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615)

167화 카이로 제일 검 (2)

텅 빈 왕궁.

다니엘 카이로는, 로열 나이트의 복장을 착용한 남성과 같이 초조한 기색으로 무언가를 기다렸다.

끼익.

문이 열렸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안으로 들어선 기사는, 왕에게 예의를 표한 뒤에 보고 들은 것을 말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부였습니다. 첫 번째 차례인 브루노를 단번에 제압하더니, 30분이 지나지 않은 지금 오스카마저도 쓰러트렸습니다. 국왕 폐하.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하루 만에 9위부터 2위까지의 랭커를 모두 쓰러트렸습니다. 이제 그가 정상의 자리에 도전하는 것을 막을 명분은 없습니다.”

참담한 목소리였다.

방금의 결과.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카이로의 사람들은 단순히 역사에 남을 행보에 환호하겠지만, 다니엘 카이로는 웃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목소리가 떨렸다.

바로 앞에.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회색의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긴 사내는,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상당히 건장한 체격을 자랑했다.

가슴팍에 새겨진 로열 나이트를 상징하는 문양.

그 위에서 빛나는 태양은, 로열 나이트 중에서도 그가 제일의 검사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니콜라스 백작.”

“말씀하십시오.”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을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나는 자네가 카이로 제일 검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나로서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네. 최근, 베네딕트 후작을 비롯한 귀족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카이로 제일 검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내 보잘것없는 자리는 귀족파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겠지.”

지난 세월.

니콜라스 백작은 국왕파를 지키는 버팀목이 되었다.

그가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귀족파는 감히 반란을 도모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예전에 오스카가 1위의 자리에 도전한 적이 있었는데,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압도적으로 패배한 이후에는 아무도 그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만약.

그가 무릎을 꿇는다면.

권력의 붕괴를 의미했다.

절대적인 존재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가까스로 억눌렀던 욕망을 봇물 터지듯 폭발시킬 것이 분명했다.

니콜라스 백작이 말했다.

“국왕 폐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도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는 그간 힘이 없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슬아슬한 권력 체계에서 조금이라도 손실을 보는 것을 싫어할 뿐이고, 언제든지 결단을 내릴 힘을 갖추었습니다. 제가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도전을 거절한다면. 카이로 제일 검이라는 칭호는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때부터 베네딕트 후작은 제 존재를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네 개의 파벌.

아슬아슬한 권력의 체계는 왕실에 득이 되었다.

반란 이후의 상황도 생각해야 하기에, 베네딕트 후작은 무리하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결국, 니콜라스 백작은 혼자일 뿐이다.

그를 쓰러트리는 것은 가능하나,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릴지 알기에 균형의 추는 유지되었다.

외통수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오스카를 쓰러트린 순간부터.

니콜라스 백작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도전자들의 도전을 외면하는 절대자는 그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고, 제가 어째서 카이로 제일 검이라고 불리는지를 다시 한번 증명하겠습니다.”

강력한 도전자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미가 있었다.

니콜라스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거인의 풍모를 보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왕궁을 나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승패를 떠나, 다치기만 해도 카이로의 하이에나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벤트너였다.

과거.

국왕을 대신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던 인물.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니콜라스 백작을 보았다.

“내가 카이로 왕가(王家)를 따른 지도 어느덧 육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내가 괜찮고, 괜찮지 않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고, 나는 늘 그랬듯 해낼 것이다.”

니콜라스 백작.

그가 창문 너머를 보았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니콜라스. 내 아들을 부탁하마.”

전대 국왕.

다니엘 카이로의 아버지는, 죽기 며칠 전에 니콜라스 백작과 만났다.

참으로 나약한 인간이었다.

니콜라스 백작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카이로 왕가를 위해 살았고, 국왕은 늘 충성의 대상이었다.

카이로의 권력 체계가 찢어진 것은 전적으로 전대 국왕의 책임이었다.

그가 애초에 분란의 씨앗을 방관하지 않았더라면, 카이로 왕실은 막강한 권력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국왕을 탓하고 싶진 않았다.

왕가에서의 나약함은 무능을 상징하지만, 국왕은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

매일 혹독한 훈련에 절망하는 니콜라스를 보며.

국왕은 남들 몰래 치료제를 내밀었다.

그를 빼돌려 농땡이를 피우기도 했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다 같이 먹자면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좋은 시절이었다.

멋모르던 어린아이는 카이로를 대표하는 검이 되었고,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과도 같았던 국왕은 권력의 비열함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를 지킬 방법은 없었다.

니콜라스 백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실질적인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렇기에 강해지기 위해 발악했다.

결국.

국왕은 죽었다.

사람들은 니콜라스 백작을 카이로 제일 검이라 부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암수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창밖의 햇살을 마주하니, 자꾸만 전대 국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니엘 국왕 폐하를 따르겠다는 말에 모두가 나를 멍청하다고 했었지.’

전대 국왕이 죽고.

니콜라스 백작은 수많은 유혹을 받았다.

그중 하나를 움켜잡았다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겠지만, 그는 절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벤트너.”

“……예.”

“로만 드미트리, 그는 어떤 사내지?”

화제를 돌렸다.

추억에 잠길 여유는 없었다.

현실은 들이닥쳤고, 지금은 눈앞의 현실에 집중할 차례였다.

벤트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만 드미트리와는 딱 한 번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았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시절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생부터 포식자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고, 본인이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면 절대 공개 랭킹전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99위부터 1위까지. 모두가 무모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니콜라스 백작님 앞에 도전자의 자격으로 나타난 것처럼 그는 자신을 증명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또한.

니콜라스 백작을 믿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이긴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당신이 무너진다면, 카이로 왕가는 끝입니다.”

* * *

다음 날.

날이 밝았다.

카이로의 수도.

카이로스에 수많은 인파(人波)가 몰려들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한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갈라지는 것처럼 길을 열어 주었다.

저벅저벅.

로만 드미트리.

그가 걸음을 옮겼다.

검 한 자루를 쥔 채로, 사람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우뚝.

거대한 저택.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활짝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들어서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그 중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카이로 왕국이 제일 검(第一劍)이라 부르는 존재.

니콜라스 백작은, 기어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간 수많은 도전자를 상대해 보았지만, 너처럼 오만하고 대담한 인물은 없었다.”

순수한 감탄이었다.

99위부터 1위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사람들의 의구심은 경악으로 변해 버렸고, 지금은 정말 이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보였다.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 단언컨대, 너는 카이로 왕국을 넘어 대륙에서도 명성을 떨칠 자질을 타고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 리차드 니콜라스는 안식을 찾는 그 순간까지, 카이로 제일 검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슥.

검을 뽑았다.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둘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숨 막히는 긴장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너라. 내가, 현실의 벽을 보여 주마.”

그 순간.

팔락.

윌라스가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콰르르르르르르릉.

로만 드미트리가, 니콜라스 백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콰앙!

콰르르르르릉.

대결은 시작부터 격렬했다.

로만은 오래 끌지 않겠다는 듯이 곧바로 공격을 시도했고, 이전 상대들과는 다르게 니콜라스 백작은 로만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오라의 폭발이 일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땅과 하늘이 뒤흔들렸지만, 로만 드미트리와 니콜라스 백작은 누구 하나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번뜩.

랭킹 10위의 제론을 쓰러트렸던 수였다.

공간을 가르는 검이 팔뚝을 베어 버리려고 하자, 니콜라스 백작은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위로 쳐 냈다.

카앙!

동시에.

반격을 시도했다.

로만은 검을 회수하며 상대의 공격을 막았고, 이번에는 랭킹 3위를 쓰러트렸던 방식을 택했다.

똑같이 앞으로 치고 나가며 펼쳐지는 연계 공격.

상대가 호흡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고, 머리를 노렸다가 팔을, 팔을 노렸다가 몸통을, 그리고 다리를 몰아치는 공격에 니콜라스 백작이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랭킹 3위는 팔로 넘어가는 두 번째 공격도 버티지 못했다.

그만큼 빠르고 위협적이건만, 니콜라스 백작의 검은 차분하게 공격을 모두 쳐 냈다.

카앙-

카카카카카캉!

엄청난 공방이었다.

일반인들은 눈으로 좇기도 힘들었고, 주변으로 퍼지는 힘의 파동에 주춤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번의 공격.

4번의 방어.

니콜라스 백작의 존재감이 부풀었다.

그간.

로만의 대결 양상은 압도적이었다.

그 누구도 공격 한번 제대로 막아 내질 못했고, 랭커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패배를 맞이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구심이 일었다.

니콜라스 백작이 카이로 제일 검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 강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특히 랭킹 2위에 해당하는 오스카가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억은 잘못되지 않았다.

니콜라스 백작의 실력은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카이로의 랭커들이 5번의 공격을 버텨 내지 못한 것과는 달리, 그는 벌써 스무 합이 넘는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때였다.

타닥.

공격과 공격의 틈.

니콜라스 백작의 눈빛이 변했다.

검에서부터 강력한 오라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더니, 폭발하는 듯 치고 나가며 상대를 베어 버렸다.

비장의 수.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이번에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한 방 먹일 속셈이었다.

그러나.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공격을 막았다.

예상했다는 움직임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반응한 모습이었다.

촤르르륵.

뒤로 밀려나는 니콜라스 백작.

그가 히죽 웃었다.

“정말 재밌는 녀석이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한순간도 도전자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카이로 제일 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득달같이 밀어붙였다.

재밌었다.

확실히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패배한다.’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다.

착.

검을 바로잡았다.

속에서부터 들끓는 마나.

카이로 제일 검.

자신의 공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