 당황했다.
로만과 페르난도의 대결.
일방적인 승부였다.
페르난도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로만이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페르난도가 엎드린 모습이 보였다.
‘30위의 수문장.’
당황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페르난도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