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615)

170화 숙청 (1)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충성을 맹세할 생각이 없었다.

공개 랭킹전을 선언한 이후로부터 피어오르던 의구심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멍청한 새끼.”

베네딕트 후작이 이죽거렸다.

새로운 랭킹 1위.

로만 드미트리는 강하다.

앞으로 카이로의 권력을 주도할 자격을 갖추었지만, 그는 본인의 승리에 취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가 밟고 있는 땅이 카이로스라는 것.

드미트리에 몸을 숨기고 진실을 밝혔다면 공격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그는 위험에 노출된 환경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철그럭, 철그럭.

귀족파의 병력이 주변을 둘러쌌다.

철제가 부딪치는 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피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침묵을 뚫고.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지금부터 중앙 정부의 수장인 나 베네딕트 후작의 이름으로 고한다. 지난 몇 년간. 드미트리 가문은 바르코, 더글라스 가문 등 주변 일대의 세력을 무분별하게 공격하는 행태를 보였다. 카이로는 전쟁 국가다. 언제 외세의 침략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란은 철저하게 금기되는 사항이건만, 드미트리 가문은 본인들의 잇속을 위해서 나라의 안위를 나락에 빠트렸다. 고로, 이에 관한 전후 조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포박하도록 하겠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바르코와 더글라스.

로만에게 짓밟힌 존재들이었다.

그 과정에 문제는 없었다.

바르코는 로렌스와 시비가 붙었고, 정략결혼 문제로 뒤얽혔던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을 도와줄 명분이 있었다.

더글라스도 다르지 않았다.

더글라스가 북부의 가문들을 끌고 오면서 지역 간의 다툼으로 번졌고, 드미트리 가문은 동북쪽 일대의 실세로서 상황을 방관할 수 없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듯.

말장난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베네딕트 후작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포박의 명분으로 삼았다.

“중앙 정부는 국왕 폐하의 명령을 받드는 조직이다. 항명(抗命)은 국왕 폐하의 뜻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고, 드미트리 가문을 반란죄로 처벌하겠다. 그러니 순순히 포박에 임하라. 네가 적극적으로 조사에 응한다면, 조사 과정에서 드미트리 가문의 죄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겠지.”

베네딕트 후작이 씰룩, 웃었다.

중앙 정부.

살아 있는 권력.

반란이라는 단어로 로만 드미트리를 억압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제아무리 개인의 무력이 강하다고 한들, 이번만큼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순순히 포박에 응한다면. 베네딕트 후작은 로만 드미트리가 날뛸 수 없도록 전신의 근육을 완전히 끊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포박에 응하지 않는다면.

반란죄라는 명분은 귀족파와 드미트리의 싸움이 아니라, 카이로 왕국과 드미트리의 싸움이라는 구도를 만들 수 있다.

영악했다.

베네딕트 후작은 본인의 권력을 활용해, 로만 드미트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부여했다.

‘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네가 나의 손을 잡았다면 평생을 카이로의 권력자로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겠지만, 같잖은 적의를 보인 그 순간부터 네가 살아갈 공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로만 드미트리는 언제고 큰 후환이 될 존재. 드미트리로 돌아가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을 구축하기 전에, 다시는 날 적대하지 못하도록 힘의 원천을 완전히 없애 주마.’

외통수였다.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린 직후.

로만 드미트리가 약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을 노렸다.

사실 충성을 맹세했다 하더라도, 베네딕트 후작은 일단 로만을 포박해 의지를 시험해 보았을 것이다.

귀족파의 수장.

베네딕트 후작의 진면목이었다.

잔인하고 과감한 실행력이 없었다면, 귀족파는 카이로의 권력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힐끗.

눈치를 주었다.

귀족파의 병력.

그들이 로만을 향해 다가갔다.

말로써 손과 발을 묶어 버렸으니, 로만 드미트리는 순순히 당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푸확!

“헉.”

“이 새끼가.”

피가 튀었다.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기사.

로만 드미트리가, 보란 듯이 베네딕트 후작의 기사를 베어 버렸다.

* * *

베네딕트 후작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항명을 택할 줄은 몰랐다.

반란은 드미트리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다.

무엇보다도 귀족파의 병력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최악의 선택지를 택했다.

“……지금 반란을 하겠다는 의미냐?”

“아니, 말은 똑바로 하지. 국왕 폐하에 대한 항명이 아니라, 베네딕트 후작. 너에 대한 항명이다.”

로만이 이죽거렸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이로스는 왕가의 땅이다. 나라가 무너질 위기가 아닌 이상, 어떤 명분이든 귀족 가문의 사병(私兵)은 일정 기준이 넘어가는 병력을 카이로스에 들일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 기준을 과하게 넘는 것 같은데. 베네딕트 후작. 설마, 지금 반란을 일으키려는 속셈인가?”

“이런 건방진 새끼가!”

베네딕트 후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감히.

상대가 반란을 입에 올릴 줄은 몰랐다.

이제는 완전히 적이라는 듯이 말을 놓는 태도도 그렇고, 베네딕트 후작은 폭발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땅바닥에 짓밟혔다.

누가 승리하든. 둘 중 하나는 끝을 봐야만 했다.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중앙 정부는 카이로의 중심이다. 그렇기에 중앙 정부라 불리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결정은 카이로 국왕 폐하의 뜻을 반영한다. 그런데 뭐라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속셈이냐고? 하하하하, 네가 반란을 부정하려고 단단히 미쳤구나. 너는 지금 왕의 명령을 따르는 신하를 베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반란이고, 네 그 안일한 선택으로 인해 드미트리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옳습니다.”

“극악무도한 반역도를 처단합시다!”

귀족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카이로스에서 벌어진 싸움이기에,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수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예상한 바다.

로만 드미트리는, 베네딕트 후작이 길을 막은 순간부터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베네딕트 후작.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국왕 폐하가 결정할 일이다. 고로, 지금부터 나는 반란을 도모한 카이로의 쓰레기들을 처리할 생각이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그때는 왕가의 뜻을 우롱한 네 녀석이 아니라, 카이로 국왕 폐하에게 직접 심판을 받도록 하겠다.”

상대가 극단적이라면.

똑같이 극단적으로 나갔다.

눈을 부릅뜨는 베네딕트 후작을 바라보며.

“크리스, 케빈. 길을 열어라.”

그 말에.

명령을 기다리던 두 검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 * *

얼추 보아도 수백은 넘었다.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병력이건만, 크리스와 케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격해!”

“저 녀석들을 막…… 컥!”

푸확.

시작은 케빈이었다.

케빈은 적으로 득실거리는 공간에 몸을 던지더니, 가장 선두에 있는 기사의 목을 그어 버렸다.

피거품을 물며 무릎을 꿇는 기사. 그의 시야에 아군을 학살하는 케빈의 모습이 보였다.

콰르르르르릉.

귀족파의 기사들이 오라를 끌어올렸다.

일제히 케빈을 공격했지만, 날쌘 짐승처럼 움직이는 케빈은 앞으로 달려들면서도 모두 피해 버렸다.

그리고는.

퍽!

푸욱!

상대의 목숨을 끊었다.

공격 한 번에 적들의 비명이 따라왔고, 케빈은 얼굴에 튀는 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빠르게 움직이며 적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케빈이 마치 피에 절은 악귀(惡鬼)와도 같은 모습으로 적들을 처리한다면, 뒤이어 도착한 크리스는 단단한 벽과도 같았다.

콰직!

“크악.”

적이 검과 함께 두 동강이 나 버렸다.

크리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처리해야 할 적들은 차고 넘쳤다.

귀족파의 병력은 아직은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착각에 빠졌고, 먼저 달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크리스의 발밑에는 시체가 쌓여 갔다.

일반 병사, 오라 검사 할 것 없이. 크리스를 상대하는 적들은 단번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특별하게 대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아닌데도, 몇 번 공방을 주고받으면 탄탄한 검술에 상대의 표정이 충격과 공포로 물들었다.

푸확!

귀족파의 기사가 쓰러졌다.

나름대로 오라 검사로서 명성을 떨친 존재이건만, 크리스를 상대로는 세 합을 버텨 내지 못했다.

그리고.

“크리스와 케빈을 엄호해.”

“공격해!”

다른 수하들도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 수도행.

로만은 많은 병력을 대동하지 않았다.

크리스와 케빈을 비롯해 스무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먼저 달려든 두 검사처럼 다른 수하들도 적을 공격하는 일에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푸키와 볼칸이 공격하자 적들의 사지가 찢겨 나갔고, 헨더슨과 맥버니는 적들을 차분하게 하나씩 쓰러트렸다.

어떻게 적들을 상대하자는 작전은 없었다. 그냥 들이받았는데도, 로만의 수하들은 서로를 보완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지난 1년.

로만은 시간을 가졌다.

본인이 강해지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사람들이 앞으로의 혼란을 준비할 시간이기도 했다.

그 결과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로만의 수하들은, 겨우 스무 명의 인원으로 수백의 적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길이 열렸다.

귀족파의 병력은 악착같이 달려들며 막아 보려고 했지만, 시체가 쌓여 가며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사이로.

저벅저벅.

로만이 앞으로 걸어갔다.

저 앞에.

베네딕트 후작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체를 밟고, 피가 고여 있는 웅덩이를 밟고, 그렇게 목표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 * *

“……이, 이런 미친 새끼들이.”

베네딕트 후작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눈이 팽팽 돌았다.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머리가 이해하질 못했다.

‘카이로스에서 감히 귀족파를 공격하다니.’

로만 드미트리.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귀족파를 공격하는 것은 반란이나 다름이 없는데, 상대는 그걸 알고도 행동에 옮겨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네딕트 후작님!”

귀족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수백의 병력이 수적 우위를 내세워 압도해야 하건만, 로만 드미트리가 나서지 않았는데도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귀족파의 편이었다.

만약 이대로 버틴다면 카이로의 경비병들이 도착해서 반역도를 공격해 주겠지만,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활짝 열린 길을 통해.

천천히 걸어오는 로만의 모습이 보였다.

심장을 억죄어 오는 공포에, 베네딕트 후작은 현실을 직시했다.

‘내 판단이 틀렸다. 반란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억압할 수 없다면, 지금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다.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린 괴물.

소규모 싸움으로는 승리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귀족파의 힘은 막강한 권력에 있다.

일단 한발 물러나고 중앙 정부를 움직인다면, 로만 드미트리를 짓밟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대단한 무력을 보유했다고 한들. 일개 가문이 왕국의 공격을 어떻게 버티겠는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베네딕트 후작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듯 고래고래 소리쳤다.

“로만 드미트리는 극악무도한 반역도다! 모두 목숨을 걸고 반역도를 공격하라! 신분을 막론하고 그 누구라도 반역도의 머리를 가져오는 자가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의 미래를 약속해 주겠다!”

“공격해! 모두 공격하라고!”

귀족들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도망쳤다.

병사들을 사지에 밀어 넣고는, 귀족들은 꼬리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사지에 남은 병사들.

그들도 알았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하지만 명령을 받는 존재들은,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고도 길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머, 멈춰!”

“이곳은 카이로스다!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귀족파의 병력.

그들이 덜덜 떨면서도 로만을 막아섰다.

바람만 후 불어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귀족파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믿는 모양인지, 되지도 않는 협박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로만의 걸음을 막으려고 했다.

어차피 명령 불복종은 즉결처형감이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을 운명이라면, 그들은 변절자로 죽는 것보다 끝까지 싸우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로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귀족들은 내버려 둔 채로, 눈앞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나 또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할 테니.”

검을 들었다.

지금부터는.

숙청(肅淸)의 시간이다.

5